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첫 단추
붉은 석양빛에 군사들의 갑옷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창밖으로 제이근위여단의 군사들이 일제히 물러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부총무 비구니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뭔지는 몰라도 이제 끝난 모양이군.’
총무사태의 명에 따라, 어떻게든 대공자의 행렬에 끼어들긴 했지만, 도무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한 탓에 속이 답답해 터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총무사태님과 온종일 연락조차 하지 못했다.'
돌아가면 노발대발할 총무사태의 귀신 같은 얼굴이 떠올라, 벌써부터 속이 쓰려 왔다.
* * *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것은 사감 비구니가 탄 마차였다.
“여, 역시! 다선랑 아이들이 탄 마차가 보이지 않아요!”
고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행렬에서 머리를 내밀고, 마차를 일일이 확인하던 호신술 비구니가 외쳤다.
“게다가 검가의 대공자님이 탄 우마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머리 집어넣으래도! 위험하지 않느냐?!”
그렇게 호통을 치는 사감 비구니또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다선랑의 아이들은 애초에 처음부터 없었던 건가?! 그리고 검가의 대공자는 행렬에 합류하지도 않았고?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그런 다선랑에 대한 생각과 걱정도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큰길의 교차로에서 아미파가 탄 마차들만이 행렬에서 떨어져 나온 탓이었다.
사감 비구니가 마차의 마부쪽 창을 열고 외쳤지만, 고삐를 쥔 대공자의 하녀에게서는 차가운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가만히 계시는 쪽이 좋으실 겁니다.”
노골적인 협박조의 말에 일이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은 사감 비구니의 얼굴에 불안함이 떠올랐다.
그리고 인생을 살다 보면 흔히느끼듯,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낙양검가의 성채 도시 안으로 들어온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사감 비구니가 비명처럼 외쳤다.
“아, 암살 계획이라고 하셨습니까?!”
“들으신 대로입니다.”
태연자약한 연하응의 뒤로 부총무 비구니와 본산의 행정 비구니들이 연행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총무님! 이 말이 정녕 사실인 것입니까?!”
"...."
머리를 숙인 부총무 비구니는 아무 대답도 없이 끌려갔다.
본산의 행정 비구니들은 기본적으로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하게 혐의를 부인하는 이들도 없었다.
그리고 그 광경은 남겨진 비구니들에게 들려주는 답과 다름이 없었다.
“이, 이게 대체…."
사감 비구니가 순간 떨려오는 무릎을 부여잡았다.
'그 아이들을 죽이려 했다고? 도대체 우리 아미파는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란 말인가!’
본산의 고위증이 다선랑이라는 사업체에 대해서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학관 소속의 그녀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들에게 항상 행실을 조심하고, 또 조심할 것을 거듭해서 다그쳐 왔었는데….'
조금이라도 아이들이 본산의 비구니들에게 책을 잡히지 않도록, 자신이 할수 있는 역할을 다해 왔었다.
그녀가 항상 다선랑에게 한층 더 엄격하게 대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본산에서 그 아이들의 가족들을 인질처럼 여기고 있으니, 그만큼 더 아이들이 혹시나 허튼 일을 벌일까 조마조마해 왔었다.
어떻게든 큰 문제 없이 원만하게 다선랑과 아미파의 일이 마무리되길 바라 왔었건만.
'그런데 본산 쪽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다니!’
그녀의 입에서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아미파에 입문했을 때의 기쁨, 그리고 학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쌓아 왔던 긍지, 그리고 아미파에 대한 헌신.
아미파의 어두운 면에 접하면 접할수록, 그 모든 것이 더욱 위태롭게 흔들리던 요즘이었지만.
이젠 그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짓밟힌 기분이었다.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사문 그 자체에 의해서.
“…아미타불.”
그 감정을 느끼는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남겨진 학관의 비구니들 사이에서, 연신 불호를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또한 평범한 사람인지라,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문의 행태에 적당히 눈 돌리고, 적당히 못 본 척하면서 살아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눈을 돌릴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부총무 비구니와 본산의 행정 비구니들이 제대로 연행되는 것을 확인한 연하응이 돌아왔다.
“저기…!”
그에게 사감 비구니가 물었다.
“다선랑은, 그 아이들은 무사한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어디까지나 미수였으니까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안도 섞인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혹시 오늘 다선랑 아이들이 보이지 않은 것은…?”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 주었다.
"본가의 대공자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역시 그랬군요….”
의문이 한 가지 풀리는 순간이었다.
'뭐, 단지 보호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연하응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 며, 화제를 돌렸다.
“여기 남은 분들은 전부 학관 소속의 비구니들이시죠?”
그의 물음에 스물 정도 되는 비구니들이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성도로 압송되기 전까지 이곳의 처소에서 '연금'되실 겁니다.”
“...!"
그때서야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은 비구니들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아, 압송이라니?! 우리는 아무런 가담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감 비구니의 외침에 연하응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산 소속도 아니고, 고위급도 아닌 여러분이니 그것을 감안한 연금인 것이지요. 그리고 죄의 여부는 본가가 아니라, 후에 성도에서 수사와 재판을 통해 가릴 것이니, 지금 제 쪽에 뭐라고 하셔도 소용은 없습니다.”
수사와 재판이라니.
비록 위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싸움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었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 서류를 보여 줬을 때, 그 서류에는 분명 대리단가 사천당가, 그리고 성도지사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 이름 하나하나가 일개 개인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하도록 무거운 이름들이었다.
자신들이 성도로 압송되면, 기다리는 것은 결코 호의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억울한 결과를 맞이한다고 하여, 도대체 누가 그들을 도와 줄 것인가.
“그럼 이 처소만 벗어나지 않으면 되니, 돌아가실 때까지만이라도 편안하게 지내시길.”
할 말을 마친 연하응이 아쉬울 정도로 깔끔하게 돌아섰다.
“자, 잠시!”
사감 비구니가 비명처럼 외쳤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혹시라도 방법이 없겠습니까?!”
다급한 탓에 제대로 내용이 전달되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외침이었다.
하지만 연하응은 귀신같이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으니.
“앗, 그러고 보니…!”
그가 품을 뒤져,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으음. 대공자님께서 여러분이 도와주실 일이 하나 있다고 하셨었군요.”
“검가의 대공자님이…?”
그가 생긋 웃어 보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여러분의 깊은 불심(佛心)과 더불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심과 측은지심이 필요한 일이라고 설명해 두셨군요.”
"그것이 무슨…?”
연하응이 서류를 읽어 내리는 척하면서, 뜸을 들인 뒤에야 그들이 듣고 싶은 결정적인 말을 꺼내 놓았다.
“이 일에 협조하신다면, 여러분을 위한 탄원서를 직접 성도로 보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서류를 다시 품에 접어 넣으며 그가 웃어 보였다.
“이야. 사실 이게 말이 탄원서이지, 본가의 대공자님쯤 되시는 분이라면 사실 면책을 내려 주시겠다는 말씀이겠지요.”
그가 가는 눈을 슬쩍 뜨며 물었다.
“혹시 관심들이 있으신지…?”
잠시의 침묵 후에, 모두가 하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자 자, 알겠습니다. 일단 진정들을 좀 하시고….”
연하응이 양손을 뻗어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속으로 진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대공자님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을 결코 그냥 놓아주시는 법이 없으시다니까.’
요즘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연하응이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는 점이었다.
'뭐. 나야 자발적으로 말려든 것과 같지만….,
그가 아미파의 비구니들을 통제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미파 무승(武僧) 스무 명이라…. 현재 죄악 계곡의 상황을 생각하면 놓치기에는 아까운 전력이지.’
그의 지시에 따라 일렬로 서서, 순서대로 서류에 서명을 하고있는 아미파의 비구니들을 보며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면 나름 이것도 자발적이라면, 자발적인 것은 맞는데 말이지.’
어쨌든, 그렇게 연하응은 속으로 그들에게 묘한 동질감에서 비롯된 응원을 보냈다.
* * *
북망산, 공씨 가문 저택.
“오오….”
고령의 노인이 눈을 껌뻑였다.
연소현은 모든 금침을 회수하고, 공씨 전대 가주의 몸을 다시 바로 눕혀 주었다.
“효과가 좀 있으신 것 같습니까?”
“좋소! 아주 좋소이다!”
공씨 전대 가주가 큰 소리로 외쳤지만, 이내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고야 말았다.
그러면서도 기어이 누운 자세를 벗어나 몸을 일으켜 침상에 기대어 앉는 노인이었다.
“…겨우 몇 시진 만에 쉬이 호전될 병이 아닙니다.”
연소현이 그런 노인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며 달래듯이 말했다.
오늘 북망산에 도착해 첫 순서로 공씨 가문을 방문했을 때, 그는 노인을 위한 시술을 한 후 다음 가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술의 효과가 나타날 시간이 되었기에, 이제 다시 공씨 가문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병?’‘
노인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코웃음을 쳤다.
“이것은 한낱 병이 아니오.”
연소현은 노인의 눈에서 깊은 회한과 책망을 읽었다.
“이것은 내가 마땅히 치러야 할 죗값이지.”
노인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 저주받을 전쟁을 막아 내지 못했기에 하늘이 내린 천벌인 것이오.”
홀로 외롭게 그 오랜 세월을 복마전과 같은 황도에서 버텨온 노인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그것보다는.”
노인이 부드러운 시선을 들어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자신의 친손자를 바라볼 때 이상의 따스함과 자랑스러움이 홀러나오고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당당하게 대의(大義)를 논하던 서신 너머의 그 소년이 이렇게 장성하다니. 그리고 또 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되다니….”
그의 가녀린 손이 부들거리며,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던 연소현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너무나 고맙소.”
노인의 밑도 끝도 없는 감사에 연소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술이라면 앞으로 얼마든지 자주 찾아와 해 드리겠습니다.”
노인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 말이 아니오.”
그는 기침 몇 번을 하고서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대가 조로(早老)하지 않아서 고맙소.”
“...!"
노인의 깊은 눈이 연소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너무도 영민했던 그대가 세상에 너무 일찍 실망한 나머지, 칩거를 선택했다고 생각했소.”
“그것은….”
노인의 손이 연소현의 손을 따스하게 두드렸다.
“이유야 무엇이었든, 그대는 돌아왔소. 이렇게 당당히 세상으로 돌아왔단 말이오.”
그가 껄껄 웃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감사하오.”
외로운 싸움의 끝에 패배하고 결국 깊은 병환까지 얻어 버린 노인이 자신의 옛 동지에게 끊임없이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공 어르신….’
연소현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유가 무엇이고 과정이야 어쨌든, 자신은 이미 세상을 등지고 누웠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노인이 기억하는 연소현이 아니라, 제암진천경의 손을 잡아 두 번째의 기회를 얻은 연소현이었으니.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