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72화 (172/350)

제22편 세력(勢力)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은랑은 차를 사양하고, 탁자 위의 술 항아리를 직접 따랐다.

“사천당가가 언제든지 이 거래에서 발을 뺄수 있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한 잔을 쭈욱 들이켠 그녀가 잔을 탁 하고 내려놓으며, 연소현을 바라봤다.

“본인이, 아니. 사천당가가 대공자께서 성공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라오.”

그녀는 솔직하게 사천당가의 속내를 털어놓고 있었지만, 부가주 당귀호는 미소만 띤 채 묵묵히 옆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항렬로도 직급으로도 경험으로도 소가주보다 앞섰지만, 지금 그는 조언자일 뿐.

결정은 결정권자의 몫이었다.

“비록 이 낙양에서 사천당가가 직접적인 세력 투사는 불가능하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본인에게 얼마든지 요청해 주시오.”

“시원하게 입장을 밝혀 주신 것에 감사하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가와 연소현, 양쪽 전부 계획이 성공하길 바라고있다.

이견은 없었다.

소가주 당은랑의 깔끔한 태도는 회담에 불필요한 시간을 소모하는 것을 비약적으로 단축하게 해 주었다.

감각적인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

묘령에 불과한 그녀였지만, 과연 사천당가가 결정권자로 내밀만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봐 주시오.”

연소현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종이의 내용을 확인한 당은랑의 짙은 녹안이 부릅떠졌다.

당귀호가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턱을 쓰다듬었다.

“호오, 북망산 전대 가주들이 결의한 연판장이로군요. 대공자님. 혹시 제가…?”

연소현이 마음껏 확인하라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당은랑에게서 연판장을 받아 든 당귀호는 품에서 준비해 온 서류를 하나 펼쳐들었다.

그것은 전대 가주들의 필적을 비교 분석하기 위한 견본들이었다.

“필적들은 정확히 일치하는군요. 그런데….”

그가 연판장의 빈자리 하나를 가리 켰다.

“양가의 전대 가주는 어떻게 된 것인가요?”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는 불행히도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그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미소에 당귀호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겨우 십 대에 불과한 자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당은랑이 자신의 무르팍을 쳤다.

“흠. 십오 인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오. 하나쯤은 불참해도 상관없지.”

그녀가 당귀호를 바라보았다.

“숙부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 또한 소가주님과 같은 판단입니다. 그러니….”

그의 시선이 연판장에 머물렀다가 연소현을 향했다.

“앞으로 며칠 더 지켜보시면, 전대 가주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이 연판장의 진위를 확실하게 판별할수 있겠지요.”

과연 그는 정보 단체의 수장답게 마지막까지 신중했다.

“흠.”

당은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소가주님?”

그녀가 시선을 들어 연소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사천당가는 대공자께 항상 먼저 명확한 증명을 요구해 왔지. 하지만 그래서는 일방적인 관계밖에 되지 않아.”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당귀호는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사천당가가 먼저 대공자께 신뢰를 보이도록 하겠소.”

그녀가 품에서 자그마한 은제 장신구 하나를 꺼내어 탁자에 놓았다.

"대공자. 이 증표를 당고규에게 보여주시오.”

당고규.

당가의 현인이라 불리는 인물.

그는 다름 아니라 사천의 여러 가문의 인물들을 이끌고 낙양에 찾아온 투자단의 대표였다.

“그 말씀은….”

무언가를 눈치챈 연소현에게 당은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당고규가 이끄는 투자단에 소속된 가문들은, 사실 전부 사천당가가 비밀리에 키워 온 가문들이오.”

그녀가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이 증표를 보여 주는 즉시, 그 가문들은 투자라는 형식을 통해서, 사천당가의 자금을 즉시 대공자께 넘길 것이오.”

연소현은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투자단의 구성 가문들마저 미리 준비되었던 사천당가의 수족들이었다니.’

소가주인 당은랑과 부가주 당귀호가 직접 낙양에 그림자들과 함께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설마했던 그였다.

과연 그 비옥하고 넓은 사천을 그 오랜 세월동안 지배해온 사천 당가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크으.”

당은랑이 술을 한 잔 가득 따라 들이켜고는 말했다.

“원래라면, 그 금액은 대공자께서 죄악계곡을 완전히 장악하신 뒤에야 전달할 액수였소.”

“그렇다면 상당한 액수이겠소.”

그녀가 연소현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뢰를 보여 주기 위해서 먼저 드린다고 하기엔, 너무 큰 액수라고만 하겠소이다.”

그녀가 하핫, 하고 웃었다.

녹색이 섞인 그녀의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출렁였다.

“본인은 그 정도면 앞으로도 대공자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만?”

연소현이 아무 말 없이 작은 술 항아리를 들어 그녀의 잔을 채워주고, 자신의 빈 잔을 채웠다.

“호오?”

그녀는 얼른 잔을 들고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연소현이 자신의 잔을 그녀에게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앞으로도 신뢰가 오가는 관계로 남을 수 있길 바라겠소.”

“하핫!”

그녀는 연소현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연소현 또한 깔끔하게 술잔을 비웠다.

그의 눈에는 먼저 악당 역을 맡은 당귀호가 압박하고, 뒤에 등장한 당은랑이 좋은 분위기로 이끄는 역할을 미리 계획한 것이 뻔히 보였다.

하지만 이번엔 모르는척 넘어가기로 했다.

적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과 태도에서 느껴지는 마음은 진심이라 판단되었으니.

* * *

술이 몇 배 돌자, 분위기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하핫!”

오히려 술을 청했던 당귀호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자신의 잔에 차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것을 보아하니 애초에 술은 그가 아니라 당은랑을 위해서 준비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말이오, 대공자.”

그녀가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 죄악계곡은 어떻게 완전히 장악할 요량이시오?”

“흠. 그것은 조금 더 지켜보시면…."

“계획 쪽을 묻는 것이 아니오.”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검가의 이공자 말이라오.”

"...."

연소현이 입을 다물었다.

“대공자께서 공식적인 첫 외출로 북망산을 택한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단수였소. 그들에게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지.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했다.

“애초에 대공자께는 북망산행(行)이라는 '단수' 이외엔 선택할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이 아니오?"

연소현은 반쯤 남아 있던 자신의 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탁자에 놓았다.

“맞소. 단수 이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지.”

그는 선선히 인정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세력 차이는 굳이 감출 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적은 그 세력이 너무나 크고 강력하오. 정면으로는 아무런 승산도 없지.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이라도 두는순간….”

그가 뒤로 몸을 기댔다.

“...잡아먹히는 것은 이쪽이었을 것이오.”

오늘에서야 그도 확신한 바이지만, 이 거대한 낙양의 암흑가에 이 공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을터였다.

수백만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낙양의 암흑가.

그 머릿수는 얼마일까.

거둬들이는 액수는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 암흑가조차 이공자 세력의 근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사패천.”

차를 마시던 당귀호의 말이었다.

이 드넓은 중원 땅에서 남부 해안 사(四)개 성에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연합 세력.

“동서대운하와 남북대운하. 낙양과 황도로 향하는 양대 대운하의 모든 물자는 사패천이 지배하는 영역을 통과할 수밖에 없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의 말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양에 거대한 부를 안겨 주는 모든 해외의 상선들.

그 모든 상선이 사패천이 통제하는 항구를 통과해야 했다.

“아버지의 강남 정벌이 성공했었고, 그에 따라 검가의 강남 지부들은 사패천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상선들을 통과시키고 있지만….”

연소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쓰러진 이후, 사실상 검가의 강남 방면 사업의 영향력은 이공자 놈에게로 점차 집중되고 있으니 말이오.”

그의 어머니, 구양 태상부인은 사패천 련주의 여식.

그렇기에 사실상 이공자는 낙양검가와 사패천, 그 양쪽에 적(籍)을 두었다고 해도 무방했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권력과 영향력을 모두 쥐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그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욱 빠르게 커질 것이었다.

칩거를 끝낸 이후, 연소현은 그 상정 외라고 할 수밖에 없는 능력으로, 간신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나 또한 이제 세력의 기반을 구축했으니, 그 기반에서 세력을 성장시켜 나가면, 후에는 그림이 달라질 것이라오.”

그의 말에 소가주 당은랑이 혀를 내둘렀다.

“…태어나서부터 그저 준비된 탄탄대로만을 달리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놀랍기만 하다오. 대공자의 그 대담함과 자신감에는 과연 기가 질릴 수밖에 없어.”

그녀가 항아리를 들어 연소현의 잔이 넘치도록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혹시 그렇다면 대공자의 다음 수 또한 단수요?”

“과연 어떨지….”

연소현이 찰랑대는 잔을 그녀를 향해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관전자의 즐거움은 다음 수를 나름 헤아려 보면서 지켜보는 것에서 나오는 법. 지금은 그 즐거움을 즐기도록 하시오.”

* * *

접객실 앞, 작은 마당.

“술 잘 얻어먹고 가오.”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당은랑이 연소현에게 말했다.

애초에 독인(毒人)인 그녀가 주정(酒精) 따위에 취할 일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연소현의 뒤에선 당백에게로 향했다.

“당백 대주. 혹시 본가로 돌아오실 생각은 없소?”

“없습니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딱 잘라 거절하는 당백의 모습에 당은랑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고모님을 따라 낙양으로 떠났을 때, 본가를 향한 마음도 함께 떠났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알겠소.”

그녀가 말하는 고모는 사공자의 어머니인 당 태상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림자 요원으로부터 정보를 갱신받은 당귀호가 그녀를 불렀다.

“소가주님.”

그녀는 연소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당귀호의 전음을 통해 보고를 받았다.

“으음."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연소현에게 말했다.

“본인이 방금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탄륭구와 가효구의 구장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화재 진압을 지연시킨 배후에는 이공자 측 인물이 있었다는 것 같소.”

대뜸 정보를 전부 털어놓는 그녀의 모습에 당귀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당은랑은 그런 그를 무시하고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

“대공자의 정보 조직이 바쁜 것같아, 우리 쪽에서 조금 조사를 해봤소.”

“…그뿐이겠소?”

연소현이 당은랑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이 화재의 배후에 그들이 있다고 해도, 나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나의 세력이 화재에 대응하는것을 보며, 전력을 낱낱이 분석중 일 것이오.”

화재와 암흑가 조직을 이용한 위력 정찰.

암흑가 따위는 그들에게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으니, 연소현이 생각하기에 그들이라면 충분히 떠올려 낼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오.”

연소현의 말에 당은랑이 동의했다.

“그들은 대공자의 단수에 의해 즉각적인 대응을 할수 없었던 것 뿐이지, 후속 조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말이오.”

“지금도 그 후속 조치들이 이뤄지고 있겠지.”

“그래도 대공자께선 자신이 있으시겠지?”

“물론.”

당은랑이 외투의 덮개를 뒤집어쓰며 미소 지었다.

“그럼, 무운을 빌겠소.”

* * *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넓고 호화로운 앞마당에는 희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은 마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어딘가 대공자의 철갑요새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새였다.

마차에 매인 은빛 갈기를 지닌 여섯 마리의 명마(名馬)가 투레질을 쳤다.

“…대공자의 무공 수위가 그래서 어느 정도라고 하는가? 뭐? 신뢰도가 떨어지는 정보라면, 양이라도 확보해야지!”

그 앞에서 이공자 측의 장로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화재 진압에 참여한 가문이 북망산 공씨 가문을 필두로 여섯 개. 총 일곱 개 가문이라고?”

“자애원의 동원력이 예측 이상으로 뛰어나군. 우리가 기존에 파악했던 것보다 좀 더 조직적이었던 모양이야.”

대선상회가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는 시점에서도, 그들의 분석 작업은 큰 차질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공자 측에 협력하는 낙양의 유명 정보상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선상회의 책임자, 안 장로가 자신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수하에게 다시 물었다.

“대선상회에 대한 공격이, 사공자 놈의 검가동패를 가진 현월각의 짓이라고?”

이쪽도 결국 꼬리를 잡은 듯했다.

“아직, 확신은 할수 없지만….”

수하가 넘겨준 보고서들을 거칠게 넘겨보던 안 장로의 인상이 한껏 구겨졌다.

“이, 이런 개 같은…!”

보고서를 쥔 손을 부들거리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진정하시오, 안 장로.”

그와 같은 강남 파벌에 속한 동료 장로였다.

“후속 대응은 이미 확실하게 진행 중이지 않소. 이제 시작일 뿐인데, 뭘 그리 홍분하시오?”

안 장로가 표정을 가라앉혔다.

“…알고 있소.”

“분석도 착착 되어 가고.”

동료 장로가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지으며, 앞마당에서 바삐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이 깊은 밤이, 마치 낮이라도 된 양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턱짓으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게다가 저자보다는 우리 강남 파벌 쪽 상황이 훨 낫지 않소?”

안 장로의 시선이 구석을 향했다.

그곳에는 초조한 발걸음을 조금도 쉬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는 하후 장로의 모습이 있었다.

“…으음.”

오늘 대회의장에서 지휘를 담당했던 낙양 파벌의 그 하후 장로였다.

“꼴이 우습군.”

잠시 그런 그의 모습을 비웃던 동료 장로가 안 장로에게 말했다.

“어쨌든 그 북망산의 노마들을 직접 막을 수는 없지만, 그들이 앞으로 움직이려는 자들을 미리 막아버릴 수는 있겠지.”

그들은 현재 관직이 없는 몸.

무언가를 하려면 관직이 있는 누군가를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오.”

“물론.”

동료 장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서 주군을 기다리는 중인 것 아니겠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사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공자님께서 행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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