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77화 (177/350)

제2편 일별(一別)과 재회(再會)

삼공녀와 사공녀, 쌍둥이 자매는 처음에 가지고 왔던 궁금증들에 대한 답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이공녀 연서린은 그들에게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 주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하지만 어째서인지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쌍둥이 자매는 자신들의 큰오라비, 대공자 연소현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진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사까지 마치고 막상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그녀들에게 이공녀 연서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도 궁금하면 직접 가서 만나 보지 그러냐?”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자매들이 고개를 저었다.

“크, 큰오라버니를 저희가 직접 찾아가라고요? 그건 저희가 큰오라버니의 편에 서는 것처럼 여겨질 터인데요.”

“불가능해요. 사업 지원단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야하니까요.”

이 어린아이들조차 그저 자신들의 오라비를 만나는 것에 정치적 중립을 운운해야 하는상황.

아이들은 그저 잊고 있었던 혈육의 소식을 듣자, 그 모습을 직접보고 알고 싶어진 것뿐인데, 그조차도 어려운 상황.

연서린은 다시한번 그런 가문에 환멸을 느끼며,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으음. 그렇지만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 사업 지원단의 저울추는 이공자 쪽으로 기운것 같은데?”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않고, 큰오라비를 보고 싶어하는 귀여운 동생들을 위한 설득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건……"

“확실히, 지원일부가 이공자 측과 야합을 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공녀인 우리가 움직이면, 일이 커지지 않을까요?”

연서린이 언제나처럼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는 임시긴 하지만 지원일부의 소속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녀가 동생들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런 너희가 지원일부가 관여하고 있는 죄악계곡에 방문하고, 그 책임자를 만나는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

오옷, 하고 쌍둥이 자매가 동시에 외쳤다.

“그, 그렇네요!”

에흠, 하고 삼공녀 연다은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헛기침을 해 보였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군요.”

“사업 지원단장님 또한 그런 이유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귀여운 녀석들,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은 연서린이 커다란 손을 뻗어 동생들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으, 으앗?!"

“갑자기 폭력인가요?”

뻘쭘하게 손을 거둬들인 연서린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곧 나의 스승께서 돌아오실 것이야. 그 전에 너희가 자리를 비우는것이 좋겠다.”

그녀들을 무단으로 들여보내 줬던 수련관주가 아까부터 초조한 눈길로 멀리서 흘긋거리는것을 보면 확실했다.

“호, 호위각주님이?!”

연서린의 스승, 호위각주는 쌍둥이 자매들에게도 고모였지만, 그녀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자매들은 발을 동동굴렀다.

“그, 그럼 언니! 금방 또 뵐 수 있길 바랄게요!”

“옥체 보중하시길……"

그들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에잇 하고 용기를 내더니, 번갈아 가며 둘째 언니를 살짝 안아 주었다.

“……고맙다.”

연서린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못난 어른들 때문에 너희가 고생이 많구나.”

연서린의 말에 쌍둥이 자매가 고개를 저었다.

“고생은 언니가 하시는데요.”

“저희도 연 씨이지만, 연씨 혈족이라 불리는 이들 중에 마음에 드는 자들이 없어요.”

그녀들의 말에 연서린의 눈이 커졌다.

“그자들이 너무 괴롭힌다 싶으면, 뒤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전부 때려눕혀 버리세요!”

“그땐 저희도 힘이 되어 드릴게요.”

그것은 낙양검가의 연씨 혈족에 드리운 어둠에 관한 언급이었으며, 같은 가문의 친지라는자들이 이공녀 연서린을 묶고있는 쇠사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했다.

이 작은 동생들이 알기엔 너무 무겁고 어두운 사실이라, 모를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래. 이 아이들의 영민함은 예전부터 유명했지.'

처음엔 그녀들의 말에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연서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의 언급은 오히려 천의무봉 연서린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수 있기 때문에, 쌍둥이 자매는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

연서린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던 삼공녀의 발이 문득 멈춰 섰다.

“뭔가 새로운 질문이라도 떠올랐느냐?"

삼공녀 연다은이 조심스럽게, 연서린을 돌아보았다.

사공녀 연다혜 또한 발걸음이 멎어 있었다.

“저기, 언니……"

연서린을 바라보는 연다은은 어딘가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처럼 취약해 보였다.

몇 번이고 입을 열려던 그녀가 망설였다.

연서린은 채근 한 번 하지 않고, 그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결국, 사공녀 연다혜 쪽이 물었다.

“……혹시 큰오라버니가 저흴 보면 반가워해 주실까요?”

연서린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확신을 담아서 크고 확실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 * *

야외 연무장엔 다시 연서린밖에 남지 않았다.

떠나던 쌍둥이 자매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들의 발걸음은 눈에 띄게 가벼워져 마치 경공이라도 사용하는 양, 쌩 하고 달려 나갔었다.

“……귀여운 녀석들.”

작은 돌풍과도 같은 아이들이었다.

그 모습들을 떠올린 후에 픽, 하고 웃어 버린 연서린은 옆에 세워 두었던 진검을 다시들었다.

고색창연한 장검.

특별히 화려한 장식이 있는 것도, 특이한 형태를 띠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실용성만을 담아낸 검이었고,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고는 손질이 매우 잘되어 있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그 검은 단출한 외양과는 달리, 그 검의 원래 주인을 안다면 누구라도 놀랄수밖에없는 천하의 명검이었다.

“……아버지.”

그 검은 태상가주의 검이었다.

그녀는 검 자루를 이마에 가져다 대고, 자신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존재를 떠올렸다.

“……저는 언제 그 '일 검(一劍)'에 닿을 수 있을까요.”

* * *

낙양, 구시가지.

선녀교단의 총본산이 위치한 자애원 지부.

지부는 언제나처럼 도움을 받는 빈민들로 들끓고 있었으나, 두 남녀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에는 오가는 이가 없었다.

“으음......."

아까부터 덩치가 큰 남자 쪽은 옷차림을 가다듬느라고 계속 꿈지럭거리는 중이었다.

“아아! 정신 사납네, 진짜. 가만히 좀 있으라고……!”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소녀가 그런 덩치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내공이 실린 가차 없는 발길질이었다.

“크악……"

덩치는 정강이를 한 손으로 붙잡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양손으로 격렬하게 문질러 통증을 날려 보내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자신에게는 손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쌓아 온 공부가 공부인지라, 통증은 금방 가셨다.

“이, 이런 망할 녀석아. 그 검가의 대공자를 만나는데, 옷차림부터 신경쓰지 않으면, 제대로 상대나 해 주겠느냐?”

소녀가 혀를 찼다.

“멍청한 놈. 그 대공자가 이 자애원을 운영하는 사람인데, 겨우 옷차림 따위로 사람의 첫인상을 판단할 것 같아?”

“아, 그건 그렇군.”

덩치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그런 그를 보며 소녀가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어휴. 이런 녀석이 내 조수라니.”

그 말에 덩치가 발끈했다.

“조수가 아니라 동업자겠지!”

“나 정도로 마음이 넓은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너처럼 팔을 잃어 실업자가된 녀석을 받아 주기나 했을 것 같아?”

“나 정도로 마음이 넓은 사나이가 아니었다면, 너 같은 미치광이와 동업을 했을 것 같으냐?”

마치 견원지간을 방불케하는 두 사람은 이를 드러내며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직업병이 발동한 그들은 곧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기 시작했다.

“뭔가 내가 알고 있는 자애원과는 다른데. 자애원의 시설이 이렇게 좋았던가? 아니면 이곳이 총본산이 있는 지부라서?”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이전에 이곳에 와 본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시설들이 깨끗하진 않았어. 이건 틀림없이 최근에 수리가 된 거야.”

낡은 시설을 수리하는 것에 부족한 자금을 쓰기보다는, 그 돈으로 한 명의 빈민이라도 더 돕던 것이 그들이 알던 자애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보고있는 자애원은 무너지고 흘러내렸던 부분들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빈민들을 돕는것을 소홀히 하게 된 것도 아니야.”

“오히려 자애원의 인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던데?”

인원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옷차림이나 의료 장비들도 묘하게 예전보다 질이 좋아 보였다.

두 사람은 곧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역시 그 대공자라는 인물의 영향인가.”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지.”

칩거를 끝낸 낙양검가의 대공자는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서운 행보를 보였다.

어제 하루 만에 보여 준 움직임만으로도 낙양 전역에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현월각주님의 말대로, 우리에게 반드시 협력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덩치가 말한 우리는 당연히 낙양의 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권력자 중에 우리의 동지가 될만한 사람은, 영물(靈物)보다도 희귀하니까……"

소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득권을 가진 인물이 무엇이 아쉬워, 기존의 질서를 바꾸고 싶어하는 그들과 손을 잡겠는가.

덩치가 손을 들어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약 선녀님의 아들이면서, 이 자애원을 운영하고, 그 뭐 같은 이공자 새끼와 대립하는 인물이라면, 말이라도 좀 통하지 않을까, 기대라도 해 보는 거지.”

그들이 대공자 연소현에게 거는기대는, 사실 그리 크지는 않았다.

낙양의 봄 내의 몇몇 회원들이 강력하게 추천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개인적이면 몰라도, 이렇게 낙양의 봄을 대표해서 오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들었던 반만 되는 인물이라면 좋겠는데.”

덩치의 말에 소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나는 왠지 예감이 엄청 좋단말이야. 대공자라는 인물에게선 대박의 냄새가 난다고.”

그녀의 말에 덩치가 노골적으로 못 미더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을 때, 암흑가의 계승 항쟁에 휘말려서 우리 둘 다 죽을 뻔……"

다시 한번 가차 없는 발길질이 정강이에 박혀 들었다.

덩치가 정강이를 붙잡고 낑낑거리고 있을 때, 그들이 있던 방의 문이 열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들어오는 순간 방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의 가인(佳人)이었다.

"......?"

그녀의 유난히 색조가 옅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정강이를 붙잡고 있던 덩치가 벌떡 일어났다.

“하하하.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그때 소녀가 외쳤다.

“아아앗?! 당신은……?!”

정아의 외모는 특징적이라 한번 본 사람이라면 잊는 쪽이 더 힘들었으니, 소녀가 알아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정아 또한 소녀를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 그때 제게 권갑을 빌려주셨던, 협객분이시군요. 그때는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정아는 소녀에게 권갑을 받아, 금주와의 전투에서 잘 써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아, 아뇨. 그땐 진법에 빠져 있던 저희를 구해 주셨으니, 오히려 저희가 감사드려야죠.”

과거, 흑골파와 최후의 일전에서 만났던 이들이 다시 이렇게 재회했다.

“……그런데 자애원 분이셨나요? 그때 옷차림은 전혀 자애원 소속같지 않았었는데.”

소녀의 말에 정아가 입가를 가리고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저는 낙양검가의 대공자님을 모시는 시녀장, 정아라고 합니다.”

“에?! 대공자님의 시녀장?! 그럼 그때는 어째서 그런 곳에 계셨던 것인가요?!”

그녀의 정체에 깜짝 놀라, 토끼 눈을 한 소녀가 물었다.

“현월각주, 세아가 제 언니되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소녀가 납득했다.

“아아, 그랬었군요……! 그때 현월각주 언니를 찾으시더니, 그래서였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소녀는 자신이 소개도 하지 않고, 질문만 던져 대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아! 이런, 실례가. 저희 소개를 드리자면……"

소녀가 소개를 위해서 손을 모아 인사를 하려다가, 자신의 동업자가 너무 조용하기만 한 것을 느끼고는 옆을 바라보았다.

"......."

멍한 시선으로 홀린 듯이 정아만 바라보고 있는 덩치의 멍청한 면상에 소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한번 정강이를 강타.

“저희는 대공자님을 뵙기 위해서 찾아온 수란(水蘭)과......."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참으며, 덩치가 인사했다.

“청호위(淸芦葦)입니다.”

정아가 더할 나위없이 우아하게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빈민가의 소원(訴願) 해결사, 민초(民草)들에게 마지막 희망이라고도 불리는 두 분의 명성은, 본가에서도 유명하지요.”

정아는 한 발 물러서 밖을 가리켰다.

“자, 가시죠. 제 주인이신 대공자님께서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하셨습니다.”

빈민들의 억울함을 들어주는 해결사들.

낙양의 봄에 소속된 두 기인(奇人)은 정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고 보니.......'

소녀, 수란이 생각했다.

정아를 만나자, 흑골파와 최후의 일전, 그날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을 떠올리면,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기억났다.

'암천존자.’

밤(夜)을 몰고 다니며, 피와 살육으로 연회를 벌이던, 그 형용할 수 없는 존재.

무심한 하늘을 대신해서 지상에 천벌을 행한다는, 설화나 전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존재.

'그런 존재가 우리 편이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할 텐데……'

만에 하나라도 그 암천존자와 지금 만나러 가는 대공자가 같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아냐, 아냐. 내 감에 따르면, 대공자 쪽도 대박일 것이 틀림없어.'

정아의 안내를 받으며, 그들은 거침없이 지하대수로로 내려가는 통로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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