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편 자매들
대공자 연소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낙양 내외에서 오랫동안 고정된 채 바뀌지 않았었다.
무검자(無劍者).
검을 들지 않는 낙양검가의 대공자.
기(氣)를 느끼고 다룰 수 있는지의 여부가 타고난 재능에 달린 세상에서, 그 멸칭은 단순히 그 재능이 없음을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주가 쓰러지고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큰아들.
그저 칩거한 채로 세상에서 눈 돌린 채 신선놀음이나 하던 천하제일가의 대공자.
지난 몇 년간 그의 이름은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오르내릴 일도 없었다.
그가 칩거를 끝냈다는 소문이 돌때도, 세간은 미지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낙양검가를 벗어나 일보(一步)를 내딛자, 낙양의 아침은 온통 그의 이야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 * *
낙양 중앙 관청 앞, 대로.
중앙 관청 앞까지 이어진 대로에는 다루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크고 작은 다루들은 관청 지역 나름의 명물이었는데, 출근 전에 잠을 깨기 위해서 차를 한잔 마시는 관리들로 가득했다.
“자네, 어제의 이야기 들었는가? 그 북망산에 대한 소문 말일세.”
“물론이지. 그 때문에….”
젊은 관리의 말에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던 안경을 쓴 관리가 찻잔을 내려놓고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늘 새벽 우리 집안의 큰어르신께서 평소 친하게 지내시던 다른 집안의 큰어르신들과 만남을 가지셨네.”
젊은 관리 또한 몸을 낮추었다.
“…우리 집안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네. 가주께서 지난밤을 가신들과 함께 꼬박 새우셨어.”
그들이 소곤거리는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들 주변은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다.
“어제 중앙 관청의 고위 관료분들께서 퇴청을 하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이까?”
“북망산의 그분들과 관련된 일이었다고 하던데….”
“십육 가문의 은퇴한 그분들을 전부 만났다는 말도 들어 보았소이다.”
“도대체 그 대공자라는 이는 십 년동안이나 칩거를 하더니, 무슨 재주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인지…!”
“게다가 무공을 사용했다는 소문도 있더구려.”
“그렇다면 그 대공자가 이제까지 무공을 감추고 있었단 말이오?”
“허허.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소문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 것인지….”
허연 수염을 기른 관리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검가의 이공자가 지난밤 낙양을 떠나 황도로 향했다고 하오.”
“그 말은…?!”
허연 수염의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의 진위가 어떻든 간에, 대외 활동을 꺼리는 검가의 이공자가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그 대공자의 움직임이 그에게 위협이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허어, 두문불출하며 그 무검자라 조롱당하던 자가….”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낙양 전역
북망산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아는 이들이 모이는 어느 곳에서든, 대공자의 이름이 빠지질 않았다.
그리고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지난밤 죄악계곡의 화재 진압의 선두에 대공자가 있었다는 소문이 화제였다.
그렇게 연소현의 이름은 계층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낙양 전역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 * *
낙양검가, 사업 지원단.
지원일부 회의실.
삼공녀 연다은이 소리쳤다.
“도대체 죄악계곡의 사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안건이 어찌하여 이리도 진지하게 논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원일부의 인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점에 대한 고발이 들어왔으니, 당연히 검토를 해야 마땅한 일이지요.”
“아니면, 삼공녀께서는 지금 이 고발들을 덮고 넘어가기라도 하자는 말씀입니까?”
이죽거리는 이들의 말에 삼공녀가 회의용 책상을 내리쳤다.
“그럼 그 고발 문서라도 당장 보여 주시든가요!”
그 말에 이죽거리던 이들이 딴청을 피웠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고발인의 신상이 담긴 대외비 문서라….”
“우리 또한 이 지원일부의 소속입니다!”
삼공녀가 자신의 옆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좌중을 둘러보고 있는 사공녀를 가리키며 외쳤다.
"...."
하지만 지원일부의 인원들은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계속 그녀를 상대하던 인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공녀들께서는 애초에 이 일부의 일원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저 경험을 쌓기 위해서 임시로 배치되신 것뿐이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말에 삼공녀가 버럭 호통을 쳤다.
“임시라고요?! 예, 그렇지요! 말씀 잘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원 일부의 임시 인원이기 전에, 사업 지원단장님의 비서들입니다! ”
그녀의 말에 다들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의 신분을 떠나, 그 유능함은 유명했고, 그래서 그녀들이 지원단장의 비서가 될 수 있었던것은 그들도 잘 아는 바였으니.
“그대들의 상관인 지원일부장이 보고를 올리는 그 지원단장님 말입니다!”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자리를 비웠던 지원일부장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공녀님들. 잠시 이쪽에서 대화를 나누시지 않겠습니까?”
자리를 옮겨, 호화로운 접객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일부장이 말했다.
“이쯤 하시지요. 이미 결정은 내려졌습니다.”
“…일부장!”
삼공녀가 발끈하여 외치자, 일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조심하시지요. 삼공녀님. 당신께선 지원단장님의 비서에 불과하고, 제가 존중해 드리는 이유는 당신께서 본가의 공녀이시기 때문임에 불과합니다.”
“...!"
서늘한 기백에 삼공녀가 주춤거리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사공녀가 앞으로 나섰다.
“부장님의 말씀은, 지원일부가 이공자의 줄을 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이공자님요?”
지원일부장이 히죽하고 웃었다.
“무슨 말씀인지 저는 도통…. 그저 저는 평소대로 제 업무를 하는 것뿐입니다.”
삼공녀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이딴 일은 지원단장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지원일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분은 현재 해동국에 출장 중이시지요.”
“그분이 돌아오시면 그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지원일부장이 잠시 침묵했다.
낙양검가에는 장로가 '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했다.
너무 강력한 권한과 영향력, 그리고 권위를 가진 낙양검가의 중진(重鎭)들.
대표적으로 검가전장의 전장장, 검가건축을 비롯한 사업체의 최고 경영인들, 정보부처를 포함하여 매우 크고 중요한 역할을 가진 낙양 내외에 위치한 조직들의 수장들.
그리고 사업 지원단의 단장.
이런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것을 막기 위해서, 가법상 장로를 겸직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분의 분노라. 그건 물론 두려울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지원일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두 분, 공녀들께서는 어째서 그분이 전부 절차대로 진행된 업무에 분노하실 것이라 생각하시는지?”
그 말에 말문이 막힌 것은 삼공녀 쪽이었다.
“그, 그건….”
심증은 속이 폭발할 정도로 많았지만, 지원일부가 이공자와 야합을 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었다.
“그분께서….”
평소에 대공자에 대해서 좋은 말만 하던 사업 지원단장을 떠올렸지만, 겨우 그딴걸 부장급 인사에게 말해 봤자 비웃음이나 살 뿐.
“부장님.”
사공녀가 다시 나섰다.
“우리가 강하게 우려를 표했다는 점만은 반드시 남겨 주시길.”
“예, 예. 공식적으로 기록도 남겨 두겠습니다.”
일부장이 손을 들어 입구를 가리켰다.
* * *
아무도 없는 복도.
“이런 망할 자식!”
삼공녀가 냅다 일장을 내갈기자, 복도의 벽면에 선명하게 그녀의 손바닥 모양이 남았다.
“…이건 누가 봐도 언니 짓이네.”
“에, 에잇!”
사공녀의 말에 당황한 삼공녀가 몇 번 더 벽면을 갈겨, 손바닥 모양을 뭉개 버렸다.
“이러면 됐겠지!”
허리에 손을 얹고 콧김을 뿜는 언니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사공녀가 그녀를 잡아 일단 현장에서 벗어났다.
지원단의 후원(後園).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사공녀가 입을 열었다.
“지원일부는 이공자의 편에 서서 후계자 정쟁에 뛰어들 의지가 명확하네.”
그녀의 말에 삼공녀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누구보다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본가의 사업 지원단이 다른것도 아니고, 가장 민감한 후계자 정쟁이라니.”
어디의 부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지원단의 1부 또한 가장 경쟁심이 투철하고, 성취욕으로 충만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런 그들이 사업 지원단장이 자리를 비운 시이에, 위험한 불장난을 시작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부단장에게 찾아가 봐야 할까?”
“아니.”
사공녀 연다혜의 말에, 삼공녀 연다은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새벽의 방문 결과를 떠올려 보면 뻔했다.
“저번이랑 똑같을걸. 그 두꺼비 할아범은 이런 상황에 도움이라고는 되지 않아.”
지원부단장은 단장의 빈자리를 대리하는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의 방식은 부서, 개인 간에 무한 경쟁을 기조로 한 방임에 가까웠다.
그는 이 일에서 자신에게 생길 수 있는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이중 삼중으로 대비를 해 두고, 이 일을 관망 중이었다.
“…으으. 큰오라버니가 칩거를 끝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설마 했는데. 결국에 우리 사업 지원단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큰오라버니'라고 말하는 자신의 발음이 낯설었다.
자신들의 큰오라비는,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는 본 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으니.
“이렇게 빠르고 강하게 큰오라버니가 움직일 줄은 몰랐으니까.”
“북망산의 방문에 이어서, 화재 진압을 지휘하고, 그동안 숨겨 왔던 무공을 드러내면서 암흑가의 조직들을 때려잡았다니….”
“결국, 이공자가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지.”
막 칩거를 끝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대공자와 이공자가 충돌을 일으키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그녀들이 었다.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동감.”
그녀들은 자신의 큰오라비에 대해서는 딱히 호감도 큰 유감도 없었다.
그는 타인이나 마찬가지였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으니.
미치광이 이공자에 대해서는 유감을 넘어서 경멸까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대공자의 편을 들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우리를 믿고 출장을 가신, 단장님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져.”
“…그렇지.”
그들은 자신들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나 마찬가지인 존재인 지원 단장을 떠올렸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그들을 지금까지 키우고 보살펴 준 단장이었다.
그녀가 돌아올 사업 지원단이 암투로 인해 난장판이 될 일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
"...."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들은 곧, 자신들이 놀라울 정도로 대공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공자에 대한 정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알고 있지만, 현재의 큰오라버니 쪽은 우리가 아는것이 너무 없어.”
삼공녀가 사업 지원단장의 정보 담당 비서인 사공녀 연다혜에게 물었다.
“지금 큰오라버니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
사공녀가 즉답했다.
“내원총관.”
그 묵직하다 못해 끔찍한 무게감을 지닌 이의 언급에, 삼공녀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그, 그런 위험한 사람 말고. 우리에게 호의적으로 정보를 전해 줄 사람 말이야…!”
그녀의 말에 사공녀가 흠, 하더니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언니의 조건에 부합하면서, 가장 최근에 큰오라버니를 만난 사람이 있어.”
“누군데?!”
사공녀가 답했다.
“둘째 언니.”
천의무봉.
이공녀, 연서린의 언급에 삼공녀가 손뼉을 쳤다.
“당장 가 보자!”
제암진천경 - 8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