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65화 (165/350)

제15편 형제(兄弟)

죄악의 골짜기, 임시 지휘 천막.

“고, 공씨 가문이라고?!.

“황도십육가문 중 공씨 가문 말인가!”

놀라운 소식에 좌중이 웅성이고 있는 사이에서, 곽 노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대공자께서 공씨 가문을 움직인것인가? 화재에 대한 정보는 현월각을 통해서 북망산에서 이미 받았다고 해도, 어떻게 고작 화재 따위에 공씨 가문을-?!’

그때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인원이 지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저, 저분은?!”

그 가장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기 검가의 대공자가 계신다고 들었는데…, 아! 저기 계셨군!”

좌중이 썰물처럼 좌우로 비켜서서, 그가 연소현에게 다가갈 수 있게 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탄탄한 체격을 유지한 그가 연소현의 앞에 다가와 인사했다.

“검가의 대공자를 뵙소. 본인은 청효라고 하오.”

“이 자리에 설마 청 대인을 못 알아보는 이가 있겠습니까. 저는 연소현이라 합니다.”

연소현이 당당하게 그를 마주 보며, 정중히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설마, 이런 일에 청씨 가문의 가주께서 직접 나서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 성미 상 가만히 뒤에서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어서 말이오. 이웃에 큰일이 났다는데, 일단 돕고 봐야 할 것이 아니겠소?”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지휘부의 인원들.

그리고 연소현까지도 속으로는 놀라고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청 대인이라 불린 그는 과거부터 청렴과 공정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이었으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서슬 퍼런 판결로 이름 높았던 명판관이었다.

은퇴한 지금도 낙양의 명사(名士) 중의 명사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게다가 그의 가문인 청씨 가문부터가 그런 명판관들을 대대로 배출 해온 낙양의 명가이기도 했다.

'과연 공 어르신께서 큰소리까지 쳐가며, 든든한 지원군을 약속하시더니….'

연소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 청씨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들에서도 이렇게 힘을 아끼지 않고, 훌륭한 분들을 보내 주셨소.”

상황이 급박했기에, 청 대인과 함께 온 각기 다른 가문의 책임자들은 연소현과 간단히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대공자. 급한 대로 우리가 데려 온 인원들은 이미 투입했소. 그들은 계곡의 가장 아래쪽에서부터 진화를 시작했으나, 만일 재배치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그가 가슴을 두드리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청 대인.”

연소현이 순식간에 판단을 끝냈다.

“허나, 재배치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괜히 지휘 체계가 다른 인원들을 이런 상황에 섞어 봐야, 혼란만 가중되겠지요.”

연소현이 가벽에 붙은 지도를 가리 켰다.

"청 대인께서 지휘하시는 인원들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치고 올라오면, 우리 쪽 인원들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내려가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곽 노인은 재빨리 주변에 지시를 하달했다.

화재 현황판이 갱신되고, 새로운 상황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며, 현월각의 요원들은 현장에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천막을 튀어 나갔다.

“…과연!”

슬쩍 지휘 천막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청 대인이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지휘부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군. 판단 또한 정확하다. 과연 공 어르신께서 극찬할 만한 인재인가….'

“곽 노인!”

연소현에게 답하는 곽 노인의 태도가 한결 더 정중했다.

“예! 대공자님!”

연소현이 물었다.

“다음 문제점은 무엇인가?”

곽 노인은 편한 마음으로 가감없이 더 어려운 문제를 꺼내 들 수 있었다.

“대공자께서도 아시다시피, 원래 이 죄악계곡은 동서로 두 개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습니다.”

연소현이 바로 핵심을 짚었다.

“그 두 개의 행정구역을 책임지는 관료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말이겠군.”

“그렇습니다!”

낙양 최대 번화가 중 하나인 탄륭구(坦隆區)와 가효구(佳孝區)의 북부 지역이 바로 죄악계곡이었다.

그 양쪽 구역의 구장(區長)들은 지금 죄악계곡의 화재 진압에는 손을 놓고 있었다.

그저 죄악계곡의 화재가 번화가로 넘어오지 못하게, 방화선만을 구축하며 방관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죄악계곡은 양쪽의 절벽으로 막혀 있으니, 방화선만 구축해두면, 최악의 경우라도 죄악계곡의 빈민가만 전소(全燒)되고 끝날 일이라는 태도였다.

“그 또한 걱정할 필요 없다.”

“예…?!”

연소현의 미소에 곽 노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대공자의 말이 맞소.”

지켜보던 청 대인이 다시 한번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그쪽에도 대공자의 요청을 받아 공 어르신께서 파견한 인물이 도착했을 것이오.”

* * *

“어, 어르신! 이 앞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비켜라! 이놈!”

벼락같은 호통을 치는 덩치 큰 노인의 입에서는 마치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감히 네놈이 뭣이라고 이 공요(孔曜)를 막는 것이냐?!”

노인은 자신을 막는 중급 관리를 걷어 차버리고, 화려한 문짝을 벌컥 열어젖혔다.

“감히 누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두 구장들은 처음에는 벌컥 화를 내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 공요 어르신?!”

“어르신께서 여기는 무슨 일로…!”

공요라 불린 노인, 공량의 동생 공요가 그들이 벌이고 있던 술판을 보고 얼굴을 귀신과 같이 일그러뜨렸다.

“구를 책임지는 구장이라는 자들이, 자신들의 구역에 화재가 일어 났는데 술판을 벌여…?!”

구장들이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어르신! 오해입니다!”

“저희는 이미 방화선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웬만한 인물이었다면, 코웃음을쳤을 구장들이었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공요는 공씨 가문의 전대가주(로 알려진 현 가주)인 공량의 동생이기도 했지만, 그 본인부터가 중원국 전체에 이름난 인물이었다.

그는 황궁에서 대학사(大學士)를 역임하고, 현 황제의 어릴 적 태자태사(太子太師)였으며, 현재 낙양에 위치한 공씨 대서원(大書院)의 총 책임자였으니.

“죄악계곡은 자네들의 구역이 아니고 뭔가?!”

“아니, 그것이….”

두 구장이 난감한 듯 시선을 잠시 교환했다.

“아무래도 저희 판단에는 번화가를 지키는 것이 먼저라….”

“게다가 죄악계곡의 행정 권역이 아무래도 좀….”

공요가 이를 가는 소리에도, 어째서인지 두 구장은 화들짝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내, 청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라, 자네들이 해야 했을 일을 해 달라는 것뿐인데….”

노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이 공요가 직접 손을 써야 움직이겠다는 말이로군…!”

그쯤에 이르자 결국 두 구장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르신! 고정하시지요!”

“여, 여봐라! 당장 소방대를 죄악 계곡으로 북진(北進)시켜라!”

공요는 그들이 명을 내려 조치를 취하는 것을 전부 확인하고 난 이후에야, 돌아서서 화려한 누각을 내려왔다.

'서로 책임을 떠넘긴다던 두 행정 관료가 한 술자리에 있다고?’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얼굴에는 분노대신 강한 의혹이 서려 있었다.

'게다가 그 자리엔 분명 직전까지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구장들이 몸으로 은근슬쩍 가렸지만, 공요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리를 비웠지만, 그 술판에는 또 하나의 잔과 자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나섰는데도, 구장 놈들이 시간을 끌 정도라니….'

두 구장이 죄악계곡의 화재를 방관하던 일에는 범상찮은 누군가가 배후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 * *

청 대인과 그 일행들이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자리를 비운 지휘 천막.

연소현의 목소리가 당예린을 채근했다.

“당예린! 종합 상황판의 갱신이 늦다!”

“예, 예! 서두르고 있습니다!”

당예린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속으로 대공자에게 치를 떨었다.

'아니, 대공자님은 자신은 종합 상황판을 보지도 않고, 전부 머릿 속에서 계산하고 외워서 말씀하시면서, 왜 이리 서두르게 하신담…!’

그때 천막에 소년의 미성이 울려 퍼졌다.

“큰형님! 이 소제가 왔습니다!”

사공자가 도착한 것이었다.

누구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귀여운 소년이 날다시피 연소현의 앞으로 튀어 왔다.

그를 바라보는 연소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생각보다 늦었구나. 이유가 있느냐?”

사공자가 씨익 웃었다.

“오는 길에 경로에 있던 자애원의 지부에 들러, 그쪽의 의료 인력과 약초 따위를 싣고 왔습니다!”

좌중에서 오오, 하는 감탄과 함께, 밝은 표정의 관련 담당자들이 인수인계를 위해서 천막을 뛰쳐나갔다.

“잘했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공자가 자신의 코를 쓰윽하고 문지르며 말했다.

“소제는 큰형님이라면, 틀림없이 낙양 내의 모든 자애원 지부들에 지원 명령을 내리셨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확하다.”

“그렇기에 소제는 현월각주와 상의하여, 현월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는 상단과 상회들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 말에 연소현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이 커졌다.

“호오.”

“지금쯤이면, 상단과 상회의 짐 마차들이 각 자애원의 지부에 도착해서 짐과 인력들을 싣고 있을 것입니다!”

연소현이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

연소현 또한 비슷한 지시를 전령을 통해 내려놓았었지만, 현월각주 세아와 함께 있던 사공자가 이미 예측하고 한발 빠르게 움직여 두었던 것이 아닌가.

덕분에 결과적으로 지원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음홧홧홧!”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큰형님의 박수를 받은 사공자가 양 손을 허리에 얹고 어깨를 으쓱이며 큰 소리로 웃었다.

“급보입니다!”

현월각의 요원이 뛰쳐 들어오며 외쳤다.

“서북쪽 거리에서 새로운 빈민 약탈자 무리가 뭉치고 있습니다!”

요원이 허겁지겁 달려와 지도에 위치를 표시했다.

“그래. 너라면 어떻게 대처하겠느냐?”

연소현의 물음이 사공자를 향했다.

“으음….”

사공자의 시선은 연소현이 질문을 하기 이전부터 종합 상황판에 향해 있었다.

“소제라면….”

소년의 눈이 빠르게 움직이며,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서북쪽 광장을 경비 병력으로 이렇게 반 포위하면, 약탈자들은 이쪽, 불길이 있는 곳으로 향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현재 대기 중인 병력으로 측면을 압박하여, 그들을 전부 골목마다 흩어 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대기 중인 병력중에 누구를 배치하겠느냐?”

사공자가 현황판을 보며 즉각적으로 답했다.

“자애원의 치안대를 배치할 것입니다.”

“어째서 황호사협과 아미파 같은 무림인들이 아니라 무장도 빈약한 그들이더냐?”

“약탈자들을 위압하여 쫓으려면, 머릿수가 가장 중요합니다. 소수의 무림인을 배치한다면, 이성을 잃은 약탈자들이 숫자만 보고 덤벼들 것이고, 결국 피를 봐야만 약탈자들을 흩을 수 있을 겁니다.”

막힘없이 줄줄 나온 해답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비단장을 향해 말했다.

“전부 들었겠지? 이행하도록.”

경비단장이 급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애원의 치안대면 몰라도, 저희 용병단의 단원들은 아직 지리가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연소현이 사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사공자의 눈이 종합 상황판에 현재 재적 중인 인물들의 명단을 훑었다.

“토지 매각 담당과 자애원의 역병 방지 담당을 용병단에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선택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유는?”

“이유 첫 번째는 현재 그들은 맡은 임무가 없습니다."

사공자의 말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둘째. 평소에도 발이 닳듯이 죄악계곡을 돌아다니는 그들이라면 이 상황에서도 지리 안내를 확실하게 해낼 것입니다.”

형제의 몰아치는 문답에 좌중의 시선이 정신없이 좌우를 오갔다.

그 와중에 좌중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분명, 숨길 수 없는 경탄이었다.

이 형제들이 처음 출전한 현장에서 보여주는 활약은, 다수의 예상과 기대를 까마득히 넘고 있었다.

'이 형제들과 함께라면, 이 정도 재난은 얼마든지 극복가능하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감이 부풀어 올랐다.

“좋다! 훌륭한 답변이다!”

연소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공자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최종 지휘권을 너에게 이양하겠다!”

그 말에 좌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데없이 이 무슨 말인가?

“예! 큰형님! 이 소제에게 맡겨만 주십시오!”

큰형님의 지시라면, 섶을 지고 불길에도 뛰어들 사공자는 한 치의 의문도 없이 지휘권을 이양받았다.

“자, 잠시…!”

당예린이 펄쩍 뛰며 외쳤다.

“대공자님! 갑자기 지휘권의 이양이라니요!”

그녀의 말에 사공자를 제외한 모두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연소현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애초에 비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기 위해서, 종합 상황판의 운영을 자네에게 지시한 것이다.”

“예?!”

종합 상황판이 잘 정리가 되었던 덕분에, 사공자가 거의 시간 지체없이 인수인계받을 수 있었다.

“아, 그래서 저를 그렇게 다그치셨…. 아, 아니!"

납득하던 그녀가 다시 펄쩍 뛰었다.

“그, 그럼 대공자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려구요?!”

모두의 시선이 대공자를 향했다.

“나는 지금부터….”

연소현이 미소를 지으며, 지도에서 계곡의 중류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암흑가 조직들의 항쟁에 휘말려, 포위되다시피 고립된 전진 기지였다.

“이곳에 고립되어 있는 인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직접움직인다.”

그 말에 좌중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모두가 입모아 외쳤다.

“아,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굳이 대공자께서 직접 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서 좀 더 지휘에 집중해 주시는 편이…!”

사방에서 손을 내저으며 만류의 소리를 높일 때, 단상에서 내려선 연소현이 슬쩍 들었던 발을 내디뎠다.

신화 속 거인의 발 구름이 이러 할까.

지휘부의 바닥을 이루고 있던 단단한 포석들이 연소현을 중심으로 박살 나며 한 뼘 이상 가라앉았다.

"...."

진각(震脚).

내가기공도 아니고 그 준비 단계에 불과한 진각 한 번에 그 단단한 포석들이 박살나며 땅이 내려앉을 정도였지만, 먼지라고는 한 톨도 흩날리지 않았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도 없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상승무리(上乘武理)에 침묵하고 있을 때, 연소현이 말했다.

“내가 직접 길을 뚫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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