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80화 (180/350)

제5편 오산(誤算)

“본 대공자와 함께 가시겠소?”

수란과 청호위가 눈을 마주치더니,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런 일에 빠질수는 없지요.”

낙양의 봄 소속으로, 지방 고위관료와 얼굴을 마주하는것은 필시 그들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었겠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것은 이공자의 주구(走狗)라는 구장을 연소현이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해서만이 아니었다.

혹시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자애원의 일에 도움이 될수 있다면, 얼마든지 돕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대답이었다.

심지어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르면서도.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기에 연소현은 단지 알겠다는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맙소.”

* * *

통로를 따라 지상으로 향하던 연소현이 문득 멈춰 섰다.

통로의 갈림길 부근이었다.

“…먼저들 우마차에서 대기해 주시길.”

정아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 수란과 청호위를 이끌고 통로를 계속 올랐다.

횃불을 들고 안내하던 무장 무녀마저 그들과 함께 움직였기에, 연소현만이 남겨진 통로는 곧 어둠속에 잠겼다.

지상으로부터 통로의 벽을 타고 반사된 햇빛만이 어스름하게 사위를 비추어, 출구 방향을 등지고 선 연소현의 인영(人影)을 간신히 구별할 정도였다.

연소현은 고개를 돌려, 더 깊은 지점으로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그 어둠에 몸서리를 쳤겠지만, 제암진천경의 연자인 연소현에게 어둠에 대한 공포따위는 없었다.

그의 눈이 어둠속 한 지점을 정확히 향했다.

“신녀(神女). 할 말이 남았는가?”

마치 어둠이 안개와 같아 그것을 헤쳐 나오듯, 신녀의 신형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벽면에 반사되고 또 반사되어 간신히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비춘 햇빛이 미약했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가장 부정한 자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수로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립니다. 피와 고름 냄새가 뒤섞인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이라도 불면 전부 흩어져 버릴 것처럼 미약했지만, 어째서인지 너무도 선명하게 연소현의 귓가에 꽂혔다.

“...가장 부정한 자들.”

연소현이 뇌까렸다.

과거 역사에서, 이맘때의 연소현이었다면 흘려들었을 이야기였다.

군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논하지 않기에.

천살성이란 운명이 가져다주는 공포에 잠식되었던 당시 연소현은 술이부작(述而不作), 있는 그대로만을 받아들이려 했을 뿐.

미신 따위는 그가 가장 멀리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연소현은 달랐다.

제암진천경.

그리고 그 연자인 암천존자.

스스로부터가 괴력난신이나 마찬 가지가 아니던가.

“마교(魔敎)가 벌써 움직임을 보인다고?”

천마신교(天魔神敎).

중원국의 역사상 가장 기이하고 위험한 사교(邪敎) 집단.

“명운(命運)은 뒤틀렸고, 그렇기에 운명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대답이라기에는 모호했지만, 마냥 짚이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는 말인가?”

신녀가 다시 답아닌 답을 했다.

“그들은 부정한 예언을 섬기고, 종말의 예언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 예언의 때가 도래했으니, 부정한 자들이 지금 움직이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

그녀의 입술이 빠르게 달싹였다.

“도시가 피와 절규로 넘쳐흐르는 날. 대지는 화염에 휩싸이고, 하늘에 붉은 달이 숨으리니, 땅에서 비롯된 천둥이 울려 퍼지고, 필멸의 존재들은 전후좌우조차 구별하지 못하면서, 죽고 죽이는 것에만 전념하게 되리니.”

그녀의 몸이 앞뒤로 흔들리고, 눈은 뒤집혀 흰자만이 희번덕였다.

마치 무언가가 그녀의 몸에 깃든 것처럼 보였다.

“그때 지저(地底)에서 기어 올라 온 가장 부정한 자들이 '달과 별조차 없이 가장 어두운 하늘에 존귀한 자'를 노릴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통로에 울려 퍼지고, 또 울려 퍼졌다.

“그게 끝인가?”

신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언제쯤 벌어질 일인가?”

“그리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그거 잘됐군.”

그가 몸을 돌려 위를 향했다.

“나도 그놈들에겐 용무가 있거든.”

뒤로 손을 흔들어 신녀를 일별한 연소현은 성큼성큼 통로를 걸어 올라갔다.

그의 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조금의 불안도 없었다.

햇빛이 백열하는 출구를 향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신녀가 자신도 모르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예언을 한 줄 읊었다.

“검 없는 검의 주인이 돌아와 우뚝 서게 되면, 별들이 제 위치를 되찾고, 모든 운명이 바르게 흐르리라.”

암의도편본이라 불리는 예언서에 기록된 문구였다.

* * *

낙양에서, 구장이라는 직위는 낙양지사 바로 아래 위치하여 각 구를 행정적으로 책임지는 고위직이었다.

그는 뾰족하게 가다듬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고갯짓으로 보좌들에게 명했다.

“치안대장은 무엇을 하느냐?! 당장 이 천것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

그 말을 들은 관병들의 책임자, 치안대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호령했다.

“명을 집행하라!”

백이넘는 관병들이 빈민들에게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

그들 또한 별 죄도 없는 빈민들과 괜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구장이 직접 나서서 지켜보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자 자! 다들 집으로 돌아들 가쇼!”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치도곤을 당할 것이오!”

그들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 빈민들을 밀어 대기 시작하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아이고! 나리들! 저희는 그저 자애원의 인도를 받아 다른 마을로 가는 것뿐입니다!”

“저희가 낙양 밖으로 나가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애원의 이주 담당자들이 빈민들에게 외쳤다.

“저항하지 마시고, 일단 집으로들 돌아가시오!”

“괜찮소! 관병들에게 저항하지 마시오!”

“자애원은 여러분과 계속 함께할 것이오!”

그 말에 다수의 빈민들은 돌아서서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모두가 설득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주 지원금을 받고! 직업도 약속받았단 말이다!”

“이제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 보려는 것인데,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는 것이오?!”

그들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꿈꾸고 있었던지라, 쉬이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죽기만을 기다리다 겨우 한 줄기 희망을 잡은 이들은, 잠시라도 그것을 놓는 것을 두려워했다.

“너희는 법도 없고, 도리도 없느냐?!”

이빨이 빠진 늙은 서생이 관병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어찌 황제 폐하의 죄없는 백성 들을 핍박하여….”

빠악,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늙은 서생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흙 바닥을 타고 흘렀다.

“아이고! 아버지!”

“영감!’‘

치안대장이 든 육모 방망이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퉷!”

그가 쓰러진 늙은 서생에게 침을 뱉고는 수하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고 있느냐?! 구장님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놈들은 전부 반란 종자들이다!”

“반란 종자들을 제압하라!”

“자비를 보이지 마라!”

생각 이상으로 거친 빈민들의 저항에 신경질이 났던 관병들이 누구랄 것 없이 육모 방망이를 뽑아 들었다.

“자애원의 전 인원은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어서!”

그 모습에 자애원 호두 마을 지부 책임자인 노의원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당장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

'총본산에 연락을 넣었으니, 금방이라도 대공자님께서 손을 써 주실터인데…!’

일이 터지자, 가장 먼저 자애원의 무장 병력부터 완전히 후퇴시켰던 그였다.

관과 무력 충돌은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었으니.

앞 열에서 저항하던 이들은 이미 흠씬 두들겨 맞는 중이었다.

“이 반란 종자 놈들!”

집으로 도망가는 이들과 그들을 쫓아 육모 방망이를 휘두르는 관병들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란이라니. 어찌 그런 터무니 없는 명분을…?!”

이공자 측에서 술수를 부릴것은 예측하고 있었지만, 구장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저 항의만 하는 백성들을, 설득 하나 없이, 터무니없는 명분으로 이렇게 잔혹하게 진압하는 광경은 그의 긴 인생에서도 처음겪는 일이었다.

“X발, 끌어내!”

“죽여 버려!”

가까운 판잣집 안으로 들어간 이들을 기어코 쫓아가 끌어내 두들겨 패는 관병들까지도 있었다.

“어이쿠!”

아이를 등에 업고 있던 늙은 여인이 짐의 무게에 못이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만에 하나라도 예상외의 일이 발생하면, 우선 본인의 안전부터 챙기도록.’

연소현의 당부는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노의원은 얼른 뛰어가 쓰러진 여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가, 감사합니다!”

노의원이 그녀에게 외쳤다.

“어서! 어서 도망을…!”

빡-,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의식이 멀어졌다.

* * *

"물을 부어라!”

오물이 섞인 찬물을 한 동이 뒤집어쓴 노의원이 정신을 차렸다.

정신은 차렸지만, 머리를 맞은탓에 어지럽고 시야가 흐릿했다.

“네놈이 이 '민란(民亂)'을 부추긴 주동자이더냐?”

구장 보좌의 질문에 노의원이 몸을 휘청였다.

관병들이 억센 손으로 무릎을 꿇고 포박당한 그를 바로 앉혔다.

“대역죄인은 묻는 말에 답하라!”

“대역죄인이라니….”

그의 좌우에는 그와 비슷하게 피투성이가 된 자애원의 인원들이 포박당해 있었다.

노의원은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답했다.

“이 늙은이는 그저 자애원에서 봉사를하는 의원일 뿐입니다….”

“이놈이…!”

치안대장의 육모 방망이가 노의원의 어깨를 내리쳤다.

"큭..!"

쇄골이 부서져, 시체처럼 쓰러지려는 그를 좌우에서 붙들었다.

“…자애원은 낙양검가의 대공자님의 자선 단체입니다.”

노의원이 흐릿한 시선을 들어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구장을 바라보았다.

“구장은 뒤 책임을 질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 이놈이 죄인 주제에 감히…!”

“멈춰 보게.”

이번에는 단숨에 머리를 박살 내버리려는 치안대장을 멈추게 한 것은 구장이었다.

그가 앞으로 걸어 나와 노의원의 앞에 섰다.

“내 자비를 베풀어,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려주지.”

구장이 허리를 슬쩍 숙여 노의원에게 말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이 청학구의 백성들에 대한 통제 권한을 나에게 위임하셨지.”

그의 옆에서 보좌들이 거들었다.

“구장께서는 분명 이주를 멈추라고 명을 하셨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불법적인 이주를 멈추지 않았습니다요!”

노의원이 이를 갈았다.

“불법적 이주라니! 언제부터 낙양 내에서 거주지 이동이 불법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 말에 구장이 이죽거렸다.

“네놈들 사이에 반란 종자들이 끼어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내 권한이 허락하는 대로 적법하게 이주를 중단시킨 것이지. 범죄자들이 섞인 무리의 이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내 권한이다.”

보좌들이 함께 이죽거렸다.

“하지만 이들은 통보를 무시했지요.”

“법 무서운 줄 모르는 아주 멍청한 자들입니다요.”

다른 자애원의 인원이 발작처럼 외쳤다.

“통보라니…! 우린 그런 통보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보좌 하나가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분명 우리는 이 서류를 보여주고 협조를 요청했지만, 너희가 무시한 것이다.”

“거짓…!”

그가 육모 방망이를 맞고 쓰러졌다.

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 사건이 위중한 것 같아 직접 관병들을 이끌고 오길 잘했군.”

보좌들이 동의했다.

“실제로 이렇게 민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요.”

“구장님께서 손수 그 주동자를 체포하셨으니, 훌륭한 공을 세우셨습니다요!”

그들은 다 같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한바탕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들을 보며, 노의원이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대공자께서 그대들을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것이오!”

그 말에 구장이 느긋한 모습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그 대공자가 낙양 중앙 관청에 항의를 넣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이상 뭘 어쩔텐가?”

그가 얼굴에 히죽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사건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법적인 절차는 무기한으로 늘어날 것이고, 결국 흐지부지 끝날 것이야. 그리고 그사이에 이 호두 마을에서의 사업은 넉넉하게 지연되겠지.”

“......!"

애초에 그가 노린 것은 호두 마을의 사업을 지연시키는 것.

그것은 낙양검가의 이공자를 위한 충분한 충성의 증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공자가 그의 뒤에서 버티는 한 낙양검가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공자를 직접 건드린 것도 아니다.

그의 권한을 벗어난 일을 벌인 것도 아니다.

북망산의 노마들이 움직인다고 해도, 그들이 가문 전체를 등에 업은 것은 아니라고, 이공자 측에서 못을 박아 주었다.

조작된 명분을 가지고 법정 다툼을 벌이는 사이, 그는 이미 이공자의 은혜를 입어 강남의 어딘가로 영전하고도 남을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전한 계획이지.’

그의 머릿속에 어젯밤 찾아왔던 이공자 측의 경고가 떠올랐다.

'절대 대공자를 얕보지 마시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계획에서부터 집행까지.

구멍은 없었다.

그때, 외곽에서 경계하던 관병이 외쳤다.

“소, 아니, 짐승이 끄는 마차가 접근 중!”

그가 깃발을 보고 이어서 외쳤다.

“낙양검가의 대공자입니다!”

거대한 영물들이 이끄는 우마차가 관병들을 무시하고 들이닥쳤다.

“저, 정지!”

“으아아!”

앞을 막으려던 관병들이 기겁하여 좌우로 몸을 날려 피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구장의 나직한 외침에 그의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간신히 체통을 지킬 수 있었다.

구장은 아랫배에 힘을 딱 주고, 강철의 우마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할 수 있는한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끼이익-!

제동장치가 걸리고, 우마차가 그 육중한 차체를 옆으로 틀며 정차했다.

바닥에 바퀴들로 인해 길고 깊은 홈이 파이고, 진동과 먼지가 구장과 일행들을 덮쳤지만, 그들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몇 발자국 앞에 정차한 우마차를 보며 구장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일단 선제 기 싸움에선 내가 이겼다!’

벌컥, 하고 열리는 문을 항해 그가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거, 대공자께 안 좋은 소식을 전해 드려야 해서, 본관의 마음이 좋지 않음을….”

말을 하던 그는 순간 하늘이 보이고, 땅이 회전하는 것을 느꼈다.

'응?'

눈앞에 튀어나온 피와 이빨들이 비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마차에서 튀어나온 연소현이 휘두른 주먹이 그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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