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편 마지막 주춧돌 하나까지
'이씨 가문의 가주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연소현의 지시는 명확했다.
'그자는 항복하고 협력하는 그 순간에도 뒤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잔당을 규합하여 반격의 칼날을 갈것이다.'
연소현의 의지는 명료했다.
'그렇기에 머리를 끊어, 적들의 구심점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다음은.
'지휘 체계가 무너진 이씨 가문의 현직 관료들은 각자도생을 노리거나 혹은 복수를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할것이다.'
거기서 연소현은 다음 패를 선보인다.
'공씨 가문을 투입해 놈들이 판을 벌이기도 전에 완전히 뭉개 버린다.'
* * *
낙양 지방 고등재판소.
이씨 판관이 자신의 판관실에서 정신없이 서성이고 있었다.
“어허… 이를 어쩐다.”
그는 조금 전부터 판관복을 벗으려다 말고, 다시 의관을 고쳤다가, 또 벗으려다 말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판관복을 입고 판관실을 지키는 편이 가문에 유리한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러 처가나 외가로 향해야 하는 것인가….'
헐렁한 판관복 안에 입은 옷들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도대체 왜 아무에게도 지시 사항이 오지를 않는 것인가? 가주님은? 가문의 원로들은? 설마 누구도 본가를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가문에서 지시가 없다면, 더 이상 헤매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마음을 고쳐먹은 그가 머리에 쓰고 있던 판관모를 벗었다.
당장 움직여 뭐라도 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때 판관실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랐던 이씨 판관이 들어온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니, 공 판관이 아니신가.”
그는 이마에 흘러내렸던 땀을 소매로 훔치고는 벌컥 화를 냈다.
“아니! 아무리 자네라도 그렇지, 동료 판관의 판관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다니! 대체 예의는 어쩌고...?!”
성질을 내던 그의 입이 다물렸다.
항상 온화하던 공씨 판관의 표정은 딱딱하다 못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무, 무슨 일이 있소?”
그의 질문에 공씨 판관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우리 가문까지 같이 가 주셔야겠소.”
공씨 판관의 뒤로 그가 휘하에 거느린 수사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무장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씨 판관은 당장 손에 들고 있던 판관모를 머리에 썼다.
“나는 현직 판관이오!”
그러고는 재판장에서처럼 짐짓 위엄 넘치는 태도로 소리쳤다.
“그런 본관을 임의로 데려가려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현직 판관을 임의로 납치 구금하는 것은 황도의 감찰관들이 파견될 정도로 큰 범죄라는 것은 알고 있으시겠지?!”
“물론 나도 판관이니 잘 알고 있소.”
공씨 가문의 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가 청씨 가문의 판관이었다면,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청씨가 아닌 공씨였다.
그리고 이 건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가문의 의지였다.
“하지만 그대는 이제 판관이 아니니 상관없다오.”
상대가 판관이라 건드리기가 어렵다면, 판관이 아니게 만들면 될 것이 아닌가.
“그, 그게 무슨 소리요?!”
그가 급히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고, 고등재판소의 판관은, 모든 법적 절차를 거치기 전까지는 판관직 박탈이란 처분이 불가능한-!”
그의 목소리는 수사관의 손에서 날아온 지풍에 의해서 끊겼다.
“모셔라.”
혈도가 짚여 순간적으로 몸이 마비된 그를 달려든 수사관들이 재갈을 물리고 포박했다.
그의 몸에서 판관복을 찢어 내다시피 벗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식간에 포박된 그는 다른 이들이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두건이 씌워져 끌려 나갔다.
그가 무슨 짐짝처럼 끌려 나간 이후, 공씨 가문의 판관은 텅 빈 판관실을 바라보았다.
“…공 판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예, 소장님.”
낙양 지방 고등재판소의 재판소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공씨 가문에서 하도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눈을 감아 주지만, 두 번은 어렵네. 그 점을 반드시-.”
“소장님.”
그의 말은 공씨 가문의 판관에 의해 끊어졌다.
“오늘 여기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 그렇지. 이 고등재판소는 오늘도 평소와 같았지. 아무렴.”
공씨 판관이 문에 붙어 있던 이 씨 판관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떼 버리며 말했다.
“이씨 판관은, 중대한 개인 비위가 드러나자, 오늘 오전에 스스로 사직서를 쓰고 잠적한겁니다.”
그것은 평소였다면, 일개 판관이 감히 재판소장에게 할 수 없는 행동이요, 말투였다.
“그, 그렇지.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그는 지금 일개 판관이 아니라, 황도십육가문인 공씨 가문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였다.
“그럼. 저도 오늘 직무가 많이 밀려 있어, 무례를 감수하고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평소의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재판소장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몸을 돌린 그를 향해, 재판소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고, 공 판관!”
"예, 소장님. 부르셨습니까.”
재판소장이 주변을 다시 한번 살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듣기로는, 북망산의 전대 가주님들은 십육가문 본가와는 그 뜻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어찌된 일인가?”
지방 고등재판소의 소장 정도 되는 인물이었으니, 어제 이공자 측의 방문을 받았던 그였다.
이공자 측의 방문객은 분명,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은 현 가주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면서 낙양검가와 십육가문내의 정쟁에 감히 끼어들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못을 박았었다.
하지만 오늘 공씨 성을 쓰는 판사는 분명 북망산 전대 가주 개인이 아니라, 공씨 가문 전체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가지만 알려 드리지요.”
공씨 판관이 재판소장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공씨 가문의 가주는 황도가 아니라, 북망산에 계신 분입니다.”
“......!"
재판소장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 그 말은...?!”
공씨 판관이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에 대 보였다.
"......."
재판소장이 입을 다물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들은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공씨 판관이 친절한 어조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현재. 오늘자 출결부(出缺簿)는 새로 작성되고 있을 것이고, 이씨 판관이 출석한 것을 보았던 이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출근 시간에 입구를 지키던 재판소 병력부터, 이씨 판관을 보좌하던 이들을 넘어, 이씨 판관과 오늘 잡담을 나누었던 동료 판관들까지도.
모두.
지금 공씨 가문의 일원들에 의해서 침묵 서약을 하고 있었다.
재판소장과 마찬가지로.
“…가, 가주께 부디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 드리게.”
재판소장의 말에 공씨 가문의 판사가 빙긋 웃어 보이고, 몸을돌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 * *
그리고 고등재판소뿐만이 아니라, 낙양 전역에서 비슷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이거 놔라! 내가 누군지-!”
복부를 강타당한 이씨 가문의 현직 관료가 눈을 뒤집고 쓰러지자, 그를 묶어서 자루에 넣어 버리고는 숨구멍이 뚫린 뒤주에 넣었다.
“제발! 누군지는 몰라도, 목숨만은 제발…!”
처가에 도움을 구하러 가던 이는 순순히 항복해, 재갈을 물고 머리에는 두건이 씌워져 마차에 태워졌다.
“자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게 끌려 나가며, 절규하듯 외치는 이도 있었다.
믿었던 친우에게 배반당한 것이다.
“미안하군. 자네도 내가 공씨 대서원 출신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 않나?”
“고, 공씨 대서원?! 공씨 가문이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연소현이 드러낸 패를 확인한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빠져나갈 구멍은 애초에 없었음을 깨달았다.
현직에 있던 이씨 가문의 관료들을 납치 후 운송하는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북망산의 공씨 가문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북망산, 공씨 가문 저택.
“방금, 낙양 지방 고등재판소에서의 작전이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낙양 이(二) 선착장에서의 작전이 완료되었습니다.”
“망양대로에서의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 중….”
“황씨 가문에 숨어 있던 이는 황씨 가문의 협조를 얻어….”
모든 최종 보고는 한 사람에게 들어오고 있었다.
“좋군 아주 좋아.”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노인이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서는 전대 가주라고 알고있는, 공씨 가문의 가주 공량이었다.
“모두 들어라.”
그가 가느다란 손을들어 보였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너희는 낙양의 모두에게 알게해야 할 것이다.”
와병 중인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기백이 좌중을 압도했다.
“이 공씨 가문이 어떤 가문이고, 이 공량이 어떤 인물인지.”
공씨 가문의 일원들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아무리 현직 관료들이라 할지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음을….”
공량이 이를 드러냈다.
“그 공포를 똑똑히 새겨 넣어야 할 것이다.”
그는 중원국 개혁파의 수장이지만, 정도(正道)만을 고집하는 청백리(淸白吏)와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단순한 청백리 따위가 황제의 곁을 그 오랜 세월 지킬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대의를 따르기에, 권력만을 탐하는 다른 북망산 노마들과는 그 목적이 다를 뿐.
그 또한 분명, 한 명의 노마가 틀림없었다.
그것도 그 오랜 세월을 참고 또 인내하며 칼을 갈았던.
그 타락한 황도의 정치판에서, 소수에 불과한 개혁파의 수장으로 균형을 유지해 왔을 정도로.
가장 흉포한 노마.
“대공자 연소현의 뒤에 우리 공씨 가문이 있다는 것을 이제 모두가 똑똑히 알게 될 것이야.”
* * *
이씨 가문 본가.
[여기 말씀하셨던, 이씨 가문의 서류들입니다]
수사관 하나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서 다가와 근접 전음으로 보고했다.
그에게서 서류들을 건네받은 수석 수사관이 서류를 확인하며 마찬가지로 근접전음으로 답했다.
[이 서류들은 애초에 발견된 적이 없었던 걸세. 알겠나?]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수거했고, 증거품 목록에는 올리지도 않았습니다.]
[좋아. 원래 임무로 돌아가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수석 수사관이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그 수사관이 가져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밀명(密命)을 내렸던 이에게 보고해야 했다.
[가주님.]
청씨 성을 쓰는 수석 수사관이 자신의 가주에게 접근해, 허름한 보자기에 싸인 서류들을 넘겼다.
“이것이 전부인가?”
[예. 사실상 지금 시점까지 모을수 있는 최대입니다]
청씨 가문의 가주, 청 대인이 보자기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낙양을 비롯해 중원국 곳곳의 땅문서들, 건물들의 소유권과 관련된 서류들, 이씨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채권들, 어음들, 각종 증서들, 고액의 전표 다발들, 등등.
이씨 가문의 재산과 직접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잘했네. 마지막까지 자네가 직접 현장을 관리하게.”
[예, 가주님]
청 대인은 판관들과 함께, 각종 장부들을 검토하고있던 연소현에게 다가갔다.
“대공자.”
“청 대인.”
연소현이 그의 손에 들린 보따리를 확인하고는 판관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돌아섰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차단된 곳에 두 사람이 도착하자, 청 대인은 즉시 그 보따리를 연소현에게 넘겨주었다.
“대공자의 요청대로, 각종 금화나 보물 따위의 부피가 큰 것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를 담았소.”
보따리를 넘겨받은 연소현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린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 공명정대하고 청렴한 청씨 가문의 가주님이, 국고로 환수되어야 할 재산을 빼돌리시다니요.”
청 대인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대공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인지 본인은 전혀 모르겠소 이 씨 가문의 재산은 전부 이씨 가문의 가주가 들고 잠적한 것이라고, 이미 수사 결과가 나왔다오.”
그 말에 연소현이 웃었다.
“벌써 수사 결과가 나오다니, 역시 청씨 가문의 판관들은 유능하기가 낙양 제일입니다.”
그 농에 청 대인 또한 웃었다.
“우리 가문이 이 방면에서는 중원국에서 최고라오.”
원래 몇 날 며칠이 걸려야 할 수사 결과가 벌써 나왔을리가 없다.
이미 그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청 대인이 알려 준 것뿐.
그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괜히 저 멀리에 시선을 돌렸다.
명판관 청효.
맹세컨대 그의 인생에서 이런 일은 사실 처음이었다.
“…이 재산들을 압수해 봐야, 이씨 가문놈들과 똑같은 놈들에게 또 넘어가 사용될것이 뻔하오.”
그럴 바에야 연소현에게 넘기는것이 맞았다.
“부디 대공자께서, 의미 있는 곳에 써 주시오.”
연소현이 보따리를 흔들어 보였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청 대인.”
그러면서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이제 이씨 가문 놈들의 마지막 주춧돌 하나까지 뽑아버릴 시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