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편 치러지지 않은 대가(代價)
사천당가의 부가주, 당귀호.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등장한 사천당가 최고 등급 인사의 출현이었다.
정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용안으로 들여다본 그에게서 적의(敵意)는 읽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호의가 있는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오랜만이라 반갑다고 손을 흔들며 인사까지한 당백에게도.
'기묘하다.'
하지만 그녀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그의 생각은 기묘하게도 안개라도 끼인 것처럼 뿌옇게만 보일 뿐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가 품고 있는 감정만이 짐작 가능할 뿐이었다.
무언가의 특수한 수법이나, 귀물(貴物) 따위로 정신을 보호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후후. 일단 이건 재회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잘 받아 두겠어요.”
"...."
노골적으로 그를 경계하는 당백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당귀호는 당백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소매를 털자, 들고 있던 극독이 묻은 단도들이 거짓말처럼 손에서 사라졌다.
“자, 그럼….”
그의 시선이 정아에게로 향했다.
“시녀장, 정아. 라고 하셨던가요?”
물론 그녀가 자신을 소개한 적은 없었다.
“이제 그대의 주인께 제가 왔음을 알리도록 하시지요.”
“…용건은 무엇입니까?”
정아는 아직 검에 올려놓은 손을 떼지않고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귀호가 아니라, 정아의 뒤에서 들려왔다.
“사천당가는 아직 본 대공자와의 거래에서 약속받은 대가를 받지 못했으니까.”
모습을 드러낸 것은 평소 모습 그대로의 연소현이었다.
흑잠사 외투를 휘날리며 등장한 그는 그 특유의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대가를 제대로 지불할 수 있을 것인지 감시하러 오신 것이겠지요.”
그가 당귀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가주님?”
정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간 내에 정상적인 방식으로 일주천을 마치지 못한 주인은, 그녀가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일주천을 마무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그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기색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후후후.”
사천당가의 부가주 당귀호가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이거, 지금 시점이라면 틀림없이 운기행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상으로 대공자의 내공이 깊은 모양이군요.’
그의 시선이 마침내 직접 보게 된 연소현을 해부라도 하듯이 섬뜩하게 빛났다.
굳이 정아가 아니더라도 그 노골적인 호기심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감시'라니…, 그런 섭섭한 표현을.”
그가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그저 계약이 잘 이행될지, 대공자님의 활약을 직접 지켜보기 위해서, 라고 하는 편이 어떨까요.”
대공자 연소현은 사천당가와 계약했다.
검가의 눈을 피해 사천당가가 죄악의 골짜기를 통해 낙양에 진출할수 있도록 하겠다고.
그리고 그 계약은 연소현이 죄악 계곡을 완전히 손에 넣은 후, 사천 당가가 그곳에 성공적으로 둥지를 틀어야 완료되는 것이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귀한 손님을 밖에 세워 둘수는 없으니.”
연소현이 그를 손님맞이를 위해 사용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정아는 철갑요새에서 차와 다기를 챙겨오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런 그녀를 향해서 당귀호가 말했다.
“시녀장. 저는 차보다는 술을 선호한답니다.”
"...."
정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까지 최전선이나 다름없었던 난장판에서 술을 찾는단 말인가?
당귀호가 태연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아까 제가 좀 둘러봤는데, 지하에 작은 술 항아리들이 있는 보관고가 있더군요. 후후.”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는 정아의 용안에 잡히기 전까지, 전투로 인해 경계도가 치솟아 있는 전진기지 내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던 것이었다.
그것도 전원이 내공 보유자인, 하녀단과 당백의 수족들로 이루어진 경계망이었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정아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곧 찾아서 올리겠습니다.”
“어딘지 못 찾으시면 얼마든지 저에게 물어보세요."
당귀호가 후후, 하고 웃어 보였다.
“아, 그대라면 그 정도는 간단하게 찾으시려나?”
정아는 당귀호의 의미심장한 눈길을 무시하고 물러났다.
* * *
전진기지 내의 조촐한 접객실.
당귀호가 찻잔에 따른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연소현의 뒤에 서는 정아를 향해 말했다.
“시녀장. 자리를 좀 비워 주실수 있을까요?”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던 그의 눈매가 슬쩍 좁아졌다.
“가능하면 멀리.”
연소현의 뒤에는 당백이 접객실의 구석에 앉아, 사슬낫을 만지작 거리며, 노골적인 시선으로 당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귀호는 딱 집어서 정아만을 말한 것이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지 외곽의 경계를 점검이라도 하고 있도록.”
정아가 자리를 비우자 당귀호가 괜히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이야,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첩보 쪽에 종사하다 보니, 특별한 재능을 가진분은 좀 불편해서 말이죠.”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그는 그동안 정아의 능력을 외부에서 판단할 수 없게끔, 보안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 왔다.
따라서, 당귀호의 말은 짐작에 불과했고, 연소현을 통해 은근히 짐작이 맞는지 떠보려는 수작이었다.
“제 시녀장이 특별히 아름답긴 합니다. 충분히 정신이 사나우실 수 있지요.”
'역시, 그 거대한 규모의 기책(奇策)을 짜낸 대공자답게 이 얄팍한 술수 정도는 가볍게 넘겨 버리는군요.'
당귀호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더해졌다.
“혹시 대공자께서는 제가 직접 찾아올 줄 알고 계셨습니까?”
연소현이 차를 마시고는 답했다.
“제가 북망산의 십육가주가 동참의사를 밝힌 증거를 당가 쪽에 보내면, 고위 인사께서 찾아오시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의 시선이 당귀호를 향했다.
“이렇게 빠르게 찾아오실 줄이 야. 혹시,'이미' 낙양 내에 계셨던것이 아닙니까?”
“후후. 물론이지요.”
당귀호가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당가라고 하지만 결국 사천의 일부. 사천 사람들이 성질 급한 것은 중원 전체가 아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연소현은 별 영양가없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신이 북망산에서 내려와서, 전진기지의 인원들을 구출하고, 첫 여유가 생긴 그 순간에 당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사천당가 가주직속 첩보단체 그림자단의 단장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가는 다선랑이 포함된 투자단이 사천에서 출발하기도 전에 그림자들을 낙양에 뿌렸었군요.”
연소현이 말을 이었다.
“혹시 저와의 계약을 수락하자마자, 그 시점에서 그림자의 투입 결정이 내려졌던 것입니까?”
짝짝짝, 당귀호가 과장된 태도로 손뼉을 쳤다.
“역시 대공자! 아주 정확하십니다!”
연소현은 그의 과장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그 얼굴에서 거짓 미소부터 지워 볼까.'
“그리고 그림자단의 단장이자, 사천당가의 부가주께서 직접 행차하시다니.”
“그만큼 우리 당가에게 낙양 진출은 중요하니까요.”
연소현이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시점도 아니고, 지금 이 시점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틀림없이 북망산 황도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이 계획에 동참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겠지요.”
“물론이지요.”
당귀호는 습관적으로 호선을 그리던 눈을 슬쩍 뜨고 연소현을 바라보았지만, 그 특유의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연소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이 동참했음을 확인해야, 사천당가도 한발 더 진지하게 계획에 접근하실테니 말입니다.”
“정확해요.”
당귀호의 가는 눈 아래서, 짙은 독기를 품은 눈알이 기이한 녹색으로 빛났다.
“우리 당가는 대공자께서 약속한 대가를 치르는 것에 실패하시는 순간,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으니까요.”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오히려 진해졌다.
“만약 이번에 전대 가주들을 동참시켰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이 죄악계곡에서 실패하신다면, 우리 당가는 중경과 장강의 사업을 중단시킬겁니다.”
그가 둥지 안의 새알을 노리는 독사의 시선으로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면, 분노한 북망산의 전대 가주들은 역으로 검가의 다른 후계자와 손잡고 대공자를 물어뜯어 산산조각으로 만들겠지요.”
사천당가가 일이 그렇게 되었을 때 잃을 것이라고는, 원래부터 지체되고 있던 사업이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뿐.
그리고 만약 연소현이 성공하면, 그들은 낙양검가와 마찰없이, 낙양 진출이란 비원을 이루게 된다.
이미 획득한 아미파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들은 덤이었다.
위험부담은 적었다.
그렇기에 사천당가라는 한 지역의 패자(霸者)가 소가주도 아닌 대공자에 불과한 연소현의 계획에 동참한 것이었다.
“그러니, 제가 직접 대공자님을 지켜보며 당가의 입장을 정해야 하지 않겠나요?"
후후후, 하며 웃어 보였다.
“물론이지요. 단지….”
연소현은 자신의 종말에 대한 각본을 이야기하는 당귀호의 말에도 태연했다.
“단지?”
연소현이 괜히 자신의 찻잔을 쓰다듬었다.
“북망산 전대 가주들의 약조에 대한 확인을 하고,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진행시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당가의 입장을 결정하신다고요?”
등잔의 빛을 반사하여 번득이는 연소현의 시선이 당귀호를 향했다.
“그런 중요한 확인과 결정을 부가주께서 현장에서 직접 내리신다고요?”
연소현의 도발적인 말에 당귀호의 눈썹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이, 내가. 사천당가의 부가주이자 그림자단의 단장이, 그런 판단을 내릴 위치가 아니라고 하시는 건가요?”
순간적으로 접객실 안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것 같았다.
“아닙니다.”
연소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현 가주의 의동생이자, 부가주되시는 분이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는 판단이죠.”
당귀호의 눈썹이 다시 원위치를 찾아 움직였다.
“물론이죠. 이 당귀호가….”
하지만 연소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판단. 네, 저는 판단을 내리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연소현에게서 슬그머니 특유의 기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제가 가주라면, 판단 이후의 '결정'을 절대 정보 단체의 수장에게 맡기지는 않을겁니다.”
당귀호의 미소가 그 모양 그대로 굳었다.
“아무리 그 정보 단체의 수장이 자신이 신임해 마지않는 의동생이라고 해도.”
"...."
연소현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고 미소 지었다.
“본 대공자에 대한, 부가주님의 개인적인 호기심을 채울 기회는 충분히 제공해 드린것 같습니다만….”
연소현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 놓았다.
“이제 결정권을 가진 분을 모셔오셔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
당귀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방금 나갔던 시녀장을 통해서 이미 손님이 더 오실 것이라는 지시는 내려놓았으니, 기지 밖에 대기하고 계실 결정권자분께 전음으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
당귀호의 한없이 무거운 얼굴에서 서늘하다 못해 살을 에는듯한 기백이 담긴 시선이 연소현을 직시했다.
그것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당귀호라는 존재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천당가라는 초거대 세력의 첩보를 책임지는 당귀호의 진짜 모습이리라.
“실로 훌륭하군.”
그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물론 이쯤 되는 분이시니….”
찻잔을 내려놓은 그의 얼굴은 다시 원래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공자 개인 대(對) 사천당가라는 말도 안 되는 거래가 기적적으로 성립되었던 것이겠지요.”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그 상황에서 상대의 수를 읽어 내고, 역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이 소년은 그가 이제까지 보았던 그 누구와도 다른 인물이었다.
연소현은 눈앞에서 짧은 순간에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고, 당귀호 자신은 이제 판단을 내렸다.
이제 결정은 결정권자의 몫이었다.
* * *
잠시 후, 시녀장 정아에 의해 전진기지의 입구에서부터 안내를 받은 인물이 실내로 들어섰다.
그 인물은 연소현의 흑잠사 외투만큼이나, 희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칠혹의 외투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외투는 마치 주변의 빛을 흡수하는 것만 같았다.
“반갑소, 대공자.”
그 인물이 얼굴을 가리던 외투의 덮개를 젖히자, 신비로운 녹색이 드문드문 섞인 긴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사천당가의 가장 정순한 혈통을 상징하는 짙은 녹안(綠眼)이 연소현의 모습을 비췄다.
“본인의 이름은 당은랑(唐銀朗).”
묘령의 여인이 연소현을 바라보며 입가에 당당한 미소를 지었다.
“사천당가의 소가주라오.”
소가주, 당은랑.
그녀가 사천당가 측의 총결정권자였다.
“그리고 우선 사과드리겠소.”
그녀는 연소현이 자기를 소개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와 의연한 태도로 탁자 위에 전표를 한 장 올렸다.
범상찮은 액수였다.
“이것은 대공자를 시험한 것에 대한 사죄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오.”
흔히 사과라면서, 그 자리에서 즉시 돈을 내미는 것은, 상단 따위에서나 볼 수 있는, 품격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정중하고, 우아했으며, 그러면서도 뻔뻔할 정도로 당당했다.
“쓸데없이 말로 장황하게 사과만 늘어놓는 것보다, 더 큰 액수가 무엇보다 확실한 사과의 뜻이지 않겠소이까?”
그녀의 말에 연소현이 시원하게 웃었다.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
“사과는 받아들이겠소.”
연소현은 흔쾌히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