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편 초대(招待)받지 않은 손님
까마귀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더니, 하늘을 향해 누운자의 머리 위에 앉았다.
착지 과정에서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이 얼굴 피부를 찢었지만, 누운 자의 반응은 없었다.
시체였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부리가 콱하고 얼굴을 쪼니, 시체의 눈알이 시신경 줄기와 함께 딸려 나왔다.
고개를 쳐들고 두어 번 만에 눈알을 삼켜 버린 녀석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까만 눈알에 광장의 광경이 반사됐다.
곳곳을 화톳불과 바닥에 떨어진 횃불 따위가 환히 밝히고있는 광장은 시신으로 가득했다.
녀석이 아직 꾸물거리며, 시신 사이를 기어가고 있는 자를 포착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까마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기어가던 자의 뒤에서 검을 든 여인이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검이 번뜩이더니 등에 꽂히고, 기어가던 자의 숨이 끊어졌다.
어딘가를 향해 마지막까지 뻗었던 자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얼굴에 적의 피를 뒤집어쓴 원각정의 하녀가 시체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녀가 숨이 끊어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끈질기군.'
마약, 목속에 취한 암흑가의 조직원은 내장을 길게 늘어뜨린 채로 광장을 기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
그녀는 불필요한 감상 따윈없는 얼굴로 다음 생존자의 등에 칼을 박았다.
광장에는 그녀 말고도, 여러 인원이 횡으로 줄을 맞춰,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적들의 숨을 끊어 주고 있었다.
“적들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두거라. 우리에게는 현재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한 선임 하녀의 물음에 하녀단장 향이 연소현의 뜻을 전했다.
“따로 처리할 필요가 없다는 주인님의 명이시다.”
그 말에 뭔가 깨달은 듯한 선임 하녀였다.
“…알겠습니다.”
향의 시선이 멀리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을 향했다.
지붕의 틈, 지하실의 작은 구멍, 석조 건물의 구멍 따위로 무수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눈알들이 광장의 빛을 반사하여,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다.
항쟁을 피해서 몸을 숨겼었던 빈민들이었다.
"...."
그들의 시선이 광장에 널린 시체들을 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향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새 떼들이 하늘을 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주린 배를 채우게된 것은 새 떼들뿐만이 아니리라.
* * *
중류의 전진기지가 광장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과거 왕조 시대에 관청으로 쓰던 부지를 재활용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 부지내에 빈민들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장점으로 작용했다.
이런 장점이 없었다면, 그들이 암흑가 조직의 항쟁에서 이토록 오래 버티지 못했으리라.
“…이걸로 당장 할 수 있는 치료는 마쳤지만, 얼굴에 홍이 남을지도 모르겠구나.”
연소현이 손수 치료 후 감아 준 붕대를 매만지며 하녀단의 하녀가 미소를 지었다.
연노의 현이 끊어지며 얼굴을 강타당했던 그 하녀였다.
“저희는 언제든 주인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연소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겨우 이런 곳에서 너희를 잃을 수는 없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를 올리고 물러나는 하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너희는 더욱 성장해서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해야 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하녀가 각오를 다지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시녀장 정아가 말했다.
“급한 환자는 그녀가 마지막이었사옵니다.”
연소현의 시선이 동료의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는 전진기지의 전투인원들을 향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있었고, 누군가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지만, 누구랄 것 없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전사자들의 시신은 반드시 단 한구도 남김없이 유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말은 정아를 향한 지시가 아니었기에, 그 대답은 연소현에게 다가오고 있던 이들에게서 나왔다.
“아미타불, 저희가 직접 그들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살피겠습니다.”
자애원의 죄악계곡 책임자들인 땡중과 말코였다.
연소현과 원래부터 구면이었던 그들은 예를 생략하고, 즉시 보고를 시작했다.
“부서진 방벽에는 일단 임시로 목책을 세웠고, 부상자들의 수습도 마무리 되었습니다.”
“당장 급한 대로 전진기지의 일차적인 뒷수습은 이 정도로 하는것이 옳은 듯합니다.”
“알겠다.”
노인들은 연소현의 숨겨두었던 무위가 어쩌고 하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필요한 보고만을 할 뿐.
그들은 과거로부터 산전수전을 모두 겪어 왔으며, 현재 하류의 상황이 엄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책임자 하나는 어디 있는가?”
원래 죄악계곡의 자애원 측 책임자는 셋이었다.
“아, 그놈은...."
그때 의원들과 함께 부상자의 치료를 마친 중년인이 허겁지겁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 제가 좀 늦었습니다!”
유달리 그의 모습이 눈에 띈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색목인이었다.
“자애원의 지도자이신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숨이 차 헉헉거리면서도, 발음도 예를 갖추는 모습도 썩 그럴듯했다.
“자네가 이번에 새로이 간부로 승진했다는 그 요한이라는 자로군.”
요한이 고개를 숙였다.
예 제가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Ordo Fratrum Minorum)의 녹슨 형제단 분파의 사제 요한입니다.”
과연 그의 손에는 묵주(Rosarius)가 들려 있었다.
“사제 요한. 자네가 자네의 주를 섬김과 같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섬긴다는 것을 들었다. 자애원의 지도자인 나 연소현은 신앙의 차이를 넘어선 그대를 환영한다.”
어떤 사연인지, 출신지와 까마득한 거리까지 온 요한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앙을 넘다니요. 약 선녀님의 가르침이 주의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성인(聖人)의 발자취를 따라 봉사할 수 있으니, 그것이 참된 영광의 길입니다.”
그 말을 듣던 말코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땡중에게 말했다.
“…일신교(一神敎)의 신을 섬기는 사제가 선녀 신앙이라니. 저놈도 돌아가면 우리처럼 파문이다, 파문.”
그 말에 땡중이 상황에 맞지 않게 터질 뻔한 웃음을 참느라, 인상을 쓰고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때 전진기지의 인원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철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 보고에 땡중이 연소현에게 약간의 우려를 담아 물었다.
“…정말로 저희 전체가 철수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애초에 너희 전체를 하류의 현장에 투입하기 위해서, 내가 직접 온 것이니까.”
전진기지의 가장 높은 지붕 위에는 연소현이 가져온 거대한 대공자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연소현이 이곳에 머무는 이상, 암흑가의 조직은 절대로 직접적인 방식으로 전진기지를 노릴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낙양검가의 대공자를 습격할 수도, 경지를 짐작하기 힘든 무위를 보여준 연소현만을 무시한 채 전진기지를 점령할수도 없었다.
“자네들이 하류에 내려가서 해야 할 일은 잘 알고 있겠지?”
자애원의 책임자들이 누구랄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애원에 협조적인 빈민들을 끌어모으고, 규합해서 질서를 되찾아야지요.”
“저희가 직접 가면, 약탈을 저지르고 있다는 폭도 무리를 충분히 설득해 해산시킬 수 있습니다.”
연소현이 지시를 따로 내리지 않아도, 그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꿰고 있었다.
유능한 이들이었다.
“좋아.”
연소현이 슬쩍 별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헤아렸다.
“지금쯤이면, 중류에서는 암흑가의 조직들이 전부 후퇴했겠군.”
때마침 강행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일령의 전음이 들려왔다.
[주인님, 퇴로의 안전이 확보되었사옵니다.]
“철수를 개시하라.”
연소현은 그들에게 자애원 책임자 전원이 한 곳에서 고립된 것을 책하지 않았다.
이 상황은 예외로 둘 만큼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고, 책임자들 스스로가 충분히 반성을 하고 있을것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지도자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들은 군말 없이 즉시 움직임을 시작했다.
“철수! 철수한다!”
연소현이 넉넉하게 끌고 온 장갑 마차의 행렬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정도로 전진기지의 인원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사제 요한.]
연소현의 전음에 막 마차에 올라 타려던 요한이 뒤를 돌아보았다.
[화북(華北)에서 화기(火器)는 군(軍)만이 전용할 수 있도록 통제되고 있지.]
놀란 표정의 요한이 자신의 품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필요한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사용하게. 내가 얼마든지 책임을 져 줄 터이니.]
그 전음에 요한은 연소현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하녀단 또한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긴 채, 행렬의 뒤를 경공으로 따랐다.
행렬의 인도는 일령이 담당했다.
그 행렬이 광장을 벗어나는 것을 마지막까지 눈으로 좇은 연소현이 정아에게 말했다.
“…기지 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다오. 오가는 이가 없는 곳으로.”
정아가 급히 그를 안내했다.
용안을 통해 이미 연소현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던 그녀였다.
“대공자님.”
삭막한 목소리에 연소현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당백이 있었다.
“저도 시녀장과 함께 호법을 서겠습니다.”
잠시 연소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감정이라고는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당백의 눈에서 무언가 읽어낸 것일까.
싸늘한 계곡 바람이 스쳐지난 후, 연소현의 입이 열렸다.
“…허락한다.”
* * *
과거 관청의 일부였던 건물의 가장 깊숙한 곳에 연소현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후우우….”
그의 옆에는 호롱불 하나가 타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전혀 주변을 밝혀 주고 있지 못했다.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온 검은 기운으로 주변이 온통 왜곡되고 뒤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가 당장에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의 한계 지점이군.'
내공이 유한한 것은 상식 수준에서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연소현의 경우는 조금 더 특수했다.
[어째서 그들을 먹어 치우지 않았지? 지금이라도 배를 채우지 않으면, 이대로 아사할지도 모른다고?]
[어리석은 연자로군. 그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금속이 갈리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속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들은 당장에라도 연소현의 내부를 찢고 밖으로 기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아, 저희의 원한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이 고통을 그들에게 제발 갚아 주소서!]
비통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제암진천경이 보여 주는 원혼들의 환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후우우….”
연소현은 소모되어 줄어든 내공만큼 반대급부적으로 들끓는 마기를 억눌렀다.
그는 자신이 개량한 양의심법을 극한까지 운기행공 중이었다.
그의 심상 세계에서는 가느다랗게 줄어 버린 양의심법의 내공이 비명을 지르듯 백열하며 그의 정신을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있었다.
내공이 소모된 만큼, 그의 정신에 대한 보호도 약해진 것이었다.
“후우우….”
하지만 이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부의 깊이와 정신력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러 결국 무아지경에 빠져들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상단전이 열리며, 정신이 강제로 명경지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몸에서 흘러넘치던 마기가 점차 멎어들기 시작했다.
"...."
그것은 감히 연소현, 그만이 할수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기예였다.
* * *
연소현이 있는 건물의 옥상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는 당백의 날카로운 시선이 번뜩이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지붕 아래서 기이하고도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졌었지만, 그는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을 뿐.
"...."
오히려 그는 감각과 기세를 한층 돋우어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경계를 강화했다.
'신뢰인가…?’
그 모습을 잠시 용안을 통해 바라보던 정아가 생각했다.
'…무언가 그에게 주인님과 통하는 것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용안을 개안한 이후, 이제까지 관측한 이들 중 가장 무거운 입과 단단한 정신을 가진 이가 바로 당백이었다(물론 자신의 주인을 제외하고).
"...."
게다가 주인이 허락한 호법이었으니.
그렇기에 정아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않고 연소현이 운기하고있는 건물의 입구를 지킬뿐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서 황금빛으로 번뜩였다.
[정체불명의 인원 접근중!]
그녀의 전음과 동시에, 당백의 소매가 펄럭였다.
세 자루의 시커먼 비도가 빛살이 되어 정아의 시선이 향하던 곳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어이쿠.”
아니, 꿰뚫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이런. 역시 그 대공자님답게, 수행 인원부터가 예사롭지가 않군요.”
남성의 나긋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기운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
당백이 투사한 비도 세 자루가 허공에서 튀어나온 듯한 손에 붙들려 있었다.
무언가의 가죽으로 만든 기이한 광택의 장갑이었다.
그 장갑을 한눈에 알아본 당백의 안색이 변했다.
“광량녹피(曠亮鹿皮)…?!”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그의 안색이 변할 정도로 그 장갑의 주인은 놀라운 사람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당백.”
마치 기둥 뒤에서 나타나듯,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년인이 당백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의 인상은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요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중년인의 얼굴을 확인한 당백이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찌푸리며 말했다.
“어째서 당신께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상대의 대답에 정아 또한 표정이 변했다.
“마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군요. 이 '사천당가의 부가주', 당귀호 (唐鬼狐)가 낙양에 있는 것이 그렇게도 이상한가요?”
정아는 당백이 잠시 흔들린 사이, 그의 표층으로 올라온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부가주, 당귀호. 사천당가 가주 직속 첩보단체, 그림자단의 단장.'
정아는 속으로 침음했다.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될 상대.'
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비록 적이 아니었지만, 아군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