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76화 (176/350)

제1편 역발상(逆發想)

북망산 공씨 가주의 동생, 공요가 자신이 방금 나온 거대한 대문을 돌아보았다.

낙양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

노인의 그 탐탁지 않은 시선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심기에, 공씨 가문의 가신(家臣)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움직이지는 않겠다고 합니까?”

“그래.”

늙은 공요는 집사의 도움도 마다하고 훌쩍 마차에 올라탔다.

몸이 불편한 가주 공량과는 다르게, 동생 공요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건장하고 정정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공요가 가신에게 말했다.

“……검가의 이공자 세력이 지난 밤사이에 분주하게 발품을 판 모양이다. 거의 반쯤 협박을 했겠지.”

공요는 안면이 있던 고위 관료들의 집안을 순회하듯 돌고 있었지만, 아군이 되어 줄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단 한 명도.

“다들 평소에는 공씨 가문과 친분을 강조하며 큰소리를 치더니, 결국 겁을 집어먹고, 움직일 생각도 못 하는 모양이군요.”

이공자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된 것이다.

“괜히 섣불리 나서서, 권력 쟁투사이에 끼는것보다 가만히 있는것만으로 보신을 할 수 있으니, 그것을 택한 것이지.”

공요가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런데 어르신의 표정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공요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일들이 그 대공자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지.”

"예?!"

공요는 더 이상 답해 주지 않고 마차의 창밖을 통해 멀리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대공자라는 자를 나도 직접 만나보고 싶구먼.'

* * *

낙양검가.

특등급 폐관(閉關) 수련장.

경공까지 활용해 가며 날 듯이 폐관수련장에 도착한 삼·사공녀는 침음을 금치 못했다.

“아이고……"

폐관수련장에 들어서자마자, 복도까지 들어찬 환자들이 의원들의 진료를 받고있는 모습이 시야 가득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환자들은 전부 무사들이었다.

“……보아하니, 다들 둘째 언니의 대련 상대들인 모양인데.”

“전부 박살이 났군요.”

“상처를 보니, 진검 대련이었던 모양인데……?"

“공녀님들……!”

그녀들을 발견한 수련관주가 그녀들을 막으려다가, 마음을 달리먹었다.

“……원래라면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호위각주님의 엄명이 있었지만. 부디 들어오셔서 이공녀님을 좀 말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때 폐관수련장의 인원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마지막 남은 대련 무사가 쓰러졌습니다!”

“이공녀님은?”

“진검 대련을 그만두실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으십니다! 당장 새로 상대를 구해오라십니다!”

"......."

삼공녀 연다은과 사공녀 연다혜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잘못된 때에 찾아온 것이 아닐 까.

* * *

그녀들의 우려는 다행히 우려로 끝났다.

“오오! 우리 귀염둥이들이 왔구나! 이게 얼마 만이더냐!”

이공녀 연서린이 들고 있던 보검(寶劍)을 검집에 집어넣고, 그녀들을 환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그 표정과는 별개로, 방금까지 이곳이 얼마나 흉흉했었는지를 증명하듯 평소라면 가득했을 관계자들이 전부 도망가, 야외 연무장에는 그녀 하나밖에 없었다.

“……둘째 언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떨떠름한 삼공녀의 말에 연서린이 화통하게 웃었다.

“나름의 깨달음이 있어, 진전을 보려 했는데, 영 받쳐주질 못하더구나. 자, 이쪽으로 오거라.”

사공녀의 시선이 연서린의 상처에 향했다.

“우선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무슨 진검 대련을 어떻게 얼마나 벌였기에, 연서린은 봉두난발을 한 것도 모자라, 전신에 입은 검상들에서 가느다랗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괜찮다, 괜찮아. 이 정도는 금창 약 바르면 금방 낫는다.”

연서린이 그녀들을 한쪽에 마련된 야외 탁자로 안내했다.

“그래. 얼굴 보기 힘든 너희들이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니, 머리가 아둔한 나라도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하구나.”

그녀는 특유의 직감으로, 딱히 단서도 없이 삼공녀와 사공녀의 의문을 정확히 짚어 냈다.

“소현이 녀석의 의중(意中)이 궁금해서 찾아온 것이겠지.”

그녀의 말에 삼공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둘째 언니는 언제보아도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로 발달된 직감의 소유자였다.

“……예. 언니가 얼마 전에 큰오라버니를 만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혹여 들으신 것이나, 짐작가는 바가 있으신가요? 큰오라버니는 무엇을 노리고 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계신 것인가요?”

“음?”

삼공녀 연다은의 말에, 연서린이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는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보면 모르겠느냐?”

그 정도는 너희라면 충분히 알아 차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그녀가 답했다.

“당연히 소현이 녀석은 소가주가 되려 하는 것이지.”

그녀의 말에 항상 침착한 표정의 사공녀마저 눈이 커졌다.

“큰오라버니가 소가주……"

그녀가 뭐라 하려던 말은 삼공녀 연다은의 비명과 같은 말에 묻혀 버렸다.

“그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예요!”

연소현이 노리는 것은 쟁쟁한 후계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려, 후에 방계 가문을 열려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들이었다.

“십 년이나 침묵하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 소가주가 되려 하다니, 지금까지 벌어진 차이가 얼마인데……?!”

이공녀가 머리를 긁었다.

“하긴, 그렇지. 뭐, 그게 상식선에서의 판단일 수밖에 없지. 일반적으로는.”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천하에 소현이가 소가주가 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삼공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셀 필요도 없어요! 그건 일반적인 것과 상식을 넘어서, 불가능의 영역이라고요!”

손가락을 접어 가며 뭔가를 세고 있던 이공녀가 빽- 하고 소리를 치는 그녀의 모습에 귀를 후볐다.

“……그래? 영리한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가 보지, 뭐.”

“당장에 상황부터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잖아요!”

그녀의 반응에 삼공녀가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큰오라버니가 첫 외출로 북망산을 방문하여 충격을 주었다지만, 이공자가 직접 황도로 향한 이상, 북망산 노마들의 힘은 막힌것이나 다름없어요!”

사공녀 연다혜가 동의했다.

“노마들이 움직여야 할 고위 관리들은 아무도 십육가문과 낙양검가의 권력 쟁투에 끼어들려고 하지않을 테니까요.”

“그래?”

그 말에 연서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가 '보는 것'과 다른데?”

“예?”

그 의미심장한 미소에 쌍둥이 자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서린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어째서 둘째 놈이 소현이 녀석을 막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당연히 일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아니다.”

그 말에 일어나서 주먹까지 쥐어흔들던 삼공녀 연다은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내려갔다.

“이건 소현이 녀석이 둘째 놈을 막은 것이야.”

"......?"

삼공녀가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며 그 말을 곱씹고 있을때, 사공녀의 입이 열렸다.

“……과연, 그랬군요.”

사공녀 연다혜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였다면 이공자와 대공자의 대결 구도에서 열이면 열은 이공자의 승리를 예견했을 거예요.”

“아……!”

그 말을 듣자마자 삼공녀 또한 눈치챘다.

“그랬다면 낙양의 중립 권력자들은 서슴없이 이공자의 편에서서 대공자를 물어뜯었겠지요!”

“하지만 큰오라버니가 북망산을 첫 행보로 삼자, 이공자는 중립 권력자들이 이 판에 끼어들지 못하게 만드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게 된 것이죠.”

그랬다.

그녀들의 말대로였다.

이제 이공자는 애초에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권력자들이나, 사업 지원단의 지원일부처럼, 유리해 보이는 쪽에 도박수를 던지는 이들밖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 맞다.”

이공녀가 껄껄 웃었다.

“그래서 내가 '둘째 놈이 소현이를 막은 것이 아니라, 소현이가 둘째 놈을 막은 것'이라 한 것이다.”

그것은 시간 순서, 원인과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이공녀의 특유의 직감적 통찰이었다.

“소현이 녀석은 신병이기로 무장하고 있던 상대를 맨몸으로 비무대에 올라오게 만든 것이지.”

연소현의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노림수였다.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연서린이 삼·사공녀를 보고 웃었다.

“평소엔 달라도 그런 모습을 보니, 너희는 정말 쌍둥이가 맞는것 같구나.”

똑같은 모습으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들고있던, 쌍둥이 자매가 얼굴을 붉히며 얌전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삼공녀가 괜히 헛기침을 해 보이고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대와 기본적으로 덩치 차이가 너무 큰걸요.”

“거인과 아이 수준의 차이죠.”

“중립 권력자들을 제외하고도, 이공자가 동원할 수 있는 이들은 차고도 넘칠 텐데요.”

“그건 그렇지.”

연서린이 선선히 인정했다.

“앞으로 소현이에게 박살 날 이들이 잔뜩 있는 것이지.”

"예?"

“응?”

자신들을 보호하고 키워 준 사업 지원단장도 그렇고, 눈앞의 둘째 언니도 그렇고.

큰오라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큰오라비에게서 자신들과 다른 무언가를 보기라도 하는 것일까.

"......."

“사공녀님.”

수련관주였다.

“본가의 정보부처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사공녀는 본디 낙양검가 사업 지원단장의 정보 비서.

단장이 부재한 상황이지만, 그녀에게 정보부처의 정보가 들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수련관주와 정보부처의 인원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하고, 사공녀가 자리로 돌아와 쪽지를 열었다.

“이건……?!”

“뭔데 그래?”

옆에서 쪽지를 가로챈 삼공녀 또한 내용을 보고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호두 마을 빈민 이주 시작. 대공자는 자체적으로 호두 마을의 사업을 이어 나가고 있던 것으로 파악됨?”

삼공녀의 말을 들은 연서린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역시, 소현이 녀석답군! 자신보다 큰 상대를 넘어뜨리려면, 정신없이 무게중심을 흔들어야지!”

이로써 이공자 측의 대응은 또 한 번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라면. 설마……?’

설마 큰오라비가 이공자 측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던, 삼공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걸로는 부족해요.”

“아직은 서로 시작에 불과하지.”

용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이공녀가 재미있어진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처음에.”

“응?"

사공녀가 말했다.

“처음에 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죠. 큰오라버니의 의중이 궁금해서 찾아온 것이냐고.”

그런데 쌍둥이 자매가 연소현의 행동 목적을 질문하자, 오히려 이공녀 쪽이 당황했었다.

“언니가 말씀하셨던 그 의중이란 것은 무엇인가요?”

삼공녀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거 말이로구나.”

이공녀가 뒷머리를 긁었다.

“나는 뭣이냐, 너희가 소현이의 다음 움직임이 궁금해서 찾아온 줄 알고……"

“언니가 큰오라버니의 다음 수를 아신다고요?!”

“그것이 무엇인가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쌍둥이의 모습에 이공녀가 미소 지었다.

“뭐야? 궁금한 거 맞았구나.”

하핫, 이 내가 머리는 좀 모자라도 눈치 하나는 빠르지, 라며 혼잣말을 하는 그녀에게 쌍둥이 자매의 애타는 시선이 쏟아졌다.

“미리 소현이 녀석에게 들었던것도 약간 있는데……

“언니!"

연서린은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아마, 이후 소현이 녀석은 당분간 지금처럼 상대의 압박을 무마하며, 세력의 확장을 꾀할 것이다.”

* * *

선녀교단의 총본산.

가장 낮은 전당(殿堂).

“대공자님. 현월각 요원으로부터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정아를 통해 넘겨받은 쪽지를 펼쳐 본 연소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를 비밀리에 만나고 싶어 하는 고위 관료 가문 몇몇이 현월각을 통해 접촉하고 있다고 하는구나.”

그 말에 정아가 의문을 표했다.

“그들은 전부 이공자에 의해서 다들 손발이 묶인 것이 아니었사옵니까?”

지난밤에 손발이 묶이지 않은 이들은 애초부터 이공자 세력과 손을 잡았던 가문들뿐일 것이라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연소현은 화로에 쪽지를 던져 넣었다.

“하지만 모두가 이공자 놈에게 순순히 협조할리가 없는 법이다.”

어떤 세력이든 적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것은 이공자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이공자와 척을 졌거나 불만이 깊었던 이들이, 그와 한판 붙게된 연소현에게 비밀리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일들이 소문이 되어 낙양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래. 소문을 들은 그들은 정보를 취합한 다음, 내가 이공자에게 쉽사리 쓰러지지 않을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지.”

연소현이 앞으로 성공적으로 이 공자와 대립해 나갈수록, 그와 손을 잡고 싶어 하는 이들이 늘어 갈 것이다.

“세력을 확장하기 딱 좋은 시기지.”

그때 자애원의 인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연소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님. 밖에 대공자님을 뵙고자 하는 남녀가 와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이곳에 계신 것을 아는이는 드물 터인데, 그들은 누구입니까?”

정아의 물음에 자애원의 인원이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그저 '봄(春)'이라고 하면, 대공자께서 아실 것이라고만…….”

연소현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진해졌다.

낙양 암흑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공자와 연소현이 대립하면, 당연히 그들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껏 연소현과 직접 접촉한 적이 없었던, '낙양의 봄'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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