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편 둘째 날
죄악계곡 하류, 임시 지휘 천막 근처.
어젯밤의 재난이 거짓말같이 느껴질 정도로 맑은 아침 하늘이었다.
"어억.”
아침 햇빛을 받으며 주저앉았던 공담웅이 자신의 온몸이 저리는 것을 느끼면서 신음을 토했다.
“어라?”
그때 거인같은 덩치를 간신히 감당하던 갑주끈들이 일제히 터지더니, 갑주가 통째로 바닥에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던 나머지 황호사협들이 킥킥거렸다.
하지만 지친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기에, 곧 웃음소리도 잦아들어 버렸다.
생애에서 한 번도 겪지 못한 난리를 겪었던 그들은 이제 웃을 힘도 없었다.
진화가 끝나고, 여기저기서 가늘게 올라오고만 있는 연기들을 보며, 그저 무언가 해냈다는 보람의 여운을 느끼고 있을 뿐.
"...."
그것은 그들의 근처에 앉아있던 스무 명의 아미파 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멍하게 앉아있던 그들의 시선이 임시 지휘 천막의 옆을 향했다.
“이 환자는 다음 구역으로 옮기게.”
“목소리는 낼 수 있는가? 한번 해 보게.”
자애원의 의원들이 환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얼굴을 천으로 감아 가린 보조 의료 인력들이 환자들에게 죽을 먹이거나 하며, 헌신적으로 그들을 돌보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세탁한 붕대를 삶는 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시신들을 옮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지난밤 난리를 겪으며 지저분한 행색을 하고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흘리는 땀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 모습을 보던 아미파의 사감 비구니가 어제저녁의 기억을 떠올렸다.
부총무 비구니와 행정 비구니들이 낙양검가의 무사들에 의해 구속될 때 들었던, 대공자의 전언이었다.
'여러분의 깊은 불심(佛心)과 더불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심과 측은지심이 필요한 일이라고 설명해 두셨군요.’
자비심과 측은지심.
그녀는 이제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쉴 만큼 쉰 것 같구나.”
사감 비구니가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다른 비구니들도 누구랄 것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처음 입어보는 갑주는 불편하고 걸리적거리기 짝이 없었지만, 이제 나름 익숙해졌다.
“허헛, 우리 협사들이 질 수야 없지!”
공담웅이 벌떡 일어나자, 나머지 황호사협도 눈을 빛내며 일어났다.
끝나지 않았던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 * *
대공자 사공자 죄악계곡 합작 사업 현장 본부.
화마가 근처까지 치달았었기에, 주변에 대강의 방화선만 구축해둔 채 포기하다시피 했던 본부 건물이었다.
“다행히 빠른 진화 덕택에 본부가 무사했군요.”
“이 건물까지 전소(全燒)했다면, 보관되어 있던 모든 서류를 잃었을것이니 얼마나 다행인 일이오.”
탄내가 곳곳에 깊이 스며든 것 정도는 아무래도 좋았다.
문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신없이 오가는 이들 사이에 우뚝 선 사공자의 모습이 보였다.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능수능란했다.
“게다가 주군께서 맞이한 첫 현장에서 저리 든든하게 지휘를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어젯밤 대공자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또 어떻소? 지금 이 계곡 어딜가든 온통 그분에 대한 이야기뿐이라오.”
“허허, 그것을 말해 무엇하겠소. 대공자님이 보여 주셨다는 그 무위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보겠다고 지금도 임시 지휘 천막에 남아 있는 발자국에 기웃거리는 이들이….”
그때 그들에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거기 두 사람! 어디서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어?! 당장 이리오지 못해?!”
눈에 쌍심지를 켠 당예린이었다.
“어이쿠!”
문사들이 황급히 종합 상황판을 운영 중인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현월각의 요원이 뛰어 들어왔다.
“사공자님!”
그녀는 현월각의 죄악계곡 현장 지휘부를 생략하고, 즉시 사공자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낙양검가로부터의 급보(急報)입니다!”
그녀가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급히 보고를 이었다.
“낙양검가의 사업 지원단으로부터 죄악계곡의 사업 계획에 대해 처음부터 재고가 필요하다는 안건이 올라와 현재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던 이들의 안색이 변했다.
아니, 이 시점에서 사업 계획 재고라니…?”
“이 건은 이미 심의를 통과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사업 지원단이 사업 계획을 막아 버리면, 답이 없을 텐데…!”
사공자의 최측근, 곽 노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끄럽다!”
그녀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오늘부터 이공자 측의 방해 공작이 본격적으로 들어 오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들 있었지 않나?!”
그녀의 호통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업 지원단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공자 세력과의 격차가 새삼스레 체감되는 그들이었다.
“그렇지. 알고 있었지.”
사공자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모였다.
“모두 알아 두거라.”
사공자가 뒷짐을 진 채,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
다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마를 감싸 쥐거나, 자신의 목덜미를 주무르는 이도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던, 격무를 넘어선 격무에 지친 그들은 현재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쯧쯧."
그 모습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곽 노인이 혀를 찼고, 당예린은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당장에 본부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사공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화재의 뒷수습을 마무리하고, 평소와 같이 제 할 일을 하면 될 뿐이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앞으로 이 죄악계곡으로 향하는 적들의 방해는 모두 무시해도 된다.”
“그 말씀은…?”
한 문사의 물음에 사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형님을 믿어라.”
"...!"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 말에 본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제각기 업무에 몰두했다.
그들의 면면에는 오히려 한결 여유가 생긴 것만 같았다.
활기가 돌아온 본부를 둘러본 사공자는 미소를 지었다.
'큰형님께서는 단 하루도 되지 않아, 모두의 마음을 지탱할 수 있는 거대한 기둥으로 자리 잡으셨구나.'
그가 현월각 요원에게 물었다.
“그래서 사업 지원단의 몇 부에서 그 안건이 올라왔다고 하더냐?”
현월각 요원이 답했다.
“지원일부(支援一部)입니다.”
“지원일부라….”
요원의 보고를 되뇌던 사공자의 얼굴이 문득 묘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누님들이 있는 부서로군.'
삼공녀와 사공녀,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쌍둥이 자매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 *
같은 시각, 낙양 구(舊)도심.
“대공자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자애원의 무녀가 연소현과 정아를 인도했다.
'이곳은 정말 오랜만이군.’
그녀의 뒤를 따라걷던 연소현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느 빈민가에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자애원 지부의 풍경이었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곳의 규모가 조금 더 컸다.
“어둡고 천장이 낮습니다. 머리를 조심하시길.”
무녀가 벽에 걸린 등불을 들었다.
그들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걸었다.
그 화강암들은 자연 암석이 아니라, 가공되어 통로를 구축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사람의 손을 거친 인공 적인 지하 구조물이었다.
낙양 구도심이라면 그 지하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과거 왕조의 유산.
지하대수로(地下大水路)였다.
연소현은 지금 그 지하대수로의 한 구역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이 앞입니다.”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받지 못한 무녀는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곳에서 나오실 때까지 대기하겠습니다.”
연소현과 정아가 모퉁이를 지나자, 더 이상 머리가 천장에 부딪힐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넓은 통로가 드러났다.
무녀가 들고 있던 등불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통로는 밝았다.
통로의 끝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모두 대공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앞에 선 두 명의 문지기는 주술적인 무늬로 가득한 무녀 복장 위로 갑주를 입고, 무장을 하고 있었다.
딱 봐도 상당한 경지를 이룬 이들이었다.
“들어가시지요.”
그들이 문을 열자, 거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이곳이….”
이미 용안으로 내부를 파악하고있던 정아였지만, 부지불식간에 감탄을 흘렸다.
천장은 천연 바위 암반 그대로였고, 그 천장 곳곳에 구멍이 있었기에 햇빛 줄기들이 선명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햇빛이 주술적이고 신앙적인 의미를 담은 형형색색의 직물들에 반사되어 신비한 분위기를 더했다.
그리고 거대한 벽면은 약 선녀를 그린 탱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연소현이 정아의 감탄에 답하듯이 말했다.
“그래. 이곳이 바로 선녀교단의 총본산, '가장 낮은 전당(殿堂)'이다.”
둥근 벽면을 따라 층층이 앉아있던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낙양 내 모든 자애원 지부의 지부장들.
그리고 모든 고위무녀들.
그들이 일제히 연소현에게 합장하여 인사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이시자, 약사여래(藥師如來)이신, 약선녀(藥仙 女)님의 아드님, 대공자님께 인사올립니다.”
전당의 한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서 연소현을 기다리고 있던 눈먼 신녀(神女)가 그에게 깊이 합장했다.
“지도자님을 뵙습니다.”
연소현이 함께 깊이 합장을 해 인사에 답한 후 그들에게 말했다.
"다들 착석하게.”
모두가 자리에 앉자, 연소현은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호두 마을'의 토지는 어떻게 되었나?”
연소현이 갑작스럽게 호두 마을의 이야기를 꺼냈지만 당황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는 자애원 호두 마을 지부의 노(老)의원이었다.
"검가의 이공자 측, 대선상회가 사들였었던, 토지를 전부 회수했습니다.”
그 보고에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어렵지는 않던가?”
“어렵기는커녕, 손쉬웠습니다.”
노의원이 웃었다.
“그자들은 자신들이 잘못 사들인 토지를 어떻게든 빨리 매각해, 손해를 줄일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잘됐군.”
"현월각 측에서 충분한 이상으로 협조를 해 주어, 필요한 거래 기술과 정보들을 전부 내주었기에 훨씬 일이 수월했습니다.”
“좋아.”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애원을 움직여, 대선상회가 방해 공작, 알 박기를 위해서 매입했던 토지들을 다시 헐값에 사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럼 이제 호두 마을의 이주 계획을 시작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과거 사공자와 함께 호두 마을의 자애원 지부를 방문했던, 연소현은 그 지부장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후에 내가 몇 가지 상황을 줄터이니, 그에 맞춰 실현 가능한 계획들을 수립하고, 연습하게. 실수가 없도록.'
그의 계획은 착실히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자애원의 사업계획을 총괄할 이들을 소개하지.”
연소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연소현보다 일찍 도착해 자애원의 인원들과 인사를 나눴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디서든 눈길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미모의 여인이 대표로 말했다.
“저희는 다선랑. 대공자님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자애원의 사업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은 연소현이 좌중을 향해 말했다.
“그녀들을 주축으로 해서, 그 첫 번째로 호두 마을의 재개발 계획을 시작하도록.”
호두 마을의 재개발.
그것은 지금에 와서 순수하게 자애원의 자금으로 진행되는 사업이 되어있었으니.
한 마디로, 낙양검가의 사업 지원단이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