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편 죄악의 골짜기
훌륭한 배경을 타고났지만, 그저 자신의 성질을 못 이겨 쉬운 길을 택한 낙오자들.
연소현의 말은 처음에는 화살처 럼 황호사협의 마음을 꿰뚫고 상처 를 입혔다.
하지만 곧 그들은 연소현이 했던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속을 짓누르는 묵직한 바위가 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저 협의를 핑계로, 풍류에만 빠져 사는 한심한 족속들은 아니었나 보군.'
연소현은 침묵에 잠긴 그들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량 어르신의 마음을 헤아려 어쩔 수 없이 오지랖을 부려 본 것이지만. 그래도 마냥 시간 낭비를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행이다.'
연소현이 그들에게 투자한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그 시간이면 연소현이 얼마나 많은 계획을 떠올리고, 짜고 점검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생각하면…."
'일개' 무림인 몇몇을 위해서 쓰기에는 아까운 시간이었다.
공량이 황호사협에게 연소현을 소개하며 했던 말, '연소현이 큰일 을 하기 위해 다망한 인물이며, 귀한 시간을 쪼개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내린다'는 그 말은 전혀 허황된 말이 아니었던것이다.
우르르-.
연소현의 일권(一拳)으로 뻥 뚫려 버린 구멍 좌우의 담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공담응의 동지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흠.”
연소현이 손을 내젓자, 공담웅의 혈을 제압하고있던 금침들이 거짓말처럼 그 소매로 빨려들어갔다.
"...."
단지 마비가 되었을 뿐, 자신의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생각에 잠겼던 공담웅이, 끄응 하고 제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엔 여전히 핏대가 서있고, 시뻘겋긴 했지만, 그것은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공담웅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연소현에게 손을 모아 깊은 인사를 올렸다.
“연 대협(大俠)께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지들도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몸가짐을 바로 하고, 연소현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황호사협은 자신들보다 대략 열살 가까이 연배 차이가 나는 연소현의 비판을 수용하고, 스스럼없이 예를 차릴 줄 아는 이들이었다.
연소현은 그들에 대한 평가를 속에서 한 단계 상승시키면서, 그 또한 스스럼없이 그들에게 손을 모아 예를 취했다.
“나는 그저 오지랖을 부리며 쓴 소리만 늘어놓았을 뿐이오. 거기서 무언가 얻은 것이 있다면, 내 가르침이 아니라 그대들이 스스로 얻어간 깨달음일 뿐.”
연소현은 자신이 무력과 논리로 그들을 압도하였다하여, 으스대거나 비꼬지 않았다.
“그러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소.”
공담웅이 고개를 저었다.
“옛말에, 입에 쓴 약이 병에 듣는 약이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 충언이라 했습니다. 대협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에 호되게 깨달은 바가 있으니, 부디 저희의 감사를 받아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의 감사를 받겠소.”
연소현이 뒤끝 없이 깔끔하게 감사를 받아들이자, 황호사협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연 대협.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공담웅이 한 걸음 나서서 입을 열었다.
"연 대협께서 저에게 협의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 주신 것은, 지금부터 제가 연 대협을 따르며 해야할 일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소.”
“그렇다면….”
그 말에 공담웅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평소처럼 직설적으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혹시 제 동지들도 그 길에 함께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동지들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했다.
아무래도 따로 뜻을 묻지 않아도, 그들 전체가 같은 뜻인 모양이었다.
"물론."
빙긋, 뒷짐을 진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가, 감사드립니다. 대협. 그렇다면, 언제 어디로 찾아뵈면 되겠습니-.” “지금 당장.”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으며 대답해 주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채비를 단단히 갖추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타시오.”
“예?”
손자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그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던 공량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대공자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했느냐?! 멍청히 서서 무엇을 하는 게야?! 당장 준비를 갖춰 마차에 타도록 하여라!”
그의 카랑카랑한 외침에 공담웅뿐만 아니라 그의 동지들까지도 헐레벌떡 뛰어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엄한 표정을 짓고있던 공량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감사하오, 대공자. 감사하오.”
손자를 맡아 주는 것은, 연소현의 입장에서는 그저 거절해도 좋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연소현은 손자를 맡아 주는 것을 넘어, 벌써 따끔한 가르침까지 내려 정신을 차리게 해 주지 않았는가.
“아닙니다, 공 어르신.”
연소현이 흐트러진 자신의 소매를 다듬으며 말했다.
“잘 닦인 인성이 기반에 없었다면, 제가 무엇을 해 봐야, 그저 소귀에 경 읽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주변의 사귀고 있는 친구들을 봐도 그렇고, 모두가 어르신께서 훌륭한 훈육을 해 오신 덕입니다.”
그 말에 공량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매우 훌륭한 무위였소. 대공자. 어찌 그런 실력을 지금까지 숨기고, '무검자'니 하는 헛소리들을 듣고 계셨다는 말이오?”
공량은 기를 다스릴 자질을 타고 태어나지 못했지만, 그동안 쌓아 온 경험이 있었기에, 연소현의 실력이 비범함을 넘어서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연소현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이렇게 칩거를 마친 제가 좀 더 극적인 연출을 노릴수 있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 말이 옳소.”
공량이 웃으며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북망산의 방문에 이어서, 죄악의 골짜기, 그리고 그대의 무공까지.”
그가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연소현의 의도에 따라 펼쳐지게 될 미래를 예언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며칠만 지나도, 낙양의 모든 이들이 둘 이상 모이기만 하면, 가장 먼저 그대에 대해서 떠들게 될것 이오. 그리고 그 소문들의 진위에 대해서 알고싶어 참을 수가 없게 되겠지!”
정말로 대공자는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과 만난 것인가?
대공자는 무슨 재주로 북망산의 그 가문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단 말인가?
지금 대공자가 죄악의 골짜기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무검자라 알려진 대공자가 내공을 지니고 무공을 익혔다는 소문이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도대체 연소현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다들 이렇게 그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가?
연소현의 일이 제 일인 양, 어린 아이처럼 들떠서 말을 늘어놓던 공량이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아이고. 내가 혼자 흥분하여, 바쁜 대공자를 계속 붙잡아 두고 있었소.”
“아닙니다, 공 어르신.”
의자차에 앉은 공량이 연소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공자께서도 지금 바로 죄악의 골짜기로 향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이 밤중에 그 흉흉하고 위험한 곳에 간다는 연소현이었지만, 그에 대한 믿음이 금강석처럼 단단한 공량은 오히려 손뼉을 쳤다.
“훌륭하오. 몰아칠 때는 정신없이 몰아쳐야 하는 법이지.”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날이 저문 탓에 이 노부가 당장 큰 도움을 줄 것은 얼마 없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을 해 주시오.”
“그렇다면 당장에 공 어르신께 몇 가지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 * *
공담웅의 동지들은 영문을 모르는 와중에, 공씨 가문의 도움을 받아 나름의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연 대협께서는 자신의 무공을 감추고 계셨던 것일까요?”
“으음.”
공씨 가문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충 짐을 싸는 것을 마친 여인의 물음에 영웅건을 맨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낙양검가는 천하제일가문이고, 그 안의 정치 지형은 황도의 정계 만큼이나 복잡하다고들 하지. 우리같은 문외한들이 떠들어 봐야, 생산성 있는 대화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건 그렇겠군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여인이 아직도 식은땀을 흘리며 구석에 홀로 앉아있는 사내에게 눈을 흘겼다.
“제 눈으로 보아도,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니, 이제 좀 마음을 놓으시죠.”
연소현에게 달려들었다가 혼쭐이 났던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끄응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니, 상처가 없다는 것은 나도 아는데….”
영웅건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막대한 경력의 발출이 자신을 타고 흘렀다면, 티가 나지 않는 내상이 남았을 수도 있소. 연 대협의 경지가 높아서, 아무리 깔끔하게 수법을 부렸다해도….”
내가기공에 나름의 일가견이 있는 그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운기조식부터 하시는 편이…!”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혈맥과 단전의 점검은 마쳤소.”
그가 자신의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쳤다.
“...본인의 내부에는 단 한 점의 문제도 없었소.”
“그렇다면…?”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연 대협께서는 그 고절한 내가기공(內家氣功)을 단 일순간에 사용하셨지. 분명히 그 막대한 경력이 내 등 뒤로 발출되었소. 그런데 당시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도 못했다는 말이오.”
그가 눈을 들어 좌중을 바라봤다.
“도대체 우리가 본 그 수법은 무엇이었던 것이오?”
그 말에 모두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아무런 문제가 남지 않은 것을 넘어서, 아예 경력의 흐름을 느끼지를 못했었다니….”
그들 중 가장 내가기공에 조예가 깊은 이마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에 다들 답을 찾는것은 포기했다.
대신 그들에게 공동의 물음이 떠올랐다.
“도대체 연 대협의 경지는 어느 정도인 것일까요…?”
여기 있는 황호사협의 경지는 개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다들 저 앞에 있는 '벽'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느끼는 정도는 되었다.
“벽을 바로 앞두고 계신 것일까요?”
“아니면, 벽에 도전하는 중?”
“…설마, 벌써 벽을 넘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벽을 넘었다는 표현은 '고수'가 되어 초인 중의 초인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일컬었다.
“…전 중원에서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검가의 이공녀께서도 이십 대가 넘어서야 벽을 넘으셨지. 그런데 연 대협께서는 고작해야 올해로 열일곱이 아니오?”
그 천재 중의 천재, 천의무봉 연서린을 넘는 무재(武才)가 있다고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
턱을 쓰다듬으며 연소현의 내가기공에 대해서 궁리하던 남자가 혀를 찼다.
“…우리끼리 이야기해 봐야 소용도 없겠군.”
그의 시선이 구석에서 낑낑거리는 공담웅을 향했다.
“공 형제는 아까부터 도대체 무엇에 그리 용을 쓰고 있는 것이오?”
“아, 미안하오.”
그러고도 가림막 뒤에서 잠시 끙끙거리던, 공담웅이 세상 불편한 얼굴로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풉!”
저택에 비치되어 있던 가장 큰 갑주를 걸쳤음에도, 공담웅의 거인과 같은 덩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어른이 어린아이의 옷을 껴입은것 같은 모습에 다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공 형제! 도대체 그 꼴이 무엇이오?”
“지금 전쟁터라도 가시는 겁니까?”
그들의 말에 공담웅이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어라? 내가 말 안 했었소?”
그가 자신의 동지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죄악의 골짜기로 가는 것이오.”
그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고는 다들 하인을 부르며 뛰어나갔다.
“여기도 갑주를 한 벌 가져다주게! 아니, 세 벌! 제일 튼튼한 놈으로! 그리고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방패도 부탁하네!”
“혹시 여분의 도(刀)가 있는지 가서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단도나 단검 따위도 필요해요!”
“우리는 갑주를 입는 법을 모르니, 당장 갑주를 다룰줄 아는 하인과 하녀가 필요해!”
평소라면 동지들이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을 공담웅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묵직한 긴장과 서늘한 고양감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죄악의 골짜기라.”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하필 오흉(五凶) 중의 하나인가….”
그가 평소 어울리던 협객과 협사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흉에는 절대 접근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