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53화 (153/350)

제3편 황도십육가문(皇都十六家門)(8)

잠깐의 휴식 시간.

연소현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물잔을 들어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미리 비치되어 있던 물병들을 바라보았다.

그 고급스러운 유리 물병들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크흠."

전대 가주들은 이미 물을 전부 마셔버린 후였다.

“흠흠."

그들은 서로 날 선 대화를 나누다가 목이 타서 그런지, 갈라지는 헛기침을 해 댔다.

철저히 통제 중인 이 정원에는 시중을 들어 줄 집사마저 없건만.

그들 중 누구도 물을 새로 가져 오려는 이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의 본질이지.'

누군가 물을 가져오는 자가 있다면 그자를 자신들의 아랫사람이 된 것처럼 얕볼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몫만 가져오면,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모자란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물을 가져오는 자가 없었다.

연소현은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경멸이 가득한 조소를 보냈다.

* * *

연소현이 겉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대인들은 이 선정권으로….”

노마들이 눈을 빛내며, 연소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사천당가와 대리단가를 사업자로 선정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모두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연소현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걸로 사천과 운남에서 어설프게 강한 가문을 지배하는 대신, 각 지역에서 십육가문 이상의 지배력을 가진 두 가문의 은인(恩人)이 될 것입니다.”

“그렇군!”

노마들은 그 특유의 감각으로 이미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그들은 감각적으로, 또한 경험적으로 연소현이 만든 그림을 깨달았다.

“그것은 결코 다른 이라면 할수 없는 선택이지!”

“그 한 장의 선정권으로 취할 수 있는 금전적 이익은 대다수에게는 실로 엄청난 거금이니까!”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실리는 '그딴 것'이 아닌, 정치적 이익!”

걸인이 눈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는 것처럼.

그들은 연소현이 제시한 먹이를 득달같이 달려들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좋아! 아주 훌륭하군! 그럼 이 공손나강은 그 선정권으로 사천당가를 선정하겠소!”

"아니! 어차피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이지 않소? 우리를 대리하여 그 선정권들을 대공자가 알맞게 그 두 가문에 분배하면 될 것이오!”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설마…?”

이쯤 오면 굳이 노마들이 아니라도, 연소현이 수를 두는 방식을 깨닫기 마련이었다.

“예, 이미 선정권들은 '애초에 그 선정권을 제게 위임했던' 그 두 가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두 가문은 당연히 사천당가와 대리단가를 일컬었다.

전대 가주들의 시선이 연소현이 들고 있던 봉투 뭉치로 향했다.

“그럼 그건…?”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 안에 든 것은 실제 선정권이 맞습니다. 단지 전부 이미 사용되었기에 효력이 만료된 것뿐이죠.”

연소현이 그들에게 선정권이 든 봉투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하지만 대인들이 각자의 본가에 돌아가셨을 때, 당장의 증거로 필요한 물건이기도 하지요.”

"...."

전대 가주들이 봉투를 받아 들고는 묘한 표정을 공유했다.

그 꼴들을 보며 연소현이 속으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곧 연소현이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 한 전대 가주에게서 튀어나왔다.

“좋소. 아직까지는 훌륭하오. 하지만 중경 도시 개발 사업과 장강 수로 확장 정비 사업, 흔히 묶어서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하는 이 사업들에는 아직 암초가 있지 않소?”

“그렇지. 애초에 이 사업이 지금 지체되고 있는 이유는 해결되지 않았으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연소현이 지금까지 해 준 것만으로도, 이미 본가로 돌아가서 존재감을 뽐낼 수준을 넘었건만.

이젠 보따리마저 내놓으라는 심보였다.

“그렇죠.”

하지만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던 연소현은 오히려 흔쾌히 맞장구를 쳤다.

“그 사업에서 핵심이 되는 두 가문이 바로 사천당가와 대리단가.”

연소현의 말을 받은 것은 공손나강이었다.

"하지만 그 사천당가와 대리단가가 수백 년간 대립을 이어 가고 있지.”

“그리고 최근 들어 그 대립이 적대적으로 치달은 것이 바로 이 사업이고.”

사천당가는 사천 땅에 속한 중경에서, 대리단가가 함께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리단가는 이미 중경에 대한 충분히 많은 지분을 확보했으니.

두 가문의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들며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잠시 여유를 둔 연소현이 입을 열었다.

“대인들께서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연소현은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답을 꺼내 들었다.

“그 중경과 장강 유역을 따라, 아미파가 비밀리에 엄청난 토지를 구매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죠.”

“아미파가?! 고작해야 학관 사업이나 거창하게 하는 것들이?”

“그들의 자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실 아미파는 '대리단가를 대신'해서 그들의 자금을 받아, 그 토지들을 사들여 왔던 겁니다.”

전대 가주 하나가 손뼉을 쳤다.

“그렇군! 대리단가가 순순히 토지를 구매하도록 사천당가가 보고있었을 리가 없지!”

아미파가 대리단가를 대신해서 충분히 땅을 사들인 다음에야 그들 간의 동맹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사천당가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확인을 했을 무렵에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부쩍 힘이 강해진 아미파가 대리단가의 강압적인 지배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했지.”

“법적으로 그 토지들의 소유권은 아미파에게 있었고, 그래서 대리단가는 아미파에게 충분히 강한 압박을 주지 못했던 것이야.”

그것을 빌미로, 아미파는 대리단가가 완전히 분노하지 않도록 조절하며, 조금씩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해 오던 중이었다.

“그래서였군!"

그들의 시선이 연소현에게로 모였다.

“그 때문에 대공자가 복잡하고 번거로운 방식으로 아미파의 항복 문서를 받아 냈던 것이군!”

“정확합니다.”

연소현이 항복문서를 펼쳐 들었다.

“아미파는 각 사업권역에 포함된 모든 토지를 포기하고 그 소유권을 대리단가와 사천당가에게 넘긴다.”

그 서신에는 대리단가와 사천당가를 통해 아미파에 전달되었었던 연소현의 요구 사항이 정확히 관철되어 있었다.

“…아미파가 마지막 순간까지 내어놓고 싶지 않은 것.”

잠시 말문이 막혔던 그들 사이에서 먼저 눈치를 챈 이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대공자가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었던 것이구려. ’다선랑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사업자 선정권을 얻게 된 이유라고.”

그 말을 들은 노마들의 머리에 잔잔한 충격이 퍼져 나갔다.

“명분의 제공…!”

대리단가에게 다선랑은 지긋해지기 시작한 아미파를 떼어 내고, 사업지에의 지분을 절반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명분이 되어 주었다.

게다가 이제 사업이 굴러가기만하면, 사천당가가 가져간 지분은 아쉽지도 않게 될 터였다.

“대공자, 잠시!”

전대 가주 하나가 연소현을 불렀다.

“사천당가는 겨우 사업지의 지분만을 받았잖소. 그런데 대리단가가 당가의 영역에서 함께 사업을 하게 허락했다고? 그것은 계산이 맞지 않소.”

“정확합니다.”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사천당가는 그동안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던 낙양 진출을 위해 힘쓰고 있었지요.”

하지만 사업 분야가 겹치는 약선문이 낙양검가의 동반자였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동안 사공자가 다른 후계자들에 비해서, '부족하고 적은 지원'에도 감지덕지해야만 했던 이유기도 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그들을 위해서 검가 몰래, 그 진출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기로 했지요.”

모든 노마들이 외쳤다.

“죄악의 골짜기!”

그곳은 바로 대공자가 계략을 부려 얻어 낸 합작 사업 예정지.

그저 일개 마을의 규모에 불과했던 원래 예정지인 호두 마을과 죄악의 골짜기는 그 규모와 입지 조건이 달랐다.

사천당가가 낙양 진출을 위한 훌륭한 교두보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는 낙양에서 낙양검가의 눈을 속이는 것으로, 너무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직 크게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 어린 사공자로서는 할 수 없었던 일.

그렇기에 그 거래에 대한 사천당가의 신뢰는, 그 가진바 능력과 수준을 증명해 보인 대공자에게 향해 있었다.

또한 대공자는 당가의 피를 이은 사공자와 합작 사업을 운용하고 있기도 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던가.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정확합니다.”

그때 다른 노마가 외쳤다.

“아직! 아직이오!”

그가 침을 튀겨가며 연소현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모든 전제는 이 사업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것에서 시작하오!”

“그렇군. 그저 함께 시작한 것만으로는 그 두 적대 가문이 순조롭게 사업을 진행해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사업권을 가진 다른 가문들이나 상단들은 그 두 가문의 알력 다툼에 도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역시, 대인들의 계산 결과 또한 그렇습니까?”

연소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인들을 '전부' 한자리에 모신 것이지요.”

이제까지보다 환한 미소가 연소현의 얼굴에 걸렸다.

“대인들은 이 두 사업의 관리역으로 임명되셨습니다.”

"...!"

“그리고 따라서.”

이젠 숫제 모두가 멍한 얼굴로 연소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대인들은 사천당가와 대리단가의 '은인'이 아니라….”

연소현의 시선이 그들 하나하나를 스쳤다.

“사업권을 보유하고 진행되기만 바라고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가문과 상단들의 '귀인(貴人)'이 되신겁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것으로 본가로 돌아가신다면, 가문에서 또한 결코 대체 할 수 없는 귀인이 되시는 것이죠.”

좌중이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 * *

아무런 말도 없이 시간이 홀러갔다.

한참 동안 멍하게 있던 전대 가주 하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애초에 그것이 사천당가와 대리단가가 거래에 응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조건이었군.”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 '전원'정도는 되어야, 그 사업을 원활하게 관리할 수 있으니.”

그리고 그때 그들은 깨달았다.

“그렇다면?!”

“대공자가 이 북망산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이유가 바로…!”

연소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진한 미소를 지을 뿐.

“그랬군! 그랬어! 그래서 이 북망산의 가문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것이야!”

"그래야만 우리가 자발적으로 전부 모이게 될 테니까…!”

연소현이 한 행동의 결과.

그들이 마지막에 함께 모였던 것은 북부 전쟁의 결의 때였을 정도였으니.

황제의 명이 아닌 이상에야, 절대 모이지 않았을 이들이 '자진해서' 한자리에 모였다.

만일 다른 방식으로 이들을 모으려 했다면, 제각기 계산하고, 의심하고, 재기 바빠, 시간만 흘러갔을 터였다.

"...."

좌중이 충격으로 인한 묵직한 침묵 속에 가라앉은 채, 시간이 흘렀다.

“여기 계신 것이더냐?!”

얼마나 지났을까, 정원의 저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 안 됩니다!”

“정원으로 누구도 출입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집사들이 결사적으로 외치는 소리.

“이 무례한 것들이! 당장 이거 놓거라!”

“감히 우리가 대체 누군질 알고 이러는 것이냐?!”

와장창,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들이 들린 끝에, 한 무리의 인영이 정원에 들이닥쳤다.

“저쪽이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정원 한구석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단숨에 달려왔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전대 가주들을 찾아 말리러 온 몇몇 가문의 혈족들이었다.

각자의 저택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큰어르신들의 행방을 찾던 그들은 대로에서 만났다.

그리고 대공자의 행렬이 이 공손가문의 저택 앞에 포위되어 있는 기묘한 광경을 보고 강제로 침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부님! 대체 공손 가문에서 뭐 하시는…?!”

가장 먼저 달려왔던 중년인의 얼굴에서 모든 핏기가 남김없이 빠져나갔다.

“뭐 하십니까? 어르신들은 찾으셨습니까?”

뒤늦게 헉헉거리며 쫓아온 이들이 마찬가지로 돌과 같이 굳었다.

그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것이다.

황도십육가문.

그 황도십육가문의 전대 가주 중에 무려 열다섯 명이 이 한자리에 있었으니.

"어, 어르신들. 대체 여기서…. 아니, 어째서…?”

옆에서 들려오는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다른 가문의 일원 또한 비명처럼 외쳤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그때 앞으로 나선 공손나강이 말했다.

“다들 뭐 하나? 이들을 전부 잡아다가 지하 뇌옥에 가두어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감히 다른 십육가문의 혈족을 강제로 막을 수 없었던 경비무인들이 그들을 거침없이 포박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폭거입니까?! 이 일을 본가의 가주께서 아시면 큰 난리가 날 것입니다!”

“공손가가 다른 가문의 혈족을 가두다니요! 이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시지 못할 겁니다!”

"우리 입을 막아도 소용없습니 다! 전대 가주들께서 한자리에 모이셨다는 이야기가 황도로 들어가면, 반드시…!”

그들의 외침이 점차 멀어졌다.

“흠.”

작게 헛기침을 해 보인 공손나강이 좌증을 향해 돌아섰다.

“부득이하게 몇몇 가문의 혈족을 가두었지만, 유감은 없으리라 생각하오.”

그가 히죽하고 미소 지었다.

“우리는 한배를 탄 운명 공동체이니까. 그렇지 않소?”

노마들의 입가에 공손나강과 같은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소 대공자 덕분에 우리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하게 되었으니.”

“이 거친 여정 속에서 우리 중에 속이거나 배반을 할 이도 나올 것이오.”

“하지만 그자는 나머지 십오인 모두의 보복을 각오해야 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의 시선이 일치되어 연소현에게 향했다.

“결정적으로 여기 계신 대공자께서 우리가 서로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중간에서 조율을 해 주실 것 아니겠는가.”

연소현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은 호인(好人)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 * *

하지만 동시에 연소현은 그 마음 속에서 노마들을 비웃고 있었다.

조롱하고 있었다.

그의 눈 가장 깊은 곳에는 그들을 향한 경멸과 증오가 숨겨져 있었다.

그 감정은 너무도 격렬하고, 너무도 폭발적이라, 대체 어떻게 그것을 숨길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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