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편 형제지간(兄弟之間)
가장 어두운 시각.
“이공자님께서 행차하십니다!”
장로들이 양옆으로 늘어섰다.
왼쪽 열은 낙양, 오른쪽 열은 강남 파벌에 속한 이들이었다.
급이 되지 않는 수하들은 일제히 몸을 낮추고 그 즉시 앞마당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장로들이 옷매무새를 다듬는 사이, 사위는 침묵 속에 잠겼다.
그 어둠과 침묵 속에서 철컥, 하는 쇳소리와 또각거리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
소리의 주인이 저택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로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재질을 알 수 없는 먹빛 금속 갑주로 둘러싸인 왼발이 포석을 내딛자, 철컥하는 쇳소리가 났다.
오른발의 최고급의 가죽신은 왼발 갑주의 높이에 맞추기 위해 굽이 있어, 또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철컥, 그리고 또각.
박자는 정확하지만, 어딘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소리의 조합이 앞마당에 울려 퍼졌다.
사(四)인의 고수들이 발소리 하나 없이 그림자처럼 그를 수행하고 있었다.
철컥, 또각.
이윽고 그 발걸음은 하후 장로의 앞에서 우뚝 멈춰섰다.
"...."
그의 주군은 그를 향해 돌아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후 장로의 표정은 단단하게 굳었고, 그 주름진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큰 덩치가 급속하게 쪼그라든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그의 깊이 숙인 시선에 왼발과 마찬가지로 먹빛 갑주에 싸여있는 주군의 왼손이 보였다.
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왼손의 갑주가 쥐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
하후 장로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하후 장로.”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낮은 저음에, 찢어진 문풍지 사이로 바람이 새는 소리가 뒤섞인 것 같은 목소리.
그것은 지독하게 쉰 목소리였다.
"예, 주군. 하명하십시오.”
하후 장로의 목소리 끝이 자신도 의도치 않게 갈라졌다.
“분명 자신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며, 면목이 없습니다.”
까드득, 왼손의 갑주가 또 한 번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면목(面目)이라.”
갑주가 아닌, 가죽 장갑으로 감싸인 오른손이 하후 장로의 멱살을 쥐었다.
"...!"
하후 장로는 충분히 내력을 발휘하면, 그 손을 뿌리칠 수 있음에도 반항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먹빛 갑주로 휩싸인 왼손이 번뜩였다.
“크윽…!”
주군의 왼손에는 하후 장로 자신의 눈알이 뽑혀 있었다.
그는 비명을 삼켰다.
그의 어깨높이밖에 오지 않는 주군이 멱살을 당기자 하후 장로의 시선이 주군의 시선과 마주했다.
"...!"
얼굴을 완전히 가린 금색의 가면의 눈구멍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석탄이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바로 사패천 련주의 독문무공, 마라나찰(魔羅羅刹)의 상징.
“눈이 없어졌군.”
흡입 화상으로 인한 특유의 쉰 목소리가 내공을 담고 주변에 나직하게 깔렸다.
“그리고 이제 나처럼 얼굴을 잃으면, 그것이 비로소 면목이 없어진다는 것이지.”
지독한 화상으로 얼굴을 잃은 이 공자, 연자청(淵紫鵰)이 말했다.
그의 왼손이 까드득, 하며 하후 장로의 눈알을 쥐어 터트렸다.
"...!"
그 왼손이 천천히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하후 장로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주변의 장로들도 고개를 들고 모두 떨리는 시선으로 그 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공자 연자청이 공포로 군림하는 군주라는 것은, 그들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분노는 이제껏 그 유례가 없었다.
“아드님!”
앞마당에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여인의 목소리에 이공자의 손이 우뚝 멎었다.
“하후 장로가 큰 잘못을 저지른것은 맞지만, 그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니겠습니까?”
요염하게 나긋하면서도, 어딘가 독기가 가득한 목소리.
수십의 시녀들과 집사들을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낸것은 바로 이공자의 어머니인, 구양 태상부인이었다.
화려한 궁장을 입은 그녀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가와 자신의 아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 분노는 아드님에게 약속된 자리를 노리는 자에게 향해야 마땅합니다.”
그녀의 보랏빛으로 칠한 입술이 나풀거렸다.
“저 간악하기 짝이 없는 연소현 그놈 말이지요."
까드득.
이공자 연자청의 왼손이 아쉽다는 듯이 한 번 허공에서 쥐었다가 펴지더니, 이내 회수되었다.
“…흡!”
멱살이 놓인 하후 장로가 억지로 무릎을 펴고, 다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드님, 훌륭한 선택-.”
“들어라.”
그녀의 목소리를 끊어 버리고, 이공자의 영영 쉬어 버린 목소리가 장로들의 귓가에 꽂혔다.
“나는 지금부터 황도로 향해, 황도십육가문의 현(現) 가주들을 만나도록 하겠다.”
연소현이 모든 전대 가주를 한데 모았다는 것을 가정하고 움직이겠다는 그였다.
구양 태상부인이 작게 손뼉을 쳤다.
“그렇군요! 원래라면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을 그들이지만, 연소현 그놈이 전대 가주들을 전부 만나고다녔다는 것을 알게되면, 현 가주들도 필시 서로 손을 잡고 싶어 할겝니다!”
연소현이 전대 가주들을 단단히 뭉치면 뭉칠수록, 이공자가 현 가주들과 공동전선을 펴는 것은 더욱 더 용이하리라.
“그러니 너희는 이제 노마들이 자신들의 가문 이름을 팔고 다니는 것을 막아라.”
그의 붉은 눈빛이 번뜩였다.
“앞으로 그 노마들이 움직이려 들 고위 관리들에게, 십육가문과 노마들은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하라는 말이다.”
장로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존명 (尊命)!”
대공자 연소현은 전대 가주들을 움직일 것이고, 이공자 연자청은 현 가주들을 움직인다.
그 정도라면 고위 관리들에게, 낙양검가의 후계 다툼에 끼어드는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경고하는 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안 장로.”
“예, 주군!”
하후 장로와 마찬가지로 오늘 패배를 맛본 안 장로가 즉시 대답했다.
“장로들은 그놈의 다음 수를 어떤 수라고 예측했나?”
구양 태상부인도, 이공자도 결코 연소현을 대공자라 칭하지 않았다.
마치 그를 절대 낙양검가의 '대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안 장로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그자의 다음 수 또한 이번처럼 단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까드득, 하는 소리가 대답처럼 들렸다.
“놈이 살아남으려면, 앞으로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수밖에 없겠지.”
연소현을 향한 분노와 별개로, 연자청의 머리는 철저하게 차갑고 냉철하게 굴렀다.
“하후 장로.”
“예, 주군. 하명하십시오.”
텅 빈 눈구멍에서 가늘게 피를 흘리며 하후 장로가 답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감사합니다!”
이공자 연자청의 붉은 눈알이 그를 향했다.
“놈이 단수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압도적인 세력 차이를 이용한다.”
“존명!”
구양 태상부인이 요염하게 미소 지었다.
“후 대응과 선제공격으로 단수를 제압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이공자가 다시 안 장로에게 물었다.
“놈이 무공을 드러냈다고?”
"예! 아직 특정하지는 못했지만, 현재까지의 정보를 종합하자면, 벽을 넘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경지로 보입니다!”
“평생을 감추고 있었군.”
이공자가 황금빛 가면 사이로 붉은 안광을 흩날리며,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더 이상 놈을 얕보는 머저리 같은 자는 이 자리에 없겠지.”
장로들보다 먼저, 구양 태상부인이 답했다.
“이 어미가 아드님의 빈자리를 채울 것이니, 안심하고 다녀오시지요.”
이공자가 아직 어린 시절부터 낙양검가에서 세력을 키워 온 것은 그녀였다.
그랬기에 그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당연히 그녀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이공자 연자청이 호위들과 함께 거대한 흑색 마차에 올라타자, 대기하고있던 이들이 이공자 깃발을 그 마차에 올렸다.
“아드님.”
창을 통해서, 이공자에게 구양 태상부인이 속삭였다.
“그 분노가 사그라들것 같으면 언제든 떠올리시지요.”
"...."
“아드님의 왼쪽 반신(半身)과 그 얼굴을 불태운 것은 당씨 년이었고, 그 치료를 방해한 것은 약씨 년이었다는 것을요.”
그녀가 뒤틀린 과거를 떠올리며, 눈으로는 증오를 홀리고, 입으로는 원한을 뱉었다.
“이 검가는 반드시 우리 것이 되어야 합니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기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섯 마리의 명마들이 길게 울고, 이공자의 흑철성채(黑鐵城管)가 저택의 앞마당을 벗어났다.
저택의 앞에서 대기하던 이십여 대의 장갑마차가 선도했고, 흑철성채의 뒤를 이십 대의 장갑마차가 따랐다.
수십 기의 기마무사들이 행렬에 붙었다.
'내가 몇 달만 빨리 아드님을 낳기만 했어도:'
이공자와 대공자는 올해로 같은 십칠 세였다.
구양 태상부인이 하늘을 증오스럽다는 듯이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지금쯤 아드님은 소가주가 되었을 것이고, 이 몸과 함께 검가를 다스리고 있었을 것인데…!’
그랬다면, 자신의 아들이 대공자였을 것이고, 분명 아무런 문제도 없이 소가주가 되었을 것이라 여기는 그녀였다.
“명은 들었겠지.”
그녀가 고개를 내려 장로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제 다들 움직이시오!”
그 추상과 같은 권위가 담긴 목소리에 장로들이 일제히 답했다.
“태상부인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죄악의 골짜기, 전진기지.
망루에 서서 바람을 맞고있던, 연소현이 말했다.
“비, 왔느냐?”
사공자 연비가 훌쩍 뛰어올라, 망루에 착지하고서는 연소현에게 길게 인사했다.
“예, 큰형님. 이 소제가 왔습니다.”
연소현이 손을 뻗어 그 옛날처럼 사공자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녀석."
“헤헤헤.”
한 세력을 이끄는 사공자의 체면을 생각해, 다른 이들 앞에서는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고생은 큰형님께서 다하셨지요. 소제는 그저 옆에서 조금 거들었을 뿐입니다.”
겸양을 넘어서 진심을 표한 사공자가 가져온 소식을 전했다.
“이공자의 행렬이 낙양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역시 그렇게 되었군. 예상보다는 조금 더 빠르구나. 사천당가가 찾아오는것도 예상보다 빨랐고.”
역시 세상은 넓고 유능한 이들은 많았다.
“그래 봐야 조금이지요. 아-주 조금.”
엄지와 검지로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 보이는 사공자를 향해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큰형님.”
“그래.”
“사천당가를 끝까지 믿어서는 안됩니다.”
당백과 같은 말을 하는 사공자였다.
“알고 있다. 걱정 말거라.”
“물론, 그들이 뛰어 봐야 큰형님의 손바닥 안이겠지요.”
모든 일이 사공자가 존경해 마지않는 큰형님의 예측대로 홀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공자의 표정은 어딘가 부루퉁했다.
“이공자 그놈의 이동 경로에 독을 퍼트리고 진천뢰를 터트려서 확 죽여 버렸으면 좋겠군요.”
괜한 볼멘소리에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그랬다가는 후계자 암살을 빌미로 삼아, 장로들이 검가를 가주제에서 장로 내각제로 바꿔 버리려 들겠지.”
“그자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겠지요.”
사공자가 허공을 노려보며 장로들에 대한 욕설을 잠시 날려 보냈다.
그런 사공자를 뒤에서 바라보는 연소현에게 이제는 없었던 것이 된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연소현에 의해 죄악계곡으로 합작 사업지가 변경되었지만, 원래 역사에서 사공자의 사업지는 호두마을이었다.
그때는 연소현이 함께하지 않았기에 홀로 첫걸음을 뗐었던 사공자, 연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불과한, 그래서 누구에게 위협이라고는 되지 않았을 사공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 간단한 사업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었었다.
이공자 연자청에 의해서.
당시 이공자는 누구도 감히 상상 할수 없었던 선을 넘은 과격한 방식으로 사공자의 사업을 물어뜯어 버렸었다.
심지어는 낙양검가 최고 운영 회의의 중재 권고를 무시하고, 이후에 징계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때까지 그놈이 가진 왜곡되고 뒤틀린 원한을 누구 하나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지.'
미친 어미에 의해서 끊임없이 주입되는 저주와 같은 원한과 증오에 가두어져 키워진 괴물.
그것이 이공자 연자청이었다.
“비야.”
“네, 큰형님.”
“이번엔 다를 것이다.”
사공자는 그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생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그때 멀리서 환호성이 메아리쳐 들려왔다.
진화 완료를 알리는 환호성이었다.
눈이 부셔 오자 사공자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멀리 동녘이 밝아 오며,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