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50화 (150/350)

제25편 황도십육가문(皇都十六家 門)(5)

현재.

낙양, 북망산, 공손 가문 저택.

연소현에게서 건네어 받은 서류를 돌아가며 검토하던 전대 가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에게 상기된 두 사업에 대한 사업자 선정 권한을 부여한다.”

“으음."

“일단 서류만 보아서는 확실하군.”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제가 감히 대인들을 앞에 두고 가짜 서류를 내밀겠습니까?”

연소현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전대 가주들이 입을 열었다.

“좋소. 하지만 대공자.”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오.”

"'겨우 도장들이 찍힌 서류'만으로는 부족하지.”

공손나강이 턱을 쓰다듬으며, 연소현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공자, 이것을 손에 넣게 된 경위 전체를 말해 보시오.”

과정 전체를 알아야, 모든 검토를 마친 후,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당장에 사업권을 넘겨받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을 터.

하지만 노마들은 달랐다.

이들은 당장에 굶어 죽을 상황이라 해도, '남이 준 음식'을 입에 넣기 전에 의심과 확인부터 할 이들이었으니.

노가의 가주가 슬쩍 입술을 핥았다.

“분명, 대공자가 다선랑을 보호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었지.”

연소현이 작게 손뼉을 쳐 보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사업권에 대한 경위의 설명도 다선랑에서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지요.”

* * *

약 두 달 전.

겨울이 끝나 갈 때쯤.

아미파의 다선랑에 대한 패악질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

상관난화의 아버지, 성도지사는 자신이 아이들을 도울 수 없다는 괴로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한 장의 서신이 도착했다.

'제가 다선랑을 보호해 드릴 수 있습니다.'

서신을 읽기 시작한 순간에는 누군가의 못된 장난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줄을 보자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증거는 차후에 도착할 것입니다. 낙양검가 대공자, 연소현.'

* * *

“잠깐…!”

양(楊)가의 전대 가주가 손을 흔들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되새기며 연소현에게 물었다.

“그때는 그 다선랑이라는 아이들이 사천에서 출발하기도 전이 아니오? 이미 그때부터 다선랑의 일에 개입을 시작했었다는 말이오?”

연소현이 의아함을 담은 시선으로 양가의 전대 가주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시죠? 당연히 뭔가 일을 이루려면, 미리 밑 준비를 해 두어야지요.”

이미 예전부터 계획이 있었고 진행 중이었다는 연소현의 말.

“…그건 그렇지. 이야기를 계속 해 주시오.”

다른 전대 가주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서신은 어떻게 전달했던 것이오?”

연소현의 낭랑한 목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이 일은 밖으로 절대 새어 나가서는 안 됐고, 서신은 검가의 인물을 통해서는 전달될 수 없었지요. 검가 정보부처의 시선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니.”

낙양검가 정보부처의 위명을 익히 알고 있는 전대 가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당시 저는 막 포섭한 정보상을 통해 서신을 전달했습니다.”

* * *

흑골파가 사라진 직후.

연소현에게 검을 바친 세아가 웃었다.

“저는 무검자가 검을 쥔 모습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네요.”

연소현이 코웃음을 쳤다.

“이 의식은 네 동생이 먼저였다.”

"...네?!”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연소현이 품에서 엄중히 봉인된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서신을 성도지사가 아무도 모르게 손에 넣게 해 다오.”

* * *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지만, 서신에서 자신을 낙양검가의 대공자라 주장했던 이가 언급했던 '증거'라는 것은 도착하지 않았다.

곧 사천의 투자단과 함께 낙양검가로 향할 준비를 하는 다선랑.

성도지사는 자신의 집무실 안을 불안한 발걸음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도지사는 자신의 은사가 낙양검가의 대공자와 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은퇴 이후 강호를 떠돌던 그 은사가 마침 성도의 자택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떠올린 그는 한달음에 은사를 찾아갔다.

“그 아이가…, 검가의 대공자가 이 서신을 보냈다고?”

황실(皇室)에서 이문석학(二門碩學)을 역임하고 은퇴했던 주(株) 석학.

흰 눈썹이 길게 늘어져 눈을 가린 은사가 크게 웃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고민은 이미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은사에게서 검가의 대공자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뭔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많았던지라 성도지사는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친우들과 함께 다시는 사천 땅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각오를 마친 딸에게, 무엇이라도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만일, 그런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만….”

의아한 표정의 상관난화를 향해 성도지사가 말을 이어 나갔다.

“검가의 대공자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만나 보도록 하거라.”

“대공자님을요…?”

그리고 다선랑이 투자단과 함께 낙양으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낙양검가의 대공자가 보낸 '증거'가 도착했다.

* * *

현재.

'주 어르신 덕분에, 다선랑을 원각정으로 이끄는 수고가 많이 덜어졌었지.'

연소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현친왕(玄親王) 전하를 성도로 모시어, 아미파에게 인질이나 마찬가지였던 다선랑의 가족들과 직원들을 보호….”

“아니, 잠깐! 잠깐 기다리게!”

당황한 표정의 전대 가주가 외쳤다.

“아니, 갑자기 현친왕 전하가 이 이야기에서 왜 나오는 것인가?!”

“그분은 황제 폐하의 백부 되시는 분이 아니시던가?”

질문들이 쏟아지자 연소현이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칙서를 흔들었다.

“바로 거기서 이 칙서가 등장하는 것이지요.”

* * *

칩거가 끝나고 원각정이 손님을 받기 시작했었던 당일.

“만세(萬歲) 만세(萬歲) 만만세(萬萬歲)!”

예를 마친 연소현이 칙서를 정중히 받아 들었다.

"그대를 만나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시네.”

칙서를 전달한 사례감의 부태감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서서 자신과 함께 왔던 이들과 합류했다.

그들이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하자, 그곳에는 다른 이들과 같은 관복을 입고 섞여 들어왔던 한 풍채 좋은 중년인 하나만이 남았다.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덩치가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더냐? 네 어머니가 보시면 슬퍼하실 게다.”

혀를 차는 중년인의 모습에 연소현이 활짝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현친왕 전하.”

* * *

현재.

과거 황제의 오른팔로, 황실의 정보를 주무르던 공손나강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과거 현친왕 전하께서 알게 모르게 약 선녀를 도왔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었지.”

다른 전대 가주가 연소현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분은 한낱 친분만으로는 만나 뵙기가 불가능한 분이신데...?”

연소현이 수긍했다.

“확실히. 감히 제가 직접 방문했다고 하더라도, 만나 뵐 수는 없었겠지요.”

* * *

연소현 칩거 해제 이후.

낙양 교외佼B外) 지역,

어느 장원(莊園).

약왕이 엎드려 누운 중년인의 등에 침을 놓고 있었다.

“소유(素愈)의 아들, 소현이가 이제 곧 움직일 걸세.”

그 말에 중년인의 등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가, 다시 풀렸다.

“…축하할 일이군요. 어르신께는 손자 같은 아이 아닙니까?”

“자네에게는…?”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제가 평생 섬기는 것은 '그분'이지만, 그분의 아들은 그저 그분의 아들일 뿐이지요.”

* * *

현재.

“…그렇군.”

“확실히 약왕은 황가의 종친분들 마저, 뵙기를 고대하시니.”

“우리도 예약은 해 두었지만, 아직 순번이 돌아오려면 몇 년 남았지.”

다른 전대 가주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했다.

“그럼 대공자는 친왕 전하를 움직였던 것이오? 어떻게?”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그건 비밀입니다.”

* * *

마치 전쟁터의 장수를 연상케 하는 단단하고 커다란 체구의 현친왕.

그가 입고 있는 옷이 한낱 관복이라 하여 위엄이 가려지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현친왕 전하.”

연소현의 인사에 현친왕이 코웃음을 쳤다.

“반가워할 필요 없다. 그저 근처를 지나는 중에 소식이 들려 잠시 들렀던 것뿐이니.”

퉁명스러운 말투는 그 위엄과 어우러져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소현의 미소는 그치지 않았다.

“쯧쯧."

그는 연소현을 위아래로 홅어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어릴 적부터 네 녀석이 식사를 깨작거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허여멀건 얼굴은 무엇이냐? 아무리 검을 들지 않는다고 해도 체력 단련은 기본...”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아주 좋을 때를 딱 맞춰서 오셨습니다.”

“음?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연소현이 떠미는 힘에 당황한 그가 외쳤다.

“어허! 이놈, 힘 한번 대단하구나! 자, 잠시, 이 나를 끌고 어디로 가는 것이야?”

연소현은 그를 집무실로 밀어 넣으며 웃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시지요. 친왕 전하의 위엄에 어울리는 매우 중요하고 훌륭한 일거리가 있습니다.”

“아, 아니! 이 녀석이?!”

현친왕이 외쳤다.

“녀석아! 나는 친왕이란 말이다! 모르는 것이냐?! 이 내가 중대한 일에 관련되면, 황제 폐하께 누가된단 말이야!”

연소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그저 전하께서는 평소대로 여기저기 기웃거리시고, 가만히 앉아서 대접만 받으시면 되니까요.”

“하지만…!”

연소현의 눈이 반짝였다.

“게다가 이것은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일입니다.”

그 말에 입을 다문 현친왕이었다.

* * *

다선랑이 낙양으로 떠나고 난 이후

성도지사의 저택.

연회가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으음."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 불편한 소리를 내는 현친왕이었다.

그 소리에 주변에 모여 있던 '다선랑의 가족들'이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전하. 어디 불편하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술잔이 비었다! 전하의 술잔에 어서 술을 따라 드려라!”

“여기 받으시지요, 전하!”

현친왕은 이리저리 백성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고, 입에 넣어 주는 음식을 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 이 녀석, 연소현!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게야?!’

* * *

어린 나이에 훌륭한 성과를 낸 다선랑을 황제 폐하 대신 치하하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현친왕.

하지만 그들이 부재하여, 어쩔 수 없이 대신 그들의 가족들을 치하하는 중-이라는 '명분'으로 다선랑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있는 현친왕.

그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성도지사가 혀를 내둘렀다.

'친왕 전하를 움직이다니…!’

다선랑을 보호할 수 있다며 낙양검가의 대공자가 언급했던 증거.

그 증거가 바로 현친왕이었던 것.

'무슨 재주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일단 다선랑 아이들의 가족은 당분간 안전해졌다.’

성도지사는 자신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현친왕에게서 건네받은 연소현의 다음 서신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그의 시선이 바삐 움직이며, 서신에 적힌 연소현의 지시 사항을 읽어 나갔다.

제암진천경 -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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