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69화 (169/350)

제19편 죄악(罪惡)이 고여 드는 곳

“본 대공자와 대화를 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나서라.”

연소현이 삼오통방의 적갑저를 터트려 버리고 나자, 당장에 섣불리 나서는 이가 없었다.

"...."

연소현이 보여준 무위에 경악한 것은 전진기지의 인원들 또한 마찬 가지였다.

[대공자께서 저런 무위를 보유하고 계셨다고? 자네는 알고 있었나?]

땡중이 전음을 날리자, 말코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랐던 일일세.]

땡중은 목에 걸려 있던 염주를 벗어 들고 염불을 외웠다.

[...아미타불. 무녀들의 말대로, 정말로 대공자께서 '암의도편본(巖叶陶片本)'에서 일컫는 '그분'이라는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땡중과 말코, 자애원의 상급 간부이자, 죄악계곡의 자애원 책임자들은 무녀들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큰스님. 큰도사님.”

그때 대공자가 보여 준 무위의 중격에서 벗어난 이들이 두 사람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저희에게도 사정을 설명해 주시지요.”

"아까 들었던 저들이 검가의 대행자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말코, 보통은 큰도사님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이가 한숨을 쉬었다.

자애원의 지도자이자 지주(支柱)인 연소현이 먼저 인정을 했으니, 그들 또한 입을 다물고 있을 이유는 없어졌다.

“…낙양에는 빈민가들이 들끓고, 빈민가에는 필연적으로 암흑가가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정도는 다들 알걸세.”

땡중, 큰스님이라고 불리는 이가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그 빈민가 중에 오흉이라 불리는 최악의 빈민가 다섯 곳은 제각기 빈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요.”

“그런 오흉에는 암혹가의 조직들 또한 더욱더 들끓을 수밖에 없지.”

그것은 오흉 중 하나인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이 죄악의 골짜기에 빈민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암흑가 조직들이 이 난리를 치는 이유는 이제 다들 아실 겁니다.”

기지가 건설되고 몇 주간 근무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

죄악계곡은 낙양뿐만 아니라, 하남성 전체에서 유명한 마약, '목속(妹粟)'의 원재료가 나는 산지였으며, 동시에 그 가공 지역이기도 했다.

그 가공 과정은 목숨을 잃는 자들이 속출하는 위험하고 저급한 일자리였다.

그것은 유통 쪽도, 판매 쪽도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가공에서부터 유통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그것도 일자리라고 빈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북방 전쟁 이후, 빈민들이 유례없이 넘쳐나게 되자, 암흑가로 인한 문제도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말코가 음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검가의 누군가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지.”

없앨 수 없는 암흑가라면, 오히려 앞장서서 통제하고 이용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

아미타불, 씁쓸하게 불호를 외운 땡중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게 이 낙양에는 암흑가가 검가의 묵인 아래 날뛰게 된 것이지요.”

* * *

한동안 자기들끼리 전음을 주고 받거나 쑥덕거리던 암흑가의 조직들이었다.

"으, 흐흠!"

결국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부방주를 잃은 삼오통방 대신 흑강패의 부패주가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감히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는 삼오통방의 적갑저가 터지는 꼴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연소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것도 모자라, 수하들 뒤에서 외쳤다.

“허락한다.”

깃발 위에서 연소현이 답하자, 그가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외쳤다.

“혹여나 상납금을 따로 원하신다면, 저희 흑강패에서는 얼마가 되었든지 바칠 요량이 있습니다!”

연소현에게 따로 선을 대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 말에 다른 두 조직에서도 간부들이 급히 손을 치켜들고 외쳤다.

“저, 저희 삼오통방도…!”

“백골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소현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

“상납금이라고?”

뒤따라 외쳤던 양 조직 간부들의 머리가 그대로 터졌다.

“…히익?!”

가장 먼저 상납금에 대해 외쳤던, 흑강패의 부패주가 기겁하며 수하 뒤로 숨었다.

하지만 그가 몸을 피했던 그 수하의 몸을 통해 연소현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어?”

수하의 몸에는 딱 어른의 주먹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흑강패의 부패주는 자신의 가슴팍에도 딱 그만한 구멍이 뚫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리가 좀 멀다고 안심했던 것인가.

“후우….”

연소현이 뻗었던 일권을 거둬들이며, 길게 호흡을 다스렸다.

소림의 절기, 백보신권(百步神拳)이었다.

“으 으악?!”

죽어 나자빠진 간부들 근처에 있던 조직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는 모습이 연소현이 내려다보는 시야에 들어왔다.

“상납금이라니, 불쾌하게 하는구나!”

연소현의 목소리가 광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본 대공자를 너희 같은 뒷골목 건달들의 금화를 받을 정도로 타락한 자라 본 것이더냐?!”

도가의 사자후가 광장을 넘어 멀리 양쪽 절벽까지 부딪혀 메아리치자, 담이약한 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애초에 대화를 할 정도로 수준을 갖춘 자는 없는 모양이구나.”

연소현이 그런 그들을 조소하며 말했다.

“이전에 암천존자라는 자가 이 계곡을 쓸어버려, 이 계곡이 무주 공산이 되었었지.”

연소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놈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노리고 있을 테고.”

연소현이 좌중을 둘러보며,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틈을 찔러볼 때였다.

“결국에 너희가 원하는 것은 이 공자놈의 '검가동패'렷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광장에 가득한 이들 사이로 간부가 분명한 자들의 얼굴이 굳어 버리는 것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역시 그랬나.'

연소현은 이공자를 결코 이름이나 동생으로 칭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공자는 이공자일 뿐, 가족 중에 동생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둘째로 여기지도 않았으며, 괜히 이름으로 부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대공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누군가 제 발이 저려 한발 늦은 답변을 했다.

연소현이 다시 한번 낚싯줄을 드리웠다.

“이 계곡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한 조직에게 이공자 놈이 충성을 대가로 검가동패를 약속한 것을 알고 있다.”

"...."

"...."

그 말에 몇몇 간부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사나워졌다.

내막을 알고 있는 상급 간부들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모두 지켜본 연소현은 확신을 얻었다.

과거 난데없이 검가동패를 가지고 있던 흑골파의 금주.

아무리 낙양검가가 썩었다지만, 인육을 취급하는 암흑가의 거대 조직이 검가동패를 가지고있는 것을 봤을때, 설마하던 연소현조차 속으로 침음을 했을정도였다.

그리고 연소현은 그동안 자신이 세웠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정보를 현월각으로부터 수집해 왔다.

그리고 오늘의 문답으로 이제 그 전말이 그에게 보였다.

’…이렇게 암흑가를 운용하는 방식은 역시 '그 여자'가 아니고서는 나오질 않았겠지.'

북부 전쟁 이후, 낙양검가의 암흑가를 통제하고 이용하는 교리가 성립된 배후에는 그 여자가 있는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신다면, 어째서 대공자가 우리를 이토록 핍박하시는지 모르겠소!”

저 멀리, 광장 끝에 있는 건물의 옥상에서 들려오는 내공이 담긴 외침이었다.

“대공자는 이공자님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 것인가?!”

“검가가 이 일을 기억할 것이오!”

각기 다른 방향의 광장 끝 건물 옥상에서도 내공을 담은 외침들이 들려왔다.

'이 항쟁의 현장 지휘관들이군.'

위치 파악은 끝났다.

연소현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세 번 튕겼다.

석조 건물 옥상의 두꺼운 담벼락 뒤에서 엄폐하고서, 내공을 담아 외치던 현장 지휘관들.

각기 안전한 위치에 있던 세 조직의 현장 지휘관들의 머리통에 일제히 구멍이 뚫렸다.

그들의 시신들이 엄폐하고 있던 담벼락에 늘어지며, 구멍 뚫린 머리통에서 흘러나온 피가 길게 선을 그렸다.

각각의 담벼락들에는 딱 손톱만 한 구멍들이 동일한 형태로 생겨 있었다.

백보신권과 함께 소림의 칠십이종 절기 중 하나, 탄지신통(弾指神通).

“지, 지휘관께서 당했다!”

각 조직에서 현장 지휘부로 사용되던 건물의 옥상에서 소란이 일었다.

"...."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조직원들은 이제 그저 마른침을 삼키고, 식은땀이나 흘리는 것밖에 할 것이 없었다.

깃발 위의 연소현이 껄껄 웃었다.

“더 짖어 볼 자가 있느냐?”

"...."

그때 상급 간부 하나가 불현듯이 깨달았다.

“…저, 저자가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었다!”

그가 비명처럼 외쳤다.

“저자가 노리는 것은 처음부터 조직의 간부들이었-!”

그의 머리통이 터졌다.

연소현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길게 그어졌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느냐?”

그가 손을 들자, 은신(隱身)과 잠형(潛形)으로 광장에 녹아들었던 당백의 수족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쳐든 손에는 단도가 들려있었다.

그 예리하게 휘어진 날의 끝부분에는 희생자의 경동맥에서부터 치솟은 핏줄기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일신의 공부가 상당해,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한 간부들도 있었지만, 이미 그들의 혈관에는 죽음을 품은 극독이 달리고 있었다.

“후, 후퇴!”

살아남은 어느 조직의 간부 하나가 절규하듯이 외쳤다.

“후퇴하라!”

그는 자신의 조직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었지만, 그 반응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전체에게서 터져나왔다.

“도, 도망쳐!”

“퇴각이다! 퇴각!”

자빠지는 자도 있었고, 구르는 자도 있었다.

심지어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망을 치는 이도 있었다.

조직을 불문하고, 조직원들이 개미 떼처럼 상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리고 있던 자가 있었다.

후퇴를 위해서 상류로 향하는 도로로 몰려들던 이들의 머리 위에 사신(死神)이 등장했다.

냉막한 얼굴의 중년인, 당백이었다.

사천당가 오의(奧義),

만천화우(滿天花雨).

하늘에서 죽음의 비가 내렸다.

수백 개, 어쩌면 천 개가 넘는 우모침(牛毛針)이 쏟아져 내렸다.

우모침이 손끝을 스쳤든, 허벅지에 박혔든, 이마를 찢었든, 상관없었다.

혈관을 타고 달린 독이 그들의 근육을 마비시키고, 숨통을 조이고, 심장을 멎게 했으니.

광장에서부터 도로에 들어섰던, 들어서려던 수많은 적들의 목숨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시체들을 넘어 광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의 손에서 사슬낫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돌입하겠사옵니다!]

하녀단장, 향의 전음과 함께 철갑요새가 광장으로 치달았다.

일령의 수색 안내를 받아 우회로를 찾은 대공자의 행렬이었다.

"------!!"

무엇이 철갑요새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피 칠갑을 한 영물들이 울부짖으며 광장에 길게 피의 강을 만들었다.

“응전해! 응전하라고!”

“등을 보이지 마라!”

그때야 정신을 차린 몇몇 간부들이 떠들어 봤지만, 이미 너무많은 지휘 전력을 잃은 광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철갑요새를 뒤따라 들어온 장갑 마차의 행렬이 전진기지를 빙둘러 정차하고는 철시를 쏟아부었다.

행렬에서 튀어나온 하녀단의 하녀들이 혼란에 빠진 채 후퇴하는 적들의 등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그럼에도 적들은 너무나도 많았고, 죄악계곡에 골목은 무수하게 뚫려 있었다.

그들은 바퀴벌레처럼 골목골목으로, 구석구석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지하 통로로, 지하 수로로, 미로와 같은 뒷골목으로 스며들듯이 도주했다.

[광장을 넘어선 추격은 금지한다!]

연소현의 지시에, 모두가 아직 광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이들을 도살하는 것에 집중했다.

아비규환에 빠져든 적들의 비명들을 들으며, 연소현은 저 멀리, 죄악계곡의 상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

중류를 넘어서 상류로 접어들며, 경사는 급격하게 높아졌다.

거리의 풍경은 한낱 빈민가가 아니라, 일견 요새와 같은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은형산의 거대한 바위 절벽이 있었고, 바위 절벽 아래에는 개미굴처럼 무수한 바위굴들이 있었다.

요새 같은 지형에 보호받는 그 바위굴들이, 바로 암흑가의 본거지였다.

'오늘의 승전은 분명한 쾌거이지만….'

하지만 내일이면 거짓말처럼 저들의 세력은 다시 불어나기 시작하리라.

이곳에는 수만의 빈민들이 있었고, 또 이곳으로 모여드는 빈민들은 끊임이 없었으니.

깃발 위에 선 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암천존자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흑골파가 사라진 영역에서는 백골파가 자라났고, 암천존자가 쓸고 지나갔던 죄악의 골짜기에는 다시 죄악이 고여 들었다.

암천존자는 심판을 내릴 수는 있어도, 세상을, 그 체계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 연소현이 여기 온 이상, 이제 이 죄악계곡에서 암흑가에게 다음은 없다.'

그 시점에서 암천존자의 죄악계곡 정리는 계획상 필수불가결한 일이었고, 언제나처럼 그의 계획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깃발에서 내려선 그가 미련없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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