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편 돌파(突破)
죄악계곡의 풍경은 일반적인 빈민가와 크게 달랐다.
판잣집과 움집 따위로 뒤덮인 일반적인 빈민가와는 다르게, 죄악계곡은 빡빡하게 들어찬 건물들로 가득했다.
그것은 이전 왕조 시기 이전부터, 이 지역이 은형산 자락의 유서깊은 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죄악계곡은 과거에 지어졌던 석조건물을 바탕으로, 그 위에 빈민들이 위태로이 쌓아올린 목조 건축물들로 빡빡하게 들어차있었다.
그렇기에 이 지역에는 포석이 깔린 도로가 남아 있었고, 그 도로 위를 대공자 연소현의 행렬이 달리고 있었다.
카카카칵-!
하지만 그 길은 끊임없이 증축과 개축을 반복한 구조물들로 좁아져 있었고, 일반 마차보다 훨씬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철갑요새의 옆면이 건물들의 옆면을 긁으며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에 도로 방향으로 튀어나와 있던 목조 건축물이 철갑 요새에 걸렸다.
콰드드득!
경사진 오르막을 달리고 있다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철갑요새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오히려 목조 건축물 쪽이 끌려나와 팽개쳐지듯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방에 장애물.]
시녀장 정아의 전음에 우마차의 고삐를 쥔 하녀옆에 앉아있던 하녀단장 향이 외쳤다.
“충격 대비!”
거대한 영물들이 가죽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 근육과 핏줄을 꿈틀거리며, 도로를 막고 있던 담벼락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굉음과 함께 두꺼운 담벼락이 포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
검둥이와 누렁이가 허연 콧김을 뿜으며 길게 울부짖었다.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던, 향이 전방을 확인하고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계곡 중류 진입! 전방에 적 확인했습니다!”
행렬은 세 개의 암흑가 조직이 항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에 진입했다.
단말마.
살의.
난무하는 무기들.
허공에 뿜어지는 더운 선혈.
암흑가의 조직원이 다른 암흑가 조직원의 배를 쑤시고, 또 다른 조직원이 그 뒤에서 등을 찌르고 있었다.
오르막을 따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암흑가의 조직원들이 적대 조직원들과 뒤엉켜 있었다.
골목골목마다 쏟아져 나오는 이들로 가득했고, 거리에는 이미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것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사격 개시!”
하녀들이 철갑요새 위에 장치된 연노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매서운 파공성과 함께 조직원들이 두 명, 세 명씩 철시에 꿰뚫렸다.
철시와 함께 벽에 박혀 버린 자도 있었다.
순식간에 길을 막고있던 수십 명이 신체 부위에 구멍이난 채 나자빠졌다.
그렇게 철시가 쉴 새 없이 거리를 가로질렀지만, 적들의 수는 너무나 많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돌파합니다!”
향의 외침과 함께, 인간으로 만들어진 벽을 눈이 시뻘게진 두 영물이 들이받았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피보라가 흩날리며 바닥과 벽을 덧칠했고, 사방으로 산산조각이 난 인간의 신체 부위들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
두 마리의 영물이 끄는 강철의 우마차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완성된 파괴 병기였다.
철갑요새는 그렇게 바닥에 피와 시신 조각의 강을 만들며, 거침없이 내달렸다.
“칫!”
하녀단장 향이 혀를 찼다.
그 강렬하고 끔찍한 모습에 위압을 당해야 마땅했건만.
암흑가의 조직원들은 물러나기는 커녕, 심지어 철갑요새의 정면으로 달려드는 정신이 나간것 같은 자들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적들은 약에 취해있다! 다들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말고, 일검에 목숨을 끊어라!”
그때 건물의 위에서 칼을 쥔 조직원들이 철갑요새 위로 뛰어내렸다.
향과 하녀들의 검이 번뜩였고, 시체들이 떨어져 철갑요새에 튕겨 바닥에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었다.
옥상에서는 사공자의 수하들이 귀신처럼 달리며 경로상의 적들을 파리떼처럼 잡아내고 있었지만, 적들은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었다.
“큭!”
뒤를 따르던 장갑마차 한 대가 미끄러지며, 좌우의 벽면에 격렬하게 부딪치더니 결국에 멈춰 서고야 말았다.
바닥에 넘쳐 나는 시신이 바퀴의 축 등에 뒤엉켜 끼어 버렸던 것이었다.
그 뒤를 따르던 두 대의 장갑마차가 제동장치를 끝까지 당겼지만, 결국 추돌하고서야 멈춰섰다.
급박한 전음들이 어지러이 오갔다.
[장갑마차 세 대 정지! 피해 상황 확인 중!]
[전력 손실 무(無)! 정차한 장갑 마차에 응급조치가 필요!]
[지원을 요청합니다!]
"...."
옥상에서 그 모습을 확인한 사공자의 최측근 당백이 신영을 멈춰세웠다.
동시에 그의 앞에 서 있던 적들이 일제히 피 보라를 흩날리며 나뒹굴었다.
'전장에 돌입하는 순간 계획은 무의미하고, 상황은 끊임없이 급변하기 마련이지.’
그의 시선이 지시를 기다리듯이, 여전히 앞서 달리고 있는 철갑요새를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이 고정되기도 전에 대공자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당백! 선두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자네는 단독으로 적들을 제압하고, 장갑마차들이 행렬에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라! 나머지 수족들은 계속해서 옥상을 제압하며 선두 행렬을 따르게 한다!]
신속하고 정확한 상황 판단.
그 판단을 기반으로 단호하고 기민하게 내려지는 가장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의사 결정.
'훌륭하군.’
당백의 굳어 있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피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 미소였다.
그의 신형이 귀신처럼 허공에 스며들며, 멀리 뒤떨어진 장갑마차들로 향했다.
* * *
시녀장 정아가 예고했던 대로, 멈춰 선 장갑마차들이 처한 상황은 전술적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바닥에 떨어진 당과에 끊임없이 꼬여드는 개미들처럼, 암흑가의 인원들이 장갑마차들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적들을 막아라!”
쉴 새 없이 발사된 철시가 적들을 꿰뚫고, 마차를 보호하는 하녀단의 하녀들이든 검이 번뜩이며, 몰려드는 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사이에 임무를 맡은 하녀들은 마차의 축과 바퀴에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쏴라! 퍼부어라!”
지나치게 많은 철시를 단기간에 쏟아내던 장갑마차의 연노 하나가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팅!
끊어진 현에 얼굴을 강타당한 하녀가 피를 흩뿌리며 뒤로 넘어지는 것을 동료 하녀들이 붙잡았다.
“전부 죽여!”
하녀단장 향에 의해서 임시 지휘권을 이양받은 선임하녀가 마차 위에 서서 악귀처럼 외쳤다.
"...!"
그녀는 자신의 옆에 무언가 나타나자, 반사적으로 내공을 담은 팔 꿈치로 가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팔꿈치는 허공에 멈췄다.
흑의 그리고 특유의 삭막한 얼굴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당백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금속음이 들려오는 그의 두 손으로 향했다.
검은 사슬들이 구불거리며, 그의 소매로 빠르게 되감기고 있었고, 마치 자석이 붙는 것처럼 두 자루의 사슬낫이 그의 양손에 돌아와 잡혔다.
그의 쌍겸(雙鎌) 끝에서는 핏방울이 흘러, 마차 지붕에 떨어지고 있었다.
"...."
그리고 선임하녀는 사위가 침묵속에 잠겨든 것을 깨달았다.
격한 금속음도, 피육이 찢어지는 소리도, 하녀들의 기합도, 적들의 괴성도, 연노들의 현이 튕기는 소리도, 비명도 없었다.
당백에게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두 눈에 사위를 가득 메우고있던 적들의 머리통이 일제히 분리되는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피와 살점이 찢어지고 흩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한발늦게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모든 적의 신형이 허물어져 내렸다.
가까이 있던 자들은 모두 머리를 잃었고, 멀리서 몰려들던 자들은 머리에 비도가꽂혀 나뒹굴고 있었다.
당백이 사슬에 메인 낫을 놓고, 한 손을 들자, 시신들의 머리에 박혀 있던 수십 자루의 비도들이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벽을 넘은 고수.
당가의 혈풍차사(血風差使).
차마고도의 수급수집가(首級地集家).
이것이 당백이었다.
“빠르게 정비를 마치고 합류하라는 대공자님의 지시가 있었다.”
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선임하녀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적들은 맡기고, 우리는 전원 정비에 전념한다!”
* * *
다시 달리기 시작한 세 대의 마차 선두에는 당백이 있었다.
사슬이 출렁이며, 옥상에서 기습을 준비하던 이들의 목들이 부러져 나갔다.
그가 벽을 타고 달리며, 손을 내젓자, 회수되던 사슬낫이 그대로 길을 가로막던 이들의 목들을 수확했다.
사슬낫의 궤적 밖에있던 이들의 머리통은 단도에 꿰어져 뒤로 나뒹 굴었다.
머리들은 주인을 잃고 허공에 떠올랐고, 몸통들은 피를 흩뿌리며 자빠졌다.
당백이 선도하는 경로상 모든 적이 죽음을 맞이했다.
“...!"
그때 벽면을 질주하던 당백이 기척을 감지하고, 반대편 옥상으로 자신의 신형을 튕겨 올렸다.
그가 회피한 방향의 골목에서 우마차를 앞세운 행렬이 쏟아져나와, 오르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앞서서 가버린 줄 알았던 대공자의 행렬이었다.
그들은 정지할 수 없었기에, 복잡한 골목을 '口' 자로 크게 돌아, 이탈했던 세 대의 장갑마차를 행렬에 다시 합류시킨 것이었다.
[수고했다, 당백.]
대공자의 전음에 당백이 무뚝뚝하게, 하지만 즉각적으로 답했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갑마차 하나에 올라타, 가부좌를 틀고 즉시 호흡과 기를 가다듬었다.
내가기공을 연속적으로 쓰며, 마차 속도 이상의 신법을 계속해서 사용했던 그였기에, 재정비하기 딱 좋은 시기였다.
그가 몇 호홉 만에 내기를 다스리는 사이, 용안으로 전방을 파악한 정아가 연소현에게 고했다.
“전방에 지도상에 없던 건물들이 있사옵니다.”
전장에 돌입하는 순간 계획은 무의미하고, 상황은 끊임없이 급변하기 마련이라던 말처럼, 또 한 번의 변수가 등장했다.
사업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중류의 지도가 갱신이 늦었거나, 오류가 있었던 것이었다.
“철갑요새라면 '충분히' 건물들을 뚫고 지나갈 수 있겠지만, 뒤를 따르는 장갑마차들은 남은 잔해를 넘지 못할 것이옵니다.”
"...."
대공자 연소현이 가부좌를 풀고 반개하고 있던 눈을 떴다.
[일령!]
그의 부름에 바로 뒤의 장갑마차에 탑승하고 있던 일령이 답했다.
[예, 주인님. 하명하시옵소서!]
낮에 원각정을 떠나는 이공녀를 배웅하고, 보급을 위해 원각정으로 돌아왔던 행렬을 통해 합류했던 그녀 였다.
[전방이 막혔다. 네가 직접 육안으로 새 경로를 찾아 행렬을 이끌어라.]
[충!]
일령의 신형이 마차 창문을 통해 뛰쳐나오더니 도로 양쪽 벽면을 박차고 옥상으로 튀어 올랐다.
마치 몸에 걸치고 있는 갑주의 무게가 없는것처럼 잽싼 몸놀림이었다.
옥상에서 앞을 막던 적들이 허물어졌고, 그녀는 순식간에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올라섰다.
[전 행렬은 일령의 인도를 따른다!]
연소현의 명에 행렬이 일령이 보내는 수신호에 따르기 시작했다.
“전진기지의 위치는?”
연소현의 물음에 지도를 보던 정아가 답했다.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건물들을 넘어서 진행 방향으로 직진하면 전진기지가 위치한 광장이 보일 것이옵니다.”
그 답변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일령의 수신호에 따라 행렬이 도로를 막고 들어선 건물들을 우회하여 꺾는 순간, 우마차 위에 서 있던 연소현의 신형이 허공으로 사라지다시피 움직였다.
높은 건물의 지붕 위에 착지한 그의 손에는 우마차의 지붕 위에 꽂혀있던 거대한 대공자 깃발이 들려 있었다.
계곡에서 거칠게 불어 내려오는 바람에 대공자 깃발이 찢어지듯 휘날렸다.
곧 그의 주변에 당백과 그의 수족들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좋아.”
연소현이 깃대를 잡고 있던 손을 털자, 휘날리던 깃발이 거짓말처럼 깃대에 감겨들었다.
그것은 이제 깃발이 아니라, 하나의 강철봉이 되었다.
연소현이 시선을 멀리 던지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진기지까지 최단거리로 돌파한다.”
“충!”
당백과 그의 수족들이 서슬 퍼런 기백을 흩날리며 일제히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