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84화 (184/350)

제9편 패(牌)를 확인하는 순간

이씨 가문에 대한 강제 집행이 이루어지고 있던 그 시각.

청씨 가문 소속의 판관을 모시는 수사관이 조용히 어느 관청 근처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아직 대상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관청 내부에 섞여 들어간 수하로부터 전음으로 보고가 들어왔다.

[다음 인원 투입. 육안 감시를 교대하도록.]

관직에서 은퇴한 이씨 가문의 원로들이 있는 본가 쪽이야, 자기 방어권을 행사해 무력으로 저항을 할것이 뻔하니 집행 방해를 적용해서 때려잡고 있으리라.

하지만 낮이라 직무에 임하고 있던, 현직 이씨 가문의 일원들은 그 경우가 달랐다.

[대상이 이씨 가문의 하인과 접촉했습니다. 도청 결과, 대상이 이 씨 가문의 상황을 전해 들은 것 같습니다]

[대상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급히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후문 방향으로 이동 중.]

대상은 다른 범죄자 놈들과 마찬가지로 시선을 피해서 슬그머니 뒷문으로 나왔다.

이미 후문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수사관이 수하들과 은밀히 그 뒤를 미행했다.

[이대로 계속 추적만 합니까?]

[당연하지. 상대는 현직 관료다. 명백한 물증없이 체포할 수는 없어. 우리는 애초에 명받은 대로 대상의 위치만 파악해서 보고만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쫓고 있는 대상은 하나였지만, 현직 관료인 이씨 가문의 일원들은 많았다(잔챙이에 불과한 하급 관리들을 제외하고도).

그렇기에 그들 말고도, 다른 조(組)들 또한 각각 지정된 대상들을 실시간으로 추적 중이었다.

* * *

이씨 가문의 가주는 정체불명의 폭음(정문이 파괴되던 소리)을 들었던 그 순간 도주를 결심했다.

연소현이 직접 찾아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가주만이 알고 있는 지하 비밀 통로로 빠져 나가던 중이었다.

'대공자 그놈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뭘 어떻게 하든 공격할 방법을 제대로 준비했다는 뜻이 틀림없지.’

유력 가문의 수장답게 뛰어난 순발력과 판단력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우리 이씨 가문을 공격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지?’

청학동의 구장이던 가문의 일원이, 호두 마을의 이주를 방해하다 곤장을 맞고 실려 온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우리 이씨 가문을 딱 집어서? 놈에게는 예지력이라도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너무도 신속하고 정확한 연소현의 움직임에 어이가 없어 박박 이를 갈았다.

'마귀 같은 놈…!'

그는 비밀 통로에 펼쳐진 진법을 통과하자마자, 돌아보지도 않고 뒤를 향해 명했다.

“둘은 남아 이곳을 지켜라.”

“예, 가주님.”

그의 뒤를 따르던 가문의 무인중 두 명이 즉시 일행에서 따로 떨어져 남았다.

지금 그를 따르고 있는 이들은 이씨 가문에서도 가장 충성스러운 무인들이었다.

두 명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자리를 사수하리라.

미로 같은 통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며, 이씨 가문의 가주가 자신의 품을 더듬어 확인했다.

'다행히 비상시를 대비해 숨겨두던, 비밀 장부는 챙겼다.'

비밀 장부에는 밖으로, 그중에서도 특히 사법부가 입수해서는 안될 기록들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장부를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가문의 본가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뒷거래 상대들이 전부 기록된 장부는 그의 생명줄이나 다름 없었다.

'이걸로 내 목숨 하나는 건질 수 있겠지.’

비밀 통로의 끝에 도달하자, 위로 향하는 사다리가 보였다.

낙양 구시가지 내의 어느 건물로 연결된 사다리였다.

인적 없는 골목에 위치한 건물은 창고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이렇게 이씨 가문의 비상 탈출로였다.

“먼저 올라가서 건물 내부를 확인해라.”

무인 하나가 거침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녀는 위장되어 있던 출구를 열고 건물로 진입했다.

이 층 높이의 넓은 창고였다.

그녀는 내부를 살피고는 아래를 향해 보고했다.

"내부 이상 없습니다.”

누군가가 침입했다면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도록 설치되어 있던 모든 장치를 확인한 뒤의 보고였다.

“좋아. 둘이 더 올라가서 외부 상황을 확인해라.”

마지막까지 철저한 그의 명에, 두 명의 무인이 추가로 올라가 숨겨진 창으로 외부를 살피고 아래에 보고했다.

"외부 이상 없습니다.”

그때야 이씨 가문의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선행한다.”

후방을 경계하는 무인들을 뒤로하고 가주가 사다리를 올랐다.

손이 닿을 정도로 올라온 그의 손을 붙잡아 무인이 단숨에 그를 위로 끌어 올리는 사이, 건물 내부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무인들이 기민하게 움직여 출구를 확보했다.

“시간이 촉박하다. 어서 가자.”

옷의 먼지를 털며 가주가 움직이자, 출구를 확보하고 있던 무인들이 먼저 인적없는 뒷골목으로 나갔다.

밑에서 후방을 경계하던 이들이 기민하게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가주가 복잡하게 얽힌 뒷 골목으로 나섰던 그 순간.

선행하여 모퉁이를 확보하려던 무인들이 일제히 벽에 꽂혔다.

“……?!”

무인들의 머리와 몸통을 꿰뚫은것은 철시(鐵矢)들이었다.

저 멀리 옥상에서 발사된 철시들이 그들을 즉사시킨 것도 모자라 그대로 벽면에 고정해 버린 것이었다.

"적의 습격이-!”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파공성과 함께 연속적으로 날아든 철시들이 가주를 피해 무인들을 노렸다.

“큿!”

그들은 유력 가문의 정예답게,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칼을 뽑아 철시를 튕겨내기 시작했다.

“연노(連弩) 사격이다!”

“가주님을 보호하라!”

몇몇 인원들이 이미 가주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던 인간 벽에 합류했다.

“먼저 가주님을 통로로 대피…!”

누군가가 외치던 와중에 후방의 창들이 일제히 부서지며 사천당가의 암기들이 쏟아졌다.

“크억…!”

“후방에서 암기다!”

급히 후방을 경계했지만, 이미 몇몇은 암기에 맞고 쓰러졌고, 다수가 부상을 당한 후였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귀에 거슬리는 사슬 소리가 한차례 울려 퍼지더니 창고 지붕이 박살 났고, 한 인영이 떨어져 소리도 없이 착지했다.

그의 손에는 쌍겸이 들려 있었고, 가주에게서 떨어져 있던 이들의 머리들이 피를 흩날리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대응할 방법조차 없는 완벽한 기습이 었다.

“고, 고수…!”

한 차례 더 사슬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정면에서의 공격이라, 대부분이 머리를 수확당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끄르륵….”

하지만 이미 철시와 암기에 부상을 입어 반응이 굼뜨던 무인들의 몸통은 그 머리를 잃고 쓰러졌다.

"......!"

삭막한 인상의 중년인, 차마고도의 수급 수집가, 당백의 손에 들린 쌍겸에서 적들의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는 비밀 통로로 향하는 바닥에 뚫린 출입구를 막고 선 채로, 아무 말도 없이 적들을 주시했다.

"......."

어느새 모든 공격이 그쳤고, 남은것은 몸으로 가주를 둘러싸 보호하고 있던 무인들뿐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가주가 물었다.

“…대공자의 수하들이냐?”

그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복잡한 골목마다 숨어있던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앞선 것은 검을 들고 있는 놀라운 미모의 여인이었다.

가주가 탄식하듯이 말했다.

“도대체 대공자는 어떻게 이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지…?”

특이하게도 그녀의 눈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주는 몰랐지만, 용안이라 불리는 그녀의 눈앞에서는 그 어떤 비밀 통로 따위도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 * *

그 시각, 이씨 가문 본가.

또한명.

용케 숨어 있던 원로가 끌려 나와 정원에 던져졌다.

그가 품고 있던 중요한 서류들과 챙겼던 금은보화는 이미 압수당한 뒤였다.

"......."

원로는 봉두난발이 된 머리를 들었다.

그는 주변의 다른 원로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날은 훈훈했고, 하늘은 지독하게도 푸르렀다.

노인들의 피멍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이 하는 생각은 똑같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 * *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되어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몇 남지 않은 무인들 사이에서 이씨 가문의 가주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처음부터 도망칠 장소도 방법도 없었다.

'대공자가 패를 드러내, 내가 그놈의 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그 순간….'

그 순간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난것과 마찬가지였다.

허탈한 표정의 그가 천천히 두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보였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쳐라!”

미리 이런 상황을 훈련했던 정예 무인들의 신형이, 명이 끝나기도 전에 발사되듯 폭발적인 속도를 냈다.

당백 쪽으로 삼인.

시녀장 정아에게 일인.

그리고 자신은 남은 마지막 무인에게 들리다시피 하여 비밀 통로의 입구로 몸을 날렸다.

서늘한 여인의 코웃음 소리와 함께, 정아에게 기습을 걸었던 무인이 그대로 두 토막이 났다.

완벽한 후발선제(後發先制).

낙양검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반격기.

완성된 섬영찰나(閃影刹那)를 한낱 이씨 가문의 무인이 막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당백 쪽도 사정은 같았지만, 그는 코웃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한 무인들은 채 한합조차 버텨 내지 못하고 모두 시체가되어 나뒹굴었다.

최후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크윽!”

함께 몸을 날리던 마지막 무인이 머리를 잃고 쓰러지자, 이끌리던 관성에 가주의 몸이 몇 차례 바닥에 튕겼다.

유력 가문의 가주답지않게, 볼썽사나운 모양새가 되어 버린 노인이었다.

“...이것 참.”

그는 한차례 기침 섞인 혼잣말을 내뱉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제 남은 방법이 없군.”

항복이었다.

“내가 졌네. 대공자께 안내해 주게.”

그가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인, 시녀장 정아에게 최대한 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한 어떤 증언이든 하겠네. 내 모든 협조를 아끼지-.”

가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가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꽂힌 검을 쥐었다.

“크르르륵….”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입에서는 피거품이 치솟을 뿐이었다.

노인의 볼품없는 몸에서 마지막 힘이 빠지고, 검을 축으로 삼아 늘어졌다.

시신의 무게를 받아 내는 정아의 검은 미동조차 없었다.

억울하다는 듯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숨이 끊어진 시신에서 눈을 떼지 않던 정아가 검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세상 무엇보다도 조심스럽게 넘어지는 시신을 안아 들었다.

마치 정인의 시신을 안는 듯했다.

"......."

시신의 품속에는 그녀의 주인이 원하는 귀한 물건들이 있었다.

혹시나 물건들이 손상될까, 품을 뒤지는 그녀의 손은 조심스럽지만 정확하게 움직였다.

뒤로 젖혀진 시신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씨 가문의 가주직인 그리고 비밀 장부의 회수 완료.”

목적한 물건을 회수한 그녀가 손을 놓자, 시신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녀의 뒤에 대기하던 현월각의 요원들이 움직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서부턴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들은 각각의 전문 분야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시신들을 옮기거나, 흔적을 망가뜨리고, 암기들을 회수하고, 비밀 통로를 막는 등의 작업이었다.

멀리 옥상에서 하녀단의 하녀들이 연노들을 짊어지고 철수하는 모습이 정아의 시선에 보였다.

장갑마차에서 분리해서 설치했던 연노들이 었다.

거기까지 확인을 마친 그녀는 물 을 품에 넣고 창고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백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 * *

이씨 가문의 현직 관료를 미행하던 조사관에게 누군가가 접근했다.

[.......]

근접 전음으로 용건을 전달한 이가 인파 속에 몸을 감추자, 조사관이 수하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임무 완료. 이제 우리는 철수한다.]

그들뿐 아니라, 낙양 전역에서 이씨 가문의 관료들을 추적하고 있던 모든 조가 철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여기서부터는 공씨 가문의 손에 맡긴다.]

이씨 가문의 잔당.

현직 관료들이 허튼수작을 부리기 전에 제압하기 위해서는 편법을 넘어서서, 불법적인 개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불법조차 합법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가문이 연소현에게 협력하고 있었다.

황도십육가문 중 일문으로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공씨 가문.

연소현의 다음 패가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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