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편 지장(指章)
연소현이 이씨 가문의 급습을 시작했을 무렵.
다선랑의 창립자 상관난화는 자애원 본산의 한 집무실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
그녀의 풍부한 속눈썹아래 아름다운 눈동자가 풀리지않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무슨 서류이길래, 그렇게 골똘히 고민하시는 것인가요?”
전담 호위 임무를 맡고 있던 시녀, 세쌍둥이 중 둘째인 이령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 이 서류는 대표님께서 주셨던, 두 번째 목록이에요. 저희가 매입해야 할 사업체들의 이름이 담겨 있답니다.”
그녀의 답에 이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께서 건네주신 목록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별첨(別添)되어 있는 사업체들은….”
상관난화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경영 상황도 좋고, 그 사업의 규모도 거대하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저희가 인수할 방법이 없어 보이는 사업체들이에요.”
“주인님께선 그런 사업체들을 어째서 별첨까지 하셔서 목록에 넣어두신 걸까요?”
상관난화의 길고 얇은 손가락이 서류를 두드렸다.
“글쎄요. 일단 이 사업체들의 공통점부터 짚어 보자면, 사천에 사업 기반을 두고있던 저도 알 정도로, 규모가 큰 사업체들이라는 것과 그리고….”
이름만 나열된 목록을 보고 사업체들의 공통점을 줄줄읊는 상관난화의 모습에 이령이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
“뭔가 알아내신 건가요?”
상관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아마도 조금 있으면 대표님으로부터 이동 지시가 내려올 것 같네요.”
“…네에?”
이령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사람을 불러 상관난화의 지시를 수행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시진쯤 지났을 무렵, 연소현으로부터 이동 지시와 함께 좌표가 적힌 암호 쪽지가 도착했다.
"......!"
이령은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 *
현재.
낙양, 이씨 가문 본가.
신입 수사관이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포로를 모아놓은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흠흠.”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적당히 뒤적거리는 척을 하며, 커다란 체구를 지닌 무림인의 근처에서 헛기침을 해 보였다.
“…뭐요?”
포박당한 채 명상을 하던, 중년 무림인이 눈을 뜨고 신입 수사관을 돌아보았다.
얼굴에서부터 드러난 가슴팍까지 흉터로 덮여 있는 모습에 순간 기가 팍 눌린 신입 수사관이었지만, 이내 호기심이 더 앞섰기에 은근한 어조로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당신이 그 유명한 개봉(開封)의 결투사(決鬪士) 맞지?”
그 말에 결투사라 불린 무림인이 피식하고 웃었다.
“개봉에는 수많은 결투사가 있다오.”
그때 신입 수사관의 동기가 슬금슬금 다가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당신의 외모를 보아하니, 일일일보일도일승(一日一步一刀一勝)으로 알려진 량현도객(焼弦刀客)인 것 같군. 맞나?”
중년 무림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본인이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백승(百勝)을 향해 달리던 낭귀도(狼鬼刀)를 꺾었다는 그 량현도객이 그대였군.”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이씨 가문에 식객으로 머물 수 있겠지.”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량현도객이었다.
“우리는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이오?”
다른 신입 수사관이 은근히 턱짓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분 말이다. 저분.”
량현도객의 날카로운 삼백안(三白眼)이 수사관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했다.
저 멀리에는 대공자 연소현의 모습이 있었다.
"......."
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표정을 찾기 힘들던 결투사의 얼굴이 일순이었지만 일그러졌다.
일합을 나눠 보지 못하고, 항복한 자신의 처지가 떠오른 탓이리라.
“저분의 경지가 어느 정도 되는것 같으냐?”
신입 수사관들이 물었다.
“우리보다는 명성 높은 결투사가 무공 보는 눈이 더 좋겠지.”
신입에 불과했기에 전투에는 참관만 했던 두 사람은 연소현의 활약상을 제대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호기심을 풀기위해서, 굳이 강호에 명성 높은 포로에게 말을 건 것이다.
"......."
량현도객은 굳이 대답해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가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수사관들이 계속 귀찮게 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딱 봐도 신입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현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수사관들에게 비협조적으로 굴어서 좋을 일은 없었다.
“…나는 집단 전투나 전술 따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멀리 연소현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움직임은 정병(精兵)들 사이에서도 거침이라고는 없었고, 밀착하여 힘을 겨루고있는 군세의 사이를 무인지경처럼 휘젓더군.”
“그것은 우리 또한 똑똑히 봤지.”
“그래서 대공자의 경지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다고 본단 말인가?”
량현도객이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겠소.”
그 대답에 두 신입 수사관의 표정이 황당해졌다.
“모르겠다니?”
"......."
그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고는 아예 눈을 다시 감아버리고 명상에 잠기는 시늉을 하는것이 아닌가.
“어허, 말 좀 해 보게.”
“우릴 궁금하게 해서 뭐라도 얻어 낼 셈이라면-.”
안달을 내던 신입 수사관들의 뒤통수에 거친 손바닥이 작렬했다.
“이 멍청한 자식들…!”
선배 수사관이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예의도 모르는 애송이들이, 피를보고 흥분하여 정신 줄까지 놓아버린 것이더냐?”
“서, 선배님…!”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정색한 선배의 모습에 신입 수사관들이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저분께선 한낱 강호의 무림인이 아니라, 검가의 대공자이시자, 오늘 있을 수 있었던 아군의 희생을 크게 줄여 준 영웅이시다. 그런 분이 계신 자리에서 그 경지가 어떠니 저떠니하며 숙덕거려?”
적의 선혈이 채 마르지도 않은 갑주를 입은 선배의 사나운 눈길이 두 신입을 노려봤다.
“다들 눈이 없고, 입이 없어서, 저분이 보여 주신 신위를 떠들지 않는 것 같으냐? 네 녀석들에게는 경의를 표할 마음조차 없는 것이냐? 아니면 예의를 못 배워 처먹은 것이더냐?”
그의 지적에 신입 수사관들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못난 놈들. 당장 둘 다 임무로 돌아가라.”
신입 수사관들이 급히 자리를 뜨자, 그들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선배 수사관 또한 자신의 임무로 돌아갔다.
”...흠."
조금 전, 선배 수사관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미리 입을 다물었었던 량현도객이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뜨고 멀리 연소현을 바라봤다.
'...저 나이에 내가 파악하기도 힘든 무공 수준을 보여 주다니. 천의무봉 연서린에 이어, 강호에 또 한 명의 천재가 등장한 것인가.'
그는 고수에 이르기 위한 '벽'에 도전하는 자였고, 그가 경지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은, 저 대공자의 경지가 명백하게 벽을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무언가 자신이 벽을 넘기위한 약간의 단서라도 찾기 위해서 연소 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려던 량현도객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
그가 관찰을 위해서 내공을 불어넣어 안력을 돋우자마자, 연소현이 거짓말처럼 그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 자신의 머릿속이 일순 하얗게 변했었다.
신체와 정신을 압박하는 것을 넘어, 마치 영혼 가장 밑바닥까지 꿰뚫어보고 짓눌러 버리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도, 도대체!’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린 식은땀을 느꼈다.
그 수라장과 같은 개봉땅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무인들을 수없이 보았던 그였지만, 저 대공자는 그 어떤 이들과도 달랐다.
'그러고 보니….'
문득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 대공자의 손에 검이 들린다면…?’
저 경지를 감히 측정할 수 없는 소년은, 그 '검가'의 대공자가 아니었던가.
* * *
정비를 마친 철갑요새에 올라타기 전, 연소현이 청씨 가문의 가주, 청 대인에게 말했다.
“마무리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맡겨 두시오, 대공자.”
그 말에 청 대인이 호탕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이 전쟁은 이제 시작이지 않소?”
“그렇지요.”
청 대인을 일별한 연소현이 올라타 문이 닫히자, 영물들이 길게 울고, 강철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치료를 받던 부상병 하나가 의원의 손길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부상병들 또한 도움을 얻어서라도 두 발로 일어났다.
철갑마차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수사를 하던 수사관도, 일선에서 직접 수사 지휘를 하던 젊은 판관도, 그늘에서 휴식 중이던 사법 집행 병력도, 모두가 서서 그 시선을 철갑요새로 향했다.
그 시선들에는 한 점의 불손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손을 들어 가슴에 붙이고 고개를 숙여 보인 것은 사법 집행 병력의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모두가 연소현을 향해, 정중히 주먹 쥔 손을 가슴에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군례(軍禮)였다.
"......."
"......."
그것은 그의 무위와 용맹, 그리고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직접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대공자를 향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철갑요새가 모습을 감추고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경의를 충분히 표현했다고 납득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누구랄 것 없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보았는가?”
“그럼, 보았지. 그건 신위였어. 신장(神將)이라는 말이 딱 맞는 분이었지.”
연소현이 있는 자리에서는 예를 지켜야 했기에 감히 뒤에서 이러쿵 저러쿵 떠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나서는 달랐다.
그는 오늘 빛나는 활약을 보였고, 그 활약에 대한 칭송을 널리 퍼뜨려야 하는 것은 신성(新星)이 받아야 할 마땅한 예우였으니.
수사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떠들었다.
“덕분에 오늘 크게 개안했군.”
“그저 지켜봤던 것만으로도, 일신의 무공에 뭔가 깨달음을 얻은 느낌일세.”
“권, 장, 각을 가리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깃대로 펼쳐 보였던 그 고절한 창법은…!”
판관들도 연신 수염을 쓰다듬었다.
“저런 인물이 여태 칩거를 하고 그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회남자(淮南子)에서 이르길, 호표(虎豹)는 불외기조(不外其爪)하고, 이서불견치(而噬不見齒)한다더니….”
호랑이와 표범은 그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물어뜯을 때도 이빨을 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 말이 딱, 저 대공자를 가리키는 말이로구려.”
좌중에서 점차 커지는 웅성거림을 들으며, 청 대인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점차 진해졌다.
오늘 그가 보여 준 활약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문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들은 대공자의 경지에 대한 무수한 의문과 억측을 낳으며 낙양 전역으로 퍼져 나가리라.
장담컨대, 오늘 저녁 시간이면 낙양 어느 식당이나 주점을 방문하든지, 낙양검가의 대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 * *
낙양, 이씨 가문이 소유한 사업체의 본사 전각.
“아직도 고민을 하시는 중입니까?”
상관난화가 상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화려하지만, 무게감있는 외출복에, 평소보다 화장을 한결 진하게하여 성숙한 자태를 보였다.
"......."
그 미소는 고혹적이었지만, 상대에게는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제가 볼 땐 그리 고민할만한 문제가 아닌 듯한데요.”
이씨 가문이 소유한 사업체, 영와상단(永瓦商團)의 총책임자가 땀을 줄줄 흘리며 답했다.
“…사업체를 전부 넘기라니. 이 씨 가문의 본가가 무너졌다지만, 대공자께서 너무 과한 처사를 하시는 것이 아니오?”
“전부 넘기다니. 누가 들으면 강탈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요. 대공자님께서는 충분한 가격을 치르실 것이랍니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오! 우리 영와상단은 현재 매년 성장하며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고 있소. 그런 상단을 매각하라는 것 자체가 폭거나 마찬가지가 아니오?!”
“그런가요?”
상관난화가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영와상단이 차지하고 있던 강남까지의 유통로를 비롯한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선심을 써서 조언해 주듯이 말했다.
“이제 곧 이씨 가문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경쟁 업체들이 누구랄 것 없이 달려들기 시작하겠지요. 그들은 이 영와상단을 뼛조각 하나 남기지않고 먹어치워 버릴 겁니다. 무운(武運)이라도 빌어 드리죠.”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그녀에게는 조금의 미련도 없어 보였다.
“자, 잠깐…!”
결국, 그녀를 붙잡은 것은 영와상단의 총책임자 쪽이었다.
“잠깐만 시간을 더 주시오!”
상관난화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어 보인 뒤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당겨 정자세로 앉지 않고, 모로 삐뚜름히 앉은 것이, 자신은 언제라도 자리를 뜰 수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크윽!”
상단의 총책임자가 땀을 비오듯 쏟으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거래 자리에서 자신의 기분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다니.
그로서도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 자신이 이런 모습을 보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최악중에서도 최악이라, 표정을 감추어 심리를 보여 주지 않는다고, 뭐가 유리해질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절벽 끝에 간신히 매달린 상황이었으니.
“…내가 이 상단의 총책임자이지만, 이 상단의 매각은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것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의 말에 상관난화가 미소를 지으며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어 들었다.
그 서류는 암호 쪽지가 가리키던 좌표에서, 시녀장 정아에게 건네받은 서류였다.
“이씨 가문의 가주께서는 이미 매각에 동의하셨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직접 보시지요.”
총책임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류를 받아 들었다.
“……?!"
그 서류에는 이씨 가문의 가주직인이 찍혀 있었고 함께, 이씨 가주의 지장(指章)까지도 선명했다.
“그, 그런데 이 지장은…?”
그 지장은 붉기로는 인주와 매한가지였지만, 검붉은 기가 도는 것이,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인주가 마른색과는 달랐다.
게다가 그 지장에서 풍겨오는 희미한 비린내라니.
"설마…."
그가 떨리는 시선을 들어 상관난화를 바라보았다.
“어머…!”
그녀가 지장을 잠시 확인하더니,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씨 가문의 가주께서 엄청 급하셨던 모양이시네요. 자신의 피로 지장을 찍으시다니.”
총 책임자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가주의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추측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
먹히지 않으려면, 먼저 먹어 치워야 한다.
과거 아미파에게 일원들과 가족들의 목숨까지도 빼앗길 뻔했던 상관난화는 이제, 적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