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78화 (178/350)

제3편 신(新) 자애원

소녀와 덩치, 낙양의 봄 소속의 두 사람이 정아와 함께 내려온 지하 통로는, 가장 낮은 전당으로 바로 통하던 통로와는 또 다른 통로였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안내를 돕겠습니다.”

두 명의 무장한 무녀들이 정아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제 주인이신 대공자님이 계신 곳까지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두 무장 무녀가 합장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앞장서 걷기 시작하자, 정아는 그들을 뒤따르며 수란과 청호위에게 말했다.

“이곳은 자애원의 총본산. 자애원의 소속이 아닌 이상, 초대받은 손님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안내원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영역입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폐를 끼칠 일은 없을 거예요.”

애초에 사고를 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약속은 시원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들의 시선은 무장 무녀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애원 무장 무녀들의 장비 수준이 언제부터 저렇게 높아졌지? 거의 검가의 무사들과 같을 정도의 상등품이잖아?]

[그뿐만이 아니야. 경지 또한 높아진 것 같다. 내가 마지막에 무장 무녀들을 만났을 때는 저 정도 경지가 아니었어]

[이 변화 또한 칩거를 끝낸 대공자로 인한 것일까.]

[...그거밖에 답은 없겠지」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이곳이 총본산의 주(主) 통로입니다.”

낙양 거리의 대로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넓은 통로는 수많은 인원들과 그들이 끄는 손수레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저것들은…?”

인원들을 넘어,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통로의 한쪽에 쌓여 있는 커다란 상자들이었다.

통로의 한쪽 면을 따라서 높이 쌓인 상자들이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통로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양으로도, 그 액수로도, 엄청날 정도로 많은 양의 물자였다.

인부들은 그 상자들을 손수레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보급 물자들입니다. 여기로부터 각 자애원 지부로 이동하게 되어 있지요.”

무장 무녀들은 연소현의 명에 따라, 원래라면 외부인에게 알려 주지 않았을 설명까지도 상세히 해주었다.

“모두 지도자이신 대공자님의 은혜로, 검가가 직간접적으로 운영하는 대농장과 공장들에서 생산되는 물자를 원가에 가깝게 매입한 것들입니다.”

정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제 주인이신 대공자께선 앞으로 이 물자들의 생산을 자애원이 직접 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계십니다.”

“벌써 생산에 들어간 물품들도 있습니다. 간단한 의복 따위가 대표적인데, 빈민들에게 각자 집에서 길쌈을 하여 보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지요.”

"......."

수란과 청호위는 쉬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청호위보다 먼저 빈민가에서 해결사 노릇을 해 오던 수란의 충격은 더 컸다.

그녀가 알던 자애원은 약 선녀의 명성과 그 신앙에 의존해, 대공자 등의 기부금으로 간신히 돌아가던 조직이었다.

각 지부는 총본산에서 예산을 배분받으면, 그 적은 예산으로 어떻게든 지부장들이 요령을 발휘하여 간신히 유지가 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가 아는 자애원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 통로는 수로가 아닙니까?”

청호위가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대로처럼 넓은 통로의 가운데에는 통로를 따라 긴 틈이 있었고, 그 틈을 통해 아래쪽 수로를 따라 흐르는 거친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맞습니다.”

청호위가 대답한 무장 무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여름철에 큰비가 내리거나 해서, 물이 차오르면 이곳 또한 잠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무장 무녀가 미소 지었다.

“얼마 전 저희 자애원은 지도자님이신 대공자님의 인도에 따라, 수로의 유량을 우회시켜 통제할 수 있는 기관장치를 확보했으니까요.”

“그건…?!”

낙양의 지하대수로는 단순한 상 하수도 역할을 넘어, 인공 호수와 대운하의 수심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시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하대수로의 통제 시설들은 전부 관에서 지나칠 정도로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 지하대수로의 기관장치를 확보하다니.

“저희가 확보한 기관장치는 과거 왕조가 비상시를 대비하여 비밀리에 만들어 둔 예비 장치로, 관에서 통제하는 것들과는 달리, 이 지역 일부만을 통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덕분에 총본산의 수로들을 걱정 없이 공간으로 활용할수 있게 되었지요.”

아무리 일부만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대공자는 관에서도 찾지 못하던 예비 기관장치를 어떻게, 무슨 수로, 손에 넣었단 말인가.

도대체 대공자는 그저 구휼을 위한 자선 단체이던 자애원을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낙양의 봄 소속, 두 사람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자, 잠시!”

수란이 외쳤다.

“낙양의 지하대수로는 오흉보다도 위험한 지역이에요! 이렇게 영역을 넓혀 나가다가는…!”

무장 무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하대수로는 낙양의 모든 '어둠'이 고여 드는 곳. 원래라면 그 어둠과 충돌은 불가피했겠지요. 하지만….”

다른 무장 무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가 근처 수로의 통제권을 쥐고 있으니까요.”

“외부에서 총본산으로 연결된 수로들은 전부 막힌것과 다름없습니다.”

“아…!”

무장 무녀가 앞을 가리켰다.

“자, 가시죠. 그분께서는 저 앞쪽에서 업무를 보고 계시는 중입니다.”

* * *

지하대수로의 자애원 총본산 영역, 대형 공간 중 하나.

무장 무녀의 안내에 따라 정아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수란과 청호위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춰섰다.

"......!"

조명을 제한해,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조성된 넓은 공간에는, 아이들이 오와 열을 맞춰 앉아 연공(練功)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백이 넘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누 도 소란을 피우거나, 떠드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고요함의 가운데에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가 있었다.

“기를 느끼는 것에만 집중하거라! 본디 운기토납(運氣吐納)의 기원은 대자연에 인간 존재를 일치시키기 위한 것으로, 그저 내공을 쌓기 위함이 아니었다.”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은, 대공자 연소현이었다.

“단지 주변에 흐르는 기를 느끼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의 지도를 받으며, 아이들은 심법에 따라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며 동시에 외부의 흐름을 느껴 가고 있었다.

“…그저 내공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대자연의 일부가 되기 위함이라.”

문득 청호위의 눈이 깊어졌다.

아이들을 위한 가르침이었지만, 그 또한 놓치고 있던 것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대공자의 공부가 실로 놀랍구나…! 죄악계곡에서 신위라 불릴만한 실력을 보였다는 소문이 그저 헛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어.'

그 순간 수란은 청호위와는 다른 이유로 놀라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전부 자애원 소속의…?”

소곤거리는 그녀의 질문에 무장 무녀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맞습니다. 기를 느끼고 다룰 수 있는 재능을 타고 태어났지만, 부모를 잃어 자애원에서 보살피는 아이들이지요.”

“지도자님의 인도에 따라 그런 아이들을 모아 특별히 지도 중입니다.”

“신앙심이 특출 난 아이들이지요.”

마른침을 삼킨 수란이 물었다.

“이것 또한, 근래에 시작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이 아이들은 이제 기를 각성하는 단계이고, 이미 무림인이라 불릴 만한 이들의 지도는 따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수란은 어찌하여 무장 무녀들의 수준이 향상될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경악했다.

'자애원은 이제 독립적으로 무력을 키우기 시작한 거야…!,

그녀가 백이 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들이 아직은 어리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난다면…?’

그녀의 머릿속에 눈앞의 아이들이 자라면서, 계속 새로운 아이들이 넘겨받아 빈자리를 메우는 광경이 떠올랐다.

“혹시….”

그때 짧은 깨달음을 갈무리한 청호위가 유난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공자께서 검가의 무공을 자애원에 전하고 계신 것이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습니까?”

그 말에 수란도 깜짝 놀라, 무장 무녀들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무공이 밖으로 도는것을 알게 되면, 아무리 대공자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도 검가가가 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요?”

무장 무녀들이 빙긋 웃었다.

“걱정을 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지도자께서 자애원에 베푸시는 무공은 전부 검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무공들입니다.”

수란과 청호위는 검가가 타 문파의 무공을 어마어마하게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원래 무공의 소유 문파가 시비를 걸어오면…?”

정아가 딱 잘라 답해 주었다.

“자애원에 전수되는 무공들은 전부 제 주인이신 대공자님께서 불가와 도가의 공부를 바탕으로 직접 창안하신 무공들입니다.”

수란과 청호위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무공들을…?”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때 연소현의 강의가 끝났다.

그는 멀찍이서 수란과 청호위를 향해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그 모습에 그들은 급히 따라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공자는 그들 방향으로는 오지 않고, 몸을 돌려 다음 통로로 향했다.

“두 분께는 죄송하지만….”

정아가 수란과 청호위에게 양해를 구했다.

"대공자님께는 이미 정해졌던 일정들이 밀려 있어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이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선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저희가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지요!”

“저흰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막 도착하자마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못내 속으로 섭섭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 모든 광경들을 본 이상, 불만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 안에서 대공자의 위상은 이미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 후였으니.

만약 이 자리에서 며칠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다고 해도, 기꺼이 기다려서라도 반드시 만나야 할 인물이 틀림없었다.

“두 분께서는 접객실에 대기하시거나 총본산을 좀 더 둘러보시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정아의 말이었다.

“대공자님께서 업무를 처리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 말에 두 사람이 펄쩍 뛰었다.

“그,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무장 무녀들을 앞세운 그녀가 두 사람을 안내했다.

[어이, 청호위! 내 말이 맞았지?! 대박이라니까! 대공자는 대박이었어!]

[말도 안 돼. 살다 보니 네 감이 맞는 날도 있긴 있구나]

둔탁한 소리에 앞서 안내하던 이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강이를 쥐고 펄쩍거리는 청호위의 옆에서 수란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헤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고는 청호위의 등짝을 후려 쳤다.

“짜식! 내가 어두우니까 발밑을 잘 살피라고 했잖아!”

"이, 망할 꼬맹이가….”

다시 앞서 안내를 시작한 이들을 따르며, 두 사람은 근접 전음을 주고받았다.

[대공자의 능력에 대한 현월각주 언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네. 언니의 말대로 현월각이 그렇게 급격하게 성장하게 된 이유가 바로 대공자였어!]

신이 난 그녀의 전음에 깽깽이걸음으로 걷던 청호위가 답했다.

[여기까지 확인한 것만으로도, 무서운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다.]

[만약 대공자가 낙양의 봄에 합류할 생각이 없더라도, 반드시 협력 관계는 구축해야 해! 청호위! 절대 사고치지 마라!]

[사고는 항상 네가 치잖냐?!]

그때 앞서 안내하던 이들의 걸음이 멈춰 섰다.

사람이 겨우 고개를 숙이지 않고 통과할 높이 정도되는 철문 앞이었다.

“이 앞이 대공자님의 집무실입니다.”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얼른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들이 충분히 준비를 마치자 정아가 눈웃음을 지었다.

“안쪽에는 다선랑 분들 또한 계실 겁니다.”

그 말에 수란이 소리쳤다.

“다선랑?! 그 유명한 다선랑 말인가요?! 그들이 대공자님과 만나고 있다고요?! 낙양에 도착했다는 소문은 들었었는데!”

청호위도 외쳤다.

“사천제일미, 상관난화…!”

그를 바라보던 무장 무녀들의 시선이 조금 한심한 것을 보는 눈으로 바뀐 것은 기분 탓이 아니리라.

“어, 어흠.”

작게 웃음을 지었던 정아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아직 세간엔 비밀이지만, 다선랑의 현 대표는 대공자님이십니다.”

“……?!”

그때 문이 살짝 열리더니, 원각정의 시녀복을 입은 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시녀장님. 주인님께서 이제 들어와도 된다고 하십니다.”

무장 무녀들은 밖에 대기했고, 두 사람만이 정아를 따라 문틈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고, 구시가지 건물의 반지하 정도에 위치한 곳인지, 높게 자리 잡은 창을 통해 햇빛이 들고 있었다.

안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있었 다.

그들은 벽을 등지고 서서 혹은 앉아서, 회의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호두 마을의 주민 이주는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리 지정된 마을로 인도하는…”

정아는 인원들 사이로 수란과 청호위를 이끌었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사람들 사이를 통과해 빈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앞을 막는 이들이 없어 시야가 자유로워진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집무용 책상에 앉은 이를 향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대공자인가.'

대공자 연소현은 햇살을 등지고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며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 자세는 어딘가 여유로웠지만, 이따금 서류 너머로 던지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이상입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인 그는 서류를 놓고, 시선을 손님들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에 두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가다듬고 마른침을 삼켰다.

“손님분들께서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소.”

“넵!"

“얼마든지요.”

연소현이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은 동시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공자 연소현.

외모는 어렸고 덩치도 평범했지만,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는 그 존재감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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