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59화 (159/350)

제9편 두 번째 단추

“차향이 느껴지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소.”

공씨 전대 가주가 허허, 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지었다.

“시술의 효과가 조금 더 드러나는 모양입니다.”

연소현의 말에 그가 그저 즐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겠소? 반갑고 귀한 손님과 마시는 차는, 단지 코로 맡을 수 있는 이상의 향이 있는 법이지.”

노인, 공량이 찻잔을 탁상에 놓았다.

“앞으로 우리 공씨 가문은 대공자께서 필요로하는 모든 방면에서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낙양검가의 후계자 다툼에 공씨 가문이 말려들게될 것을 우려한, 연소현이 사양의 뜻을 표하기전에 노인이 손을 저었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오지 않을까 싶어, 내 황도십육가문이라는 허물만 가득한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오.”

공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유산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식이 태어나기만을 바랐건만.”

감히 타 가문의 내부 사정에 입을 열지 않고, 연소현은 가만히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 어떤 자식도, 그 손주들도, 그릇이 부족한 녀석들뿐이었소.”

공량, 자신을 마지막으로 삼대째 이어지던 재상 역임자가 더 이상 배줄되지 않는 것만 봐도 뻔하다는 말이었다.

“지금 황도에 있는 내 장남 녀석은 큰 뜻이야 품고 있을지 몰라도, 줏대가 약해서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의지가 부족하오.”

혀를 찬 노인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을 탁탁 하고 두드렸다.

“그놈이 이 가문의 유산을 받아 봐야, 그 유산을 유지하는것에만 급급할 뿐. 이 유산으로 제대로된 큰일을 해낼리가 없지.”

가혹한 평가였다.

하지만 황도에서 개혁파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공량의 말에서는, 절대 한 점의 타협도 할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대공자.”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노인의 눈빛이 연소현을 향했다.

“낙양을 바로잡으려면, 낙양검가를 바로잡아야 하고, 이 제국을 바로잡으려면 황도를 바로잡아야 하오.”

그의 손이 전에 없이 강한 힘으로 연소현의 손을 쥐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대공자 뿐이오.”

개인들이 나누기에 너무도 거대한 이야기였지만, 연소현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즉각적인 대답에 공량이 미소지었다.

“역시, 즉답을 하시는구려. 대공 자께서 칩거를 끝냈다고 하셨을때 이 노부는 확신했소.”

그가 마치 연소현의 마음속을 읽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낙양검가를 고쳐 쓰고, 천하를 고쳐 쓸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연소현이라는 큰사람이 칩거를 끝냈을리가 없다.”

“……역시 공 어르신답게 정확하십니다.”

전쟁 시작 이후 짧은 기간이지만 재상을 역임하여, 최악의 상황들을 막아 왔던 노인이 껄껄하고 웃었다.

“좋소. 그것이오. 바로 그렇기에 이 가문의 유산은 다른 이가 아니라 대공자를 위해서 쓰여야 한다는 것이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난 것일까.

노인의 열변이 이어졌다.

“이 노부의 이름이라면, 앞으로 어디서 어떤 이유로 사용해도 상관이 없소. 이 공씨 가문의 재산이든 허명이든, 그대 마음대로 끌어다써도 상관없다는 말이오. 이 공씨 가문의 사람은 그대의 사람과 같이 여기시오.”

공량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앞으로 이 노부가 대공자의 모든 행보를 도울 것이오.”

“그것은……

“황도에 있는 내 큰아들놈이 걱정이시오? 이 노부가 힘이 없을 것이 걱정이시오?”

노인이 자신이 기대고 있던 두툼한 베개 아래서 작고 호화로운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잘 보시오, 대공자.”

그리고 그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옥으로 만든 직인 하나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공씨 가문의 가주직인이오.”

"...!"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 가문의 현 가주는 여전히 바로 이 늙은 공량이라오.”

과연 연소현으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노부는 오늘 같은 날만 기다리며, 이때까지 누구에게도 가주직인을 넘기지 않았소.”

그의 눈빛이 길을 가로막는 무엇이라도 뚫어 버릴 기세로 번뜩였다.

“앞으로는 이 공씨 가문의 가주 공량이 대공자의 뒤를, 이 가문의 모든 것을 쏟아 받쳐 줄 것이오.”

* * *

물론 공량과 연소현이 원하는 정도의 변화를 만들어 내려면, 아직 갈길이 멀었다.

하지만 연소현도 그리고 공량도, 지금부터의 행보 하나하나가 모두 크고 작은 변화를 이끌어 낼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당연히 낙양이었고, 낙양검가였다.

“검가의 소가주.”

“그것이 가장 먼저겠지요.”

목을 축인 공량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공자께서 첫 행보로 북망산을 택하신 것은, 이 노부도 상상도 하지 못한 훌륭한 결정이었소. 물론 그 결과 또한 매우 훌륭하오.”

“이제 겨우 첫 단추를 끼운 것이지요.”

“그저 첫 단추가 아닌 매우 훌륭하게 첫 단추를 끼운 것이오!”

공량이 자신의 무릎을 내리쳤다.

“이 낙양의 최상위 권력자들은 모두 북망산에서 대공자가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똑똑히 보았을 것이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세력권이 낙양이었을 뿐.

낙양에서는 그 기반이 황도에 있는 십육가문보다도 쉽고 크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드러나게 될 북망산 전대 가주들과 대공자의 관계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만큼 연소현의 이름값이 더 크고 멀리 알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불충분합니다.”

“그렇소.”

연소현의 말에 공량이 동의하며, 말을 덧붙였다.

“이 북망산은 매우 비밀스러운 곳으로 여기서 생긴 일은 저잣거리까지 내려갈 일이 없지.”

“맞습니다.”

“그래서 대공자께서는 이제 '두 번째 단추'를 선보이실 차례겠지요?”

북망산의 방문이 첫 번째 단추.

그리고 이제 두 번째 단추를 끼워야 할 시간이었다.

“예. 저는 두 번째 단추로, '죄악의 골짜기'를 준비했습니다.”

공량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단지 그것이 현재 밖으로 알려진 합작 사업 수준에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순식간에 눈치챈것이었다.

“과연, 과연…….”

노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 노마들을 끌어들인 것이었어……! 그랬군!”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 전대 가주들조차 제가 설명을 하고서야 깨달았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눈치를 채시다니, 훌륭하십니다.”

공량이 손을 내저었다.

“이 노부는 그저 큰 틀을 짐작한 것뿐. 그저 그런 추측이야 누군들 못하겠소?”

그럼에도 공량의 기분은 훨씬 좋아 보였다.

“대공자께서 그리만 하실 수 있다면, 대단히 훌륭한 두 번째 단추가 될 수 있을 게요.”

그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흠흠. 훌륭하군. 훌륭해.”

그가 손뼉까지 치면서,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자신의 옆에 길게 내려온 줄을 흔들었다.

“당장, 녀석을 들라 해라!”

밖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연소현의 시술도 시술이지만, 다시 살아난 희망이 그의 육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녀석...?”

의아한 표정의 연소현을 향해, 공량이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님, 소자이옵니다!”

내력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방 안의 찻물이 슬쩍 흔들릴 정도였다.

“당장 들어오거라!”

“예!”

큰 대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절대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출입구가 꽉찰 정도로 거대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할아버……!"

그의 이마가 위쪽 문틀에 그대로 충돌했다.

"어이쿠.”

얼마나 강하게 박았는지, 방 안에 앉아 있는 연소현에게까지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문틀이 그대로 박살 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놈아! 집을 다 부술 요량인 것이냐?!”

머리를 숙여 방 안으로 들어온 거인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허허. 문이 낮은 것을 탓하셔야지, 왜 이 귀한 손주를 욕하십니까?”

한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조금 험상궂은 얼굴이긴 하지만 붙임성 좋게 상황을 넘긴 그가 연소현을 발견했다.

“오! 이 작은 손님분이 할아버님께서 기다리던 그 귀한 손님이신 모양입니다.”

“예끼! 이 무례한 녀석이!”

그의 머리에 대번에 벼루가 날아들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벼루가 반으로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졌지만, 오히려 그는 얼굴을 활짝 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할아버님께서 '다시' 벼루를 던지실 정도로 건강해지셨다니요! 이렇게 기쁜 일이 다 있다니!”

그러더니 혼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당장 잔치를 벌여야겠습니다!”

그러고는 연소현을 향해 대번에 큰절을 올렸다.

“귀하가 바로 할아버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던 그 연 씨 성을 쓰신다는 귀인이시로군요.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담웅(孔愴雄)이라고 합니다.”

“……연소현이오. 반갑소.”

헛웃음을 지으며 연소현이 답하자, 옆에서 공량이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모자라 보이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전시에서 차석(次席)을 했을정도는 되니, 영 못 쓸 정도로 멍청한 녀석은 아닐 것이라오.”

그러자 다시 몸을 일으켜 그대로 바닥에 앉은 공담응이 툴툴거렸다.

"그 '강 씨' 안경잽이만 없었다면, 수석 자리가 제 것이었을 텐데.”

공량이 벌컥 화를 냈다.

“다른 사람의 탓을 해서 무엇 하느냐?! 자기 자신이 모자란 것을 알아야지!”

그러자 공담웅이 자신의 가슴을 쳤다.

그가 가슴을 칠 때마다 커다란 북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 할아버님! 그놈은 서원에 있을 때부터,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도 않는 괴물 같은 놈이었습니다! 그런 괴물이랑 저같은 평범한 사람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해서는 안 될 일이지요!"

그러더니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그놈이 전시에서 수석을 해 놓고도 관직을 마다하고 내빼어 버리는 바람에 저희 기수 전체가 곤란해진 것은 또 어떻고 말입니까!”

연소현이 슬쩍 물었다.

“혹시 그 안경을 썼다는 강 씨의 이름이……?”

“'강호'라는 놈입니다. 들어 보셨습니까?”

그 대답에 연소현의 머릿속에 즉시 감찰부의 강호가 떠올랐다.

“기수가 곤란하고 나발이고, 관직을 걷어차고 나온 것은 네 녀석이 아니었더냐?!”

공량이 손자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고위 관료를 벽에다가 내다 꽂아 버린 녀석이 뭘 어디서 다른이 탓을 해?!”

공담웅이 툴툴거렸다.

“……그놈이 황궁의 규칙을 어긴 민씨 가문 출신의 환관 하나를 눈감아 달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그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멍청한 놈! 네 녀석이 내 손자가 아니었다면, 대번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야!”

그 말에 공담웅이 껄껄 웃었다.

“그래서 제가 할아버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한 마디를 지지 않는 손자의 모습에, 부끄러움과 분노로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던 공량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자. 이 한심한 녀석이 우리 공씨 가문의 차기 가주라오.”

“그 말씀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 하나는 장사이고, 무공도 익혔으며, 머리도 제법 돌아가는 녀석이니, 대공자의 발목을 잡지는 않을 것이라오.”

그가 짧게 덧붙였다.

“대공자께서 다음 행보가 죄악의 골짜기라고 하셨으니, 저놈을 데려가 병졸로라도 부릴 수 있을게요.”

그 말에 공담웅이 하하 웃었다.

“과연 할아버님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던 귀인께서 얼마나 뛰어난 재주로 이 공담웅을 부리실지 기대하면서 지켜보겠습니다!”

은근한 도발이었다.

'마치 검가의 무사 같은 자로군.'

제 몸으로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의 평을 믿지 않는 성격.

얼마 전까지였다면 '이런 부류'는 가만히 두었다가 후에 자신의 지략으로 놀라게 하는 방식을 택했을 연소현이 빙긋웃었다.

'이제는 돌아가는 방법을 택할 필요가 없지.'

“지켜볼 것 있겠는가?”

“예?”

눈을 끔뻑거리는 공담웅에게 연소현이 말했다.

“지금 당장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무엇으로 말입니까?”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힘으로.”

공담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툭 튀어나온 태양혈 그리고 타고 태어난 것 이상으로 단련된 신체가 상당한 수련을 쌓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렇다.”

연소현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극성에 달한 양의심공의 공능과 그 안정성은 이제 충분히 검증됐다.

그에게 마음 편히 무공을 사용할 길이 열린 것이다.

'이제는 슬슬 '무공을 모르는 낙양검가의 대공자'라는 딱지를 떼야 할 시기가 되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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