제12편 이중 전선(二重戰線)
이씨 가문 상단-영와상단의 총책임자가 고개를 떨궜다.
“…대공자께 우리 상단을 매각하도록 하겠소.”
상관난화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서류의 빈칸을 가리켰다.
“여기 성함을 쓰고, 날인하시고, 상단에 인장과 지장을 찍어 주시면 됩니다.”
“…아니.”
그녀의 말에 영와상단의 총책임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액수부터 분명히 해야지.”
“어머, 그렇네요.”
은근슬쩍 날로 먹으려던 상관난화가 실수인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액수는 이 정도면 될까요?”
그녀가 품에서 꺼낸 쪽지에 적힌 액수를 확인한 총책임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터, 터무니없소! 이딴 금액은 낙양 번화가에 위치한 대형 객잔 하나의 가격에 불과하오! 겨우 이런 액수로 이 거대한 상단을 인수하려 들다니…!”
그의 눈은 시뻘겠고, 입에는 거품을 물었다.
“제대로 된 가격을 치르겠다고 하더니, 완전히 날강도나 다름없는 처사가 아니오?! 아무리 우리 이씨 가문의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원수나 다름없는 대공자에게 이따위 가격으로 넘길 바에야 차라리…!”
상관난화가 빙긋 웃었다.
“차라리?”
“차라리….”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방법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지금 그가 이 치욕을 감수하고 있던것이 아니던가.
지금의 영와상단은 기름이 줄줄흐르는 살코기를 드러낸, 거대하지만 무력한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제대로 된 값을 치르고 영와상단을 인수할리가 없었다.
“확실히 이 액수는 영와상단의 매각 금액이라고 하기엔 터무니가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죠.”
망연한 표정의 그를 보며, 상관난화가 탁자를 두드렸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가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을 들어 상관난화를 바라보았다.
“이 금액은 누군가의 '해외 도피 생활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금액이랍니다.”
그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말씀대로 이 금액은 이 거대 도시 낙양의 번화가에서 대형 객잔을 하나 구매할 만한 금액이거든요.”
"......."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가라앉는 배와 함께 침몰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이제까지 가문에 헌신했던, 대가를 받을 차례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 안전은 보장해 주시겠지. 추후에 이 거래의 증인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풍요로운 해동국은 어떨까요? 아니면 사시사철 따스한 월국도, 평화로운 서장 땅도 가능하답니다.
소년 시절의 모험심이 아직 남아있다면 대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떠나시거나, 구라파(歐羅巴)의 열강들이 가진힘을 직접 확인하러 가시는 방법도 있지요.”
그녀가 꽃이 피어나듯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 * *
“강남과 낙양을 육로로 연결하던 이 거대한 상단을, 단 한 사람의 해외 도피 자금으로 인수해 버리다니…!”
이령이 반짝이는 눈으로 영와상단과 관련된 서류들과 상관난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별것 아니랍니다. 대표님께서 모든 길을 닦아 두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후후. 역시 그렇지요? 제 주인이신 대공자님의 능력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상관난화가 겸양을 떤 말에, 어째서인지 자신이 콧대를 세우고 어깨를 으쓱거리던 이령이 멈칫거렸다.
“어라? 그러고 보니….”
그녀가 상관난화에게 물었다.
“주인님께서 이 상단을 소유하셔도, 사패천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이 핵심인 이 사업체가 제대로 운영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사실, 제대로 운영하는 것을 힘든 것을 넘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상관난화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기에, 여기서부터는 대표님께 맡겨 드려야 할 영역이지요.”
그녀가 대기하고 있던 현월각의 지부장급 인사에게 서류들을 엄중히 봉인하여 넘겼다.
“아앗?! 그러면 이 영와상단이 어떻게 될지, 제가 직접 보지 못한다는 뜻이되는 것인가요?!”
이령의 탄식에 가까운 말에 상관난화가 방긋 웃었다.
“대신! 이번에 작전 자금을 많이 아꼈으니, 지금부터 그걸로 유망한 사업체를 추가적으로 인수할 생각인데…"
“좋습니다! 좋아요! 당장 출발하시죠!”
현월각의 지부장은 신이 난 이령과 웃음을 터트린 상관난화를 뒤로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전쟁이.
자신에게는 자신의 전쟁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품에 봉인된 서류들을 단단히 고정했다.
"......."
그 모습이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이공자 측 정보 단체, 대선상회의 현월각에 대한 반격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대선상회의 첩보망에 걸려,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
그는 거리로 내려와 인파 사이로 섞여들었다.
'빠르게, 은밀하게, 정확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그는 가장 기본이 되는 수칙들을 되뇌며, 감각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기감을 끌어 올려서는 안 된다.
예리하게 갈고닦은 본래의 감각만을 활용해야 했다.
기에 예민한 '적'들이 그를 쉬이 주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인력거를 타고 특정 지점을 통과한 후, 다음 지점까지 작은 수로(水路)의 나룻배를 통해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런 질문도 대화도 없이, 묵묵히 노를 젓던 뱃사공이 피를 토했다.
"......!"
쓰러지는 뱃사공의 가슴팍을 뚫고 나온 화살촉이 피를 머금고 번들거렸다.
'제길, 적이군!’
대선상회의 요원들, 혹은 대선상회의 의뢰를 받은 전문가들이 분명했다.
어떤 경로로 적들이 그의 움직임을 파악했는지, 지금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일단 탈출을-!’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경공으로 나룻배를 벗어나려다, 멈춰섰다.
요원으로 쌓아 올렸던 경험과 날카로운 그의 기감이 명백한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오물로 인해 불투명한 물속에서 적들이 일제히 치솟았다.
범상찮은 수공(水功)을 익힌 이들의 기습이었다.
'적은 다섯.'
빠져나갈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적들이 물속에서 치솟아 공중에 떠서 태양을 가렸던, 그 짧은 순간.
지부장은 각오를 다졌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팔이든 다리든 내어 주마…!’
그가 필사의 저항을 각오하고, 신호탄을 꺼내려던 그때, 그의 귓가에 전음이 날아들었다.
[현월각의 요원 녀석아, 숙이거라]
즉시 전음이 시키는 대로 몸을 날려 엎드렸다.
그리고 그를 덮쳐들던 적들 중 두 명이 거미줄에라도 걸린것처럼 허공에서 덜컥 멈춰섰다.
수로 좌측의 건물 벽을 뚫고 나온 양손에 그들의 머리가 하나씩 붙들려 있었다.
그것은 기형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긴 팔이었다.
"큭...!"
“으, 읍!”
붙들린 이들이 채 저항을 해 보기도 전에,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박살 났다.
머리통을 잃은 시신 두구가 피를 흩날리며 물에 떨어질 때, 나머지 세 명의 적 또한 목숨을 잃고 통나무처럼 물에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목덜미에서 피를 흩날리고 있었는데, 경추가 딱 한 마디씩 비어 있었다.
적들의 시신이 물에 떨어져 크게 물보라를 튕겼다.
“…당신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놀란 눈의 지부장은 기형적으로 긴 팔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수법으로 좁은 건물 틈 사이를 거미처럼 움직여 모습을 드러냈다.
가느다란 몸통에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를 가진 남자였다.
“사천의 침묵자(沈默者)…!”
기기괴괴(奇奇怪怪)라고도 불리며, 과거 사천당가가 배출한 최악의 암살자로 그 이름을 널리 알렸던 괴인.
그는 홍독지주, 당백, 당예린, 곽 노인에 이어, 사공자 연비의 최측근 중 마지막 인물이었다.
“본좌(本座)가 두 명을 처리하는 동안 세 명이라니….”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남자는 찌푸린 눈으로 지부장이 아니라, 그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좌는 그대 같은 암살자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가 없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그의 말과 시선에 고개를 돌린 지부장은 기겁했다.
“......?!”
자신의 뒤에, 아무런 기척도 없이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응….”
분장에 가까운 화장.
못 보고 넘어가기 힘들 정도로 미려한 옷을 입은 그녀, 서림청이 콧소리와 함께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기기괴괴라. 암살자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조금 어떨까~, 싶네요. 명성이란 대상의 경계도만 올릴 뿐, 암살 성공에는 딱히 도움은 안 되지 않을까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경추 마디 세 개를 등 뒤로 던져 버리고는, 얄밉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암살자라고 하기보다는, 공포를 퍼트리기 위해 당가의 체제가 만들어 낸 선전도구와 같다고나 할까요~?”
나긋나긋한 말투와는 전혀 다른, 날이 새파랗게 선 독설이었다.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제대로 된 암살자로 인정하지 않는 그녀다운 말이었다.
“뭐?”
기기괴괴, 사천의 침묵자로부터 살기가 노도처럼 터져 나왔다.
벽면에 매달려 있던 그가 펄쩍 뛰어 나룻배 위에 떨어졌다.
지부장은 작은 나룻배가 휘청일것을 대비해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룻배는 흔들리기는커녕, 평온하기만 했다.
“…본좌의 얼굴에 대고 다시 한번 지껄여 보시지.”
긴 목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기괴괴가 몸을 숙여, 서림청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머~ 숙녀에게 머리부터 들이 밀다니. 실력도 부족하면서, 예의도 부족한 남자네요~."
서림청의 말에 기기괴괴의 이가 부드득 갈려 나가는 소리를 냈다.
바로 옆에서 두 사람의 살기를 뒤집어쓴 현월각의 지부장은 몸이 얼어붙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두 분. 사이가 좋은 것이, 아주 보기가 좋습니다.”
그때 수로 옆 건물의 옥상에서부터 비아냥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신경전을 벌이는 두 암살자에게 말했다.
“그렇게 두 분이 임무 도중에 친목을 다질 여유를 부리신다면.”
그녀는 세쌍둥이 시녀 중, 삼령이었다.
옥상에 있던 적들을 모두 제거한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나중에 보고받으실, 제 주인님께서 아주 기뻐하시겠죠?”
그녀가 연소현을 거론하는 것은 두 암살자의 행동에 무엇보다도 확실한 제어 장치가 되었다.
"쳇."
“흥."
혀를 찬 기기괴괴가 그 이름 그대로 기괴한 움직임을 보이며 좁은 건물 틈 사이를 통과해 모습을 감추었다.
현월각의 지부장이 잠깐 옥상의 소녀를 바라본 그 짧은 사이에, 서림청 또한 코웃음과 함께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춰 버렸다.
“읏차!”
삼령이 옥상에서 뛰어내려 나룻배 위에 섰다.
나룻배가 슬쩍 출렁였다.
“미리 알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예?”
현월각의 지부장이 그녀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령이 그에게 미안한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설명을 해 주었다.
“사실, 지부장께서 중요한 서류를 전달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린것은 우리 쪽이에요.”
그 말만으로도 지부장은 사건의 전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바로 미끼였군요 적들을 유인하기 위한.”
일부러 중요한 진짜 정보를 노출시켜, 그림자속의 적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한 후, 그것을 잡아먹는다.
이 계획을 알려 주지 않은 현월각주나 대공자에게 놀라거나 배반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이 정보업계라는 바닥은, 늘 누군가의 뒤에서 일이 벌어진다.
오늘은 자신의 뒤에서 일이 진행됐을 뿐.
게다가 자신은 버림받기는커녕, 오히려 든든한 지원군까지 받지 않았는가.
“예, 정확해요. 저는 방금의 비협조적인 두 인원과 함께, 대선상회에 대한 타격 특임조를 구성하고있는 삼령이라고 해요.”
저는….”
그가 자기소개를 하려 할 때, 그녀가 몸을 날렸다.
[자! 목적지까지 달리세요! 모여드는 적들은 저희 특임조가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목적지까지 최단거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길목마다 적들이 풀어놓은 사냥개들이 튀어나왔지만, 그저 경공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좁은 창문에서 튀어나온 기다란 손이, 어느새 적의 뒤를 잡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췄다.
누구도 그의 길을 방해하지 못했다.
* * *
낙양, 번화가 중 어딘가.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지부장이 상관난화로부터 건네받았던 서류들을 대공자 연소현에게 바쳤다.
그 봉인된 서류들을 받은 연소현의 눈길이 잠시 그에게 머물렀다.
“고맙다. 고생 많았군.”
“…아닙니다. 그저 임무였을 뿐.”
어깨를 두드려 준 대공자는 근처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그에게 작은 물건 하나를 내밀었다.
“별 것 아니지만, 자네의 휴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군.”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를 올린 그가 전각을 빠져나와 뒷골목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그는 즉시 골목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휴우...."
그는 대공자에게 받았던 물건의 포장을 풀었다.
비단 포장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것은 최고급 궐련이었다.
그의 몸에서 희미하게 나는 냄새로, 대공자는 그가 애연가인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벽면에 기대앉은 그가 낄낄거리며 궐련을 입에 물고 휴대용 부싯돌 장치로 불을 붙였다.
“맛 끝내주는군.”
낙양 모든 이들의 이목이 이씨 가문이 연소현에 의해서 몰락해 가는 것에 쏠리고 있을 때.
그 이면에는 대공자의 현월각과 이공자의 대선상회간에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은 대공자가 북망산에 오르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잠시간의 휴식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대선상회는 그 규모에서 현월각보다 훨씬 거대한 상대였으니.
“…좋아.”
두어 번 길게 연기를 뿜어내며 잠시간의 여유를 즐긴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연기의 꼬리를 길게 남기며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다시 자신의 전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이씨 가문의 상단이자, 이씨 가문의 마지막 남은 힘.
영와상단의 모든 소유권을 담은 서류를 확인한 연소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사패천의 영역인 강남을 낙양과 잇는 이 거대 상단을 자신이 운영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상관없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던가.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고 화려한 실내에는 연초 연기로 가득했다.
“오래들 기다리셨소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것을 확인한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다들 전표들은 두둑하게 챙겨 오셨겠지요?”
그의 농담에 좌중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중원국에서도 유명한 상단들의 대리인들이었고,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금 하나는 넘치는 이들이었으니.
“자, 그럼.”
연소현이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본 대공자는 영와상단의 새 주인으로서, 이제부터 영와상단을 지역별로 분할하여 매각하도록 하겠소.”
그의 말에, 누구랄 것 없이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눈빛을 번쩍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영와상단과 같은 영역에서 다투던 각기다른 경쟁업체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