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늙은 사냥개들 (1)
낙양검가, 원각정.
“어찌 휴식은 충분히 취하셨사옵니까?”
세쌍둥이 시녀 중 일령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공녀를 위해서 원각정에 대기중이던 그녀였다.
“아주 오랜만에 아무런 걱정 없이 푹 쉬었지. 이렇게 상쾌한 기분은 낯설 정도다.”
이공녀 연서린이 어깨를 빙빙 돌리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조금 이르긴 하지만 저녁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연서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는 돌아가 봐야지. 지금 이 시각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여기가 원각정이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뭐냐, 그 표정은.”
물음인지 수긍하는 말인지 묘한 일령의 말에 연서린이 크하핫 하고 웃었다.
“이 가문의 이공녀 노릇이 쉬운게 아니라고!”
그녀가 덧붙였다.
“그리고 나보다는 네 주인 쪽이 훨씬 힘든 것 같으니, 그쪽을 더 신경 써 다오.”
“…예.”
연서린이 호탕하게 웃으며, 일령의 등을 두드렸다.
그 힘을 못 이겨 휘청이는 일령의 모습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연서린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보다는 혹시 선녀 어머니, 그러니까 태상대부인의 사당이, 이 원각정 어딘가에 있다고 들었는데…."
일령이 아려 오는 등판의 따가움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 * *
“형님….”
사공자가 연소현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 주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연소현은 책상에 고개를 숙인 채 붓을 휘갈기며 답했다.
“괜찮다.”
본인이 괜찮다지만, 어찌 말 그대로를 믿겠는가.
연소현이 얼굴을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너 또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정도로 바쁘지 않느냐. 내 걱정은 하지 말아도 된대두.”
그가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어트려 주었지만, 여전히 걱정과 위로의 말들을 남기고 물러난 사공자였다.
어린 동생이 마지막까지 보내던 시선이 끊어지고 나서야, 다시 고개를 든 연소현이 작게 한숨을 지었다.
“몸이야 피로를 모르건만….”
그는 붓을 내려놓고, 조각칼을 들어 나무조각을 깎았다.
아무리 지략이 신산이라 불리는 연소현이라지만, 그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대리단가에 사천당가, 황도십육가문까지.
하나 같이 제후(諸侯)라 불릴만한 가문들을 필요한 방향으로 조종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 것이 어찌 쉬울 수가 있으랴.
그리고 어디 연소현이 당장에 그들만을 보고 계획을 세우겠는가.
게다가 그의 머릿속에 든 큰 그림이 오로지 그 한 장뿐이겠는가.
그의 머릿속에는 낙양을 넘어서 중원국 전체의 판도와 판세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니.
몇 날 밤을 고민하고, 또다시 생각해 보고, 수정한 다음,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그 와중에 인내심이 끊어질 뻔한 적이 몇 번이던가.
그럼에도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그때마다 불상을 깎았다.
왜냐하면….
'놈들은 그저 제암진천경에 먹혀, 영원히 고통받는 것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하다.’
그들이 해 줘야 할 일들이…, 아니.
그들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그들의 목숨이 다하는 그 마지막 날까지도 기다리고 있었으니.
* * *
노마들 앞에서 재롱떨듯이 미소를 만들어 냈다.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그들을 매혹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결과만 간략하게만 정리하자면, 크게 간추릴 수 있었지만….’
하지만 연소현은 마치, 자신이 한 명의 이야기꾼이라도 된 것처럼 거래 과정에 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그들의 흥미를 끌고, 구미를 자극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여 놀라게 하고, 끊임없이 그리고 정신없이 흔들어 댔다.
제암진천경에 의해서 과거로 돌아온 후, 그가 이렇게까지 인내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 * *
현재, 북망산, 공손 가문 저택.
공손나강의 손발과 같은 집사 몇몇이 물러나고 있었다.
그들은 정원 더 깊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 연소현과 전대 가주들을 위해서 분주히 움직였던 참이었다.
“너희는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 옆에서 공손나강이 저택의 경비 책임자에게 단단히 일렀다.
“신분 고하를 불문하고 이제부터는 강제로 접근하는 자들을 전부 베어 버리란 말이다.”
노인의 눈에 노골적인 살기가 어렸다.
"만일 아까 같은 일이 또 생기면, 너희 목이 전부 베일 것이야. 알겠느냐?!”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경비 책임자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대답하고 물러나려 했다.
“잠시.”
그런 그를 붙잡은 공손나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의 광경을 보았던 모든 이들의 이름을 적어 두거라.”
“…예"
용건을 마친 공손나강이 한참을 걸어 정원 깊은 곳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물을 따라 마시며 떠들고 있는 전대 가주들의 모습들이 보였다.
“다들 뭔가 재미있는 말씀들을 나누고 계셨소?”
그의 말에 전대 가주 하나가 껄껄 웃어 보였다.
“이제 황도로 돌아가서, 우리를 쫓아냈던 놈들의 눈알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
그의 말에 다른 가주들이 즐거워하며 맞장구를 쳐 댔다.
공손나강 또한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면서 시선을 구석에 가만히서 있는 연소현에게 돌렸다.
“대공자께서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고 계십니까?”
존댓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딱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 다는...”
그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대공자가 고개를 흔들어 보인 후에 전대 가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인들께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에 저도 기쁘지만….”
그의 말소리에 전대 가주들의 시선이 흡수되듯이 모여들었다.
“아마도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대인들께서 힘을 모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들 또한 그에 상응하는 결단들을 내리게 되겠지요.”
그 말에 들뜬 모습을 보여 주던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공자의 말씀대로입니다.”
“원래 귀한 열매는 그만큼 손에 넣기 어려워야, 더욱 달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시선이 노골적인 욕망을 품고 연소현을 향했다.
“하지만 물론 여기 계신 대공자께서 무슨 수를 써 주시겠지요.”
“그 신산 같은 지략으로 저희를 이끌어 주실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손을 비비며, 헤헤거리면서, 눈빛을 빛내며, 점차 연소현에게 다가섰다.
물론 그 자리에는 공손나강도 빠질 수가 없었다.
“자 자, 대공자님. 어서 저희에게 다음 수를 내려 주시지요!”
노인이 후다닥 달려들며, 치열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를 훤히 드러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여기까지 우리를 안달 나게 해 놓고, 지금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리게만 만드실 요량은 아니시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노인들이 그 속이 그대로 드러나는 음험한 미소로, 음침한 웃음으로, 한도 끝도 없는 권력욕으로 뒤엉킨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자!”
“대공자…!”
역겨운 광경이었다.
연소현은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표정에선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그들 하나하나의 뒤틀린 시선을, 그들의 매스꺼운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오연하게 내려다보았다.
'구역질 나는 것들.’
이제 그들은 연소현이 내미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먹으리라.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정말 주는 것 하나 없이 연소현 등 뒤에 전부 올라타려 들고 있었다.
'역시나 조금이라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구나.'
배 속에 무엇을 넣어도 허기를 면할 수 없는 아귀(餓鬼)처럼.
그런 이들에게 먹이만을 계속 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그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단 일순이었지만, 분명 새파란 귀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아까 말입니다. 제가 대인들 사이를 조율한다고, 어느 대인께서 말씀하셨었지요.”
연소현이 다시 입을 열자, 노마들은 제자리에 서서 그 입만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지요.”
“그것이 대공자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연소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그 조율' 이라는 것부터 좀 해 볼까요?”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노마들이 멀뚱멀뚱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언급했던 '조율'이라는 것은, 일이 진행되면서 그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바로잡아 줄 것을 이야기했던 것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일은 시작도 하기 전이 아니던가?
“…말씀하시지요, 대공자.”
“저희는 듣겠습니다.”
다들 멍청한 얼굴로 연소현이 음식을 떠먹여 주기만을 기다렸다.
"흐음.”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뜸을 들이던 연소현이 대뜸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이 중에서 벌써부터 나쁜 마음을 먹고, 뒤로 다른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리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리도 훌륭한 기회가 남은 인생에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들 텐데요.”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있다면, 모두의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연소현이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말이 그렇다는군요. 동의하십니까, 양 대인?”
“물론입니다, 대공자.”
양 대인이라 불린, 양씨 가문의 전대 가주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태연히 대답했다.
"대공자께서 이 시점에 북망산을 방문하신 것은, 실로 하늘의 도우심과도 같습니다.”
그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떡 벌어진 어깨를 폈다.
“이 양오단. 평생을 군문에서 보내며 수많은 전투 속에서 위기를 겪어 왔고, 그 안에서 행운으로 살아남은 것이 여럿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큰 행운이 있었던 것은 처음입니다.”
연소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행운이라….”
그러고는 과장된 태도로 팔짱을 꼈다.
“양 대인께서 말씀하시는 이런 큰 행운이란, 혹시 행운이 두 번 겹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양씨 전대 가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인은 대공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 태연한 목소리와 태도에 다른 전대 가주들마저, 연소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호오. 그렇군요. 두 번이라.”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찾아온 것과 별개로, 원래 꾸미고 계시던 계획이 있으셨나 봅니다.”
* * *
공손 가문 저택, 접객실.
대공자와 함께 강철의 우마차를 타고 왔지만, 감히 그 대화에 낄수는 없었던 그의 시녀장이 창밖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차가 어디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뒤에서 들려온 집사의 말에 시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저 잠시 풍경을 감상한 것뿐 ”
그녀는 시녀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차향이 참 좋군요.”
창밖을 향한 그녀의 눈이 요요하게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 너머의 어딘가를 바라보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마치 그 너머의 누군가에게 속삭이기라도 하듯이.
* * *
“대공자!”
양씨 가문의 전대 가주가 묵직한 내공을 담은 채 노성을 터트렸다.
그 목소리에 주변의 수목이 떨릴 정도라, 그의 경지를 말해 주는 듯 했다.
“감히 이 양오단을 우롱하는 것이오?!”
벼락이라도 내뿜을 기세로 외친 그가 소매를 털자, 순간적으로 돌풍이 일었다.
“이대로 이 양오단을 모함하려 한다면, 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오!”
그 노골적이고 분명한 경고에는 좌중의 뼛속까지 시리게 할 정도로 서늘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습니까?”
연소현의 입가가 마치 길게 찢어 지기라도 하듯이 벌어졌다.
“하지만 저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강호에서 신창양가(神槍楊家)라 불리는 양씨 가문의 전대 가주를 조롱하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