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늙은 사냥개들 (3)
몇주전.
호두 마을, 한 판잣집.
연소현은 황량한 판잣집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어설픈 판잣집의 성긴 틈 사이로, 짙은 석양빛이 새어 들어와 그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호두 마을 자애원의 두 책임자가 연소현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말씀하신 대로, 확인을 해 보았었지만. 이미 보시는 것처럼 상황은 벌어진 후였습니다.”
연소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퇴역 병사의 동생이라는 아이의 시신은?”
“그것이….”
선녀교단의 무녀가 잠시 주름진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다가 결국 한숨처럼 대답을 토해냈다.
“…이웃들이 몇몇 부분을 '훼손' 하기는 했지만, 어찌 남은 부분이라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연소현은 석양에 의해서 붉게 물든 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작은 솥 단지를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그 안에 담겨 있던 묽은 죽은 흔적조차 없었다.
퇴역 병사 동생의 시신을 훼손했다는 이들이 흙바닥에 흘렀던 것까지도 전부 핥아서라도 먹어 치웠으리라.
"...."
그는 바닥의 다른 쪽 구석에 부서진 나무조각상의 조각들을 고이 모아 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건.”
그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조각상의 머리 부분을 주워 들었다.
“그 퇴역 병사의 동생이 만든 겁니다.”
“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고 하는데… 조각을 깎는 재능이 있어, 저희 쪽 사람 중에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참 착하고 고운 아이였다고 들었습니다.”
“형이 북부 전쟁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가족들을 홀로 부양했다고 하는데….”
연소현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손수 파편들을 전부 그러모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판잣집의 낮은 입구를 통과해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 하얀 연기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흩날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선녀교단 무녀들이 모여 퇴역 병사의 '재'가 발견된 장소에서, 장작에 불을 놓아,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
연소현은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에 영이라는 아이가 만들었다는 조각상의 파편들을 던져 넣었다.
그의 눈에 비친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양오단을 주시하는 연소현의 눈에는 그날의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것을 넘어서 시퍼렇게, 더욱 거세게, 더욱 세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낙양에는 그날 먹을 따뜻한 죽 한 그릇에 만족하는 이들이 가득하건만.
연소현이 그렇게 인내하며, 공을 들여 준비하고, 수행했어도.
그가 그렇게 분에 넘치는 '먹이'를 직접 먹여 주고 어르고 달래 주고 비위를 맞춰 주었지만.
끝끝내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만족을 못 하는 것을 넘어서, 벌써부터 딴마음을 품고 뒤로 흉계를 꾸미는 자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이 자리에서 몰살시켜 버리고 싶건만…!’
[죽여라!]
제암진천경의 목소리가 울림이 되어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연소현의 입이 쩍 하고 벌어지며, 그 안을 가득 채운 송곳 같은 이빨들이 드러났다.
“크, 크윽…!”
양오단은 붙들린 신체 부위가 짜부라지듯이 압착되는 고통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기괴한 현상과 비정상적인 살기에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당한다!’
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자신을 압도하는 완력에 붙들린채로는 정상적인 전사경을 구사할수도, 제대로 진각을 밟을 수도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경지가, 쌓인 경험이, 조금의 시간 낭비도 없이 과정을 뛰어 넘어 답을 찾아냈다.
“흡!”
단 한 호흡.
그의 단전에서 치솟은 웅혼한 내공이 한 호흡만으로 그의 오른팔 혈맥을 따라 급속히 집중됐다.
보통의 무림인이었다면, 당장 오른팔의 혈맥 전부가 파괴되어 버릴 정도로 대량의 내공을 단 한 순간에 집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통의 무림인 따위가 아니지 않은가.
연소현의 복부에 가져다 붙인 그의 장이 백열(白熱)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상대가 이상함을 느끼고, 채 반응하기도 전에 힘의 집중이 극한에 도달했다.
양가비전 사昜家祕傳),
굉뢰통천포(蟲雷通天砲).
진각도 없이, 거리도 없이 상대에게 밀착한 채로 펼쳐지는 발경.
일명 촌경이라고 불리는 기예(技藝)가 경지에 이른 자의 손에서 완벽하게 펼쳐진 순간이었다.
'지금이다!’
자신을 묶어 놓던 상대의 완력이 단 한 순간이지만 느슨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오른손에는 이미 이전보다 더 많고, 더 강력한 내공이 다시 모여 있었다.
거짓말 같은 내력 운용법이었다.
굉뢰통천포, 삼연발(三連發)!
굉뢰통천포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사방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와중에 양오단은 빛살처럼 상대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다섯 차례 극성에 이른 보법을 펼치고, 두 번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내려앉았다.
“후읍!”
크게 호흡을 들이켜며, 심법을 운용하자, 들끓던 기맥이 순식간에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의 시선의 끝에, 홁먼지 사이로 서 있는 연소현의 인영이 보였다.
그의 뒤로는 네 번에 걸쳐 발출된 내가기공에서 비롯된 파괴의 여파가 펼쳐지고 있었다.
정원의 바닥은 거인이 내리친 상흔이라도 되는 것처럼, 네 줄기로 파헤쳐졌고, 그 경로들을 따라 수령 많은 정원수들이 전부 박살 나 흩어지고 있었다.
질 좋은 정원의 홁더미가 하늘에서부터 비처럼 쏟아지고, 잔디와 풀잎이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
버티다 못한 몇 그루의 나무들이 뿌리까지 들려 큰 소리를 내며 나자빠졌다.
하지만 그런 가공할 위력을 선보인 양오단의 얼굴에는 경악이 어려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의 기술은 완벽하게 펼쳐졌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극성에 이른 굉뢰통천포는 단지 영거리에서 구사할 수 있는 촌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의 내부에 그 모든 충격을 '한 점'으로 집중하는 '침투경(侵透勁)'이었다.
'정상적인 결과'였다면, 상대의 몸이 안에서부터 터져 나온 경력으로 박살이 나야 했던 것.
그런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결과는 어떠한가.
상대가 마치 '전부 흘려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이 파괴되었을 뿐이 아닌가!
게다가.
“우읍!”
울컥하며 양오단이 입에서 검은 피를 쏟았다.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상대의 일수가 그의 복부를 타격했던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고작인 것인가?”
저편에서 홀러나온 쇳물 끓는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한심하군.”
그곳에서 그 자리 그대로,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채 우뚝 서 있는 연소현의 모습이 드러났다.
“실전을 제대로 치러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나 나는가?”
불길한 형상처럼 검은 기운을 흩날리고 선 연소현의 뒤로, 풍경이 점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피땀을 홀려 수련을 한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는 떠올릴 수 있는가?”
나무들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것처럼 뒤엉키고, 무성하게 자라난 수풀이 아우성을 치듯이 허우적거렸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분명 지금도 상단전을 보호하고 있는데?!’
양오단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상대의 얼굴이 그 무검자 연소현처럼 보였다가, 다시 귀신의 형상으로 보이길 반복했다.
그쯤 되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가는 것을 느끼기라도 했으련만.
이미 내공으로 인한 상단전의 보호도 소용없이, 제암진천경의 마기가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의 골수까지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연소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따지고 들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여유 같은 것은 그에게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들이 벽을 넘었다 하여, 칭송해 주니 그것으로 전부인 줄 알았더냐?”
“헛소리 마라!”
연소현의 말에 정곡을 찔린 그가 노성을 터트렸다.
“이 양오단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분기탱천한 양오단이 발을 구르자, 자신의 근처에서 위태롭게 기울어 있던 장대가 공중을 치솟아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원수로 가득한 정원 깊숙한 곳에서 유등을 걸어 불을 밝히기 위한 철제 장대였다.
“흡!”
그가 철제 장대를 몸 주위로 한바탕 휘젓자, 돌풍이 일어 안개처럼 내리깔린 검은 기운들이 흩어졌다.
“네놈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낱 철제 장대를 들었을 뿐이지만, 마치 그의 몸 전체가 한 자루의 신창이라도 된 것처럼, 전에 없이 예리한 기세를 내뿜었다.
"이 양가의 창(槍) 앞에서까지 잘난 척 떠들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과연 양가 하면, 창.
창하면 신창양가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뒤틀렸던 왼손과 타격을 받았던 복부 또한 진기의 운용에 따라 급속히 상태가 호전되어 가고있었다.
“우습군.”
하지만 그 앞에 있는 상대는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수많은 젊은 목숨들을 전선에 던져두고서….”
이제는 하늘로 길게 치솟는 검은 기운에 휩싸여 몸의 형체마저 일그러져 보이는 '무언가'가 양오단을 비웃었다.
“전선도 아니고, 북부의 사령부도 아니고….”
송곳 같은 이빨을 드러낸 괴물의 모습과 양오단을 조소하는 연소현의 모습이 빠르게 교차했다.
“만(萬) 리나 떨어진 안전한 황궁의 지도 앞에 서서 지휘봉이나 휘두르던 자의 창 따위가.”
하늘로 치솟듯이 자라난 나무들이 허공에서 똬리를 틀듯이 한데뭉쳐 햇빛을 전부 가렸다.
양오단이 발작처럼 외쳤다.
“닥쳐라!”
양가 전대 가주의 손에서 관(貫)의 오의(奧義)가 펼쳐졌다.
이전의 완성된 형태의 촌경이 우스울 정도로 강력하고 현묘한 창격이었다.
그 창격은 거리를 무시하고, 대기를 울리고, 대지를 뒤엎으며 시간의 경과를 무시하기라도 하듯이 상대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은 것처럼 보였다.
"?!"
양오단의 철제 장대는 너무도 허무하게 상대의 검은 손아귀에 붙들려 있었다.
“흡!”
그가 장대를 빼내기 위해서 몸을 뒤틀고, 흔들고, 경력을 실어 보냈다.
검은 불길에 휩싸여 이글거리는 뾰쪽한 손톱들이 돋아난 상대의 손에 잡힌 철제 장대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무슨 수법을 동원해도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익!”
어느새 베어져 나간 양쪽 귀가있던 자리에서 핏물이 줄줄 홀러내렸다.
양오단이 머리를 흔들며 용을 쓸때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기운을 한계까지 끌어쓰고 있는 양오단은 그러한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가느다랗고 연 하던 햇빛 줄기들이, 태양이 고개를 돌려 버리자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드넓고 호화로운 숲속 정원에 밤이 드리웠다.
“그러면서도 군의 승전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보신만을 추구했던 모리배의 창은, 한낱 갈대 줄기만도 못하다.”
양오단은 기겁하며, 장대를 놓고 물러났다.
무슨 조화인지, 철로 만든 장대가 촛농처럼 녹아 버려, 바닥에 짙게 내리깔린 검은 연기속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 제길…!”
펄쩍 뛰어 거리를 벌린 그가 옆의 다른 장대를 허겁지겁 뽑아 들었다.
그가 거리를 벌리기 전에 이미 손가락 몇 개가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는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직이다! 아직이야!’
절대 거짓이 아닌 신창일체(身槍一體)의 경지가 자신을 떠난 것도 아니었건만.
양오단은 주체할 수 없이 홀러내리는 식은땀이 거슬렸다.
하지만 닦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사실 그것 또한 식은땀이 아니라 길게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였다.
철제 장대를 든 손은 손가락을 몇 개나 잃은 탓에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수만의 죽음에 뒤따르는 원념과 원성 앞에서 한낱 경지 따위는 무의미한 것.”
금속이 뒤틀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찢어질 듯이 아파왔다.
“우에엑!”
이제는 숫제 검붉은 내장조각을 토해놓은 그였다.
별 것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복부에 남아 있던 통증이었으나.
침투경의 원리를 이용해 파고든 제암진천경의 마기가 이미 그의 내부를 갈가리 찢어놓고 있었다.
“으으으… ”
그는 마지막 남은 무인의 자존심으로 어떻게든 고개를 들었다.
수축과 이완을 순간적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양오단의 동공이 상대의 얼굴을 비췄다.
원래의 얼굴을 대신하여 울부짖는 하얀 가면.
차마 눈뜨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음에 한탄하던 장인의 가면에는 눈구멍이 없었건만.
그 뒤틀린 형상의 가면에는 시퍼런 귀화가 치솟고 있었다.
전쟁으로 끌려갔던,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어야 했던, 그 한으로 가득한 이들의 부릅뜬 두 눈을 대신하듯.
이제는 완벽하게 그 위용을 드러낸 제암진천경의 연자,
“대죄인, 양오단.”
암천존자가 밤보다 새카맣게 물든 긴 손톱들이 돋아난 양손을 펼쳐 보였다.
“이제 네 죗값을 치를 때다.”
그러자 바닥에 깔려 흐르던 마기에서부터 검은 가시들이 튀어 올랐다.
“크아아악...!”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가시들에 온몸을 꿰뚫린 양오단에게서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