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49화 (149/350)

제24편 황도십육가문(皇都十六家門)(4)

“물론 여기 앞에 계신 전대 가주님들께서, 다시 가주 자리를 되찾으시고, 황제 폐하의 곁에 서게 되는 기회이지요.”

그 말에 전대 가주 전원이 침묵에 잠겼다.

연소현은 무표정하던 그들에게서 잔잔하게 퍼져 나가는 감정의 흔들림이 남긴 잔재들을 보았다.

'역시, 이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가.'

그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자극되고, 연소현이 제시할 기회에 대한 기대감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먹이를 눈앞에 두고도 쉭쉭거리며 경계하는 뱀처럼, 그 경계심을 전부 놓지는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순우가의 전대 가주가 묵직한 저음으로 말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소.”

연소현이 활짝 웃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가 손을 들어 그들의 뒤편을 가리켰다.

“제가 초대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연소현의 말에 모두가 뒤를 돌아 보았다.

“홀홀, 다들 잘 지냈소이까?”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분들도 계시는구먼.”

정원의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한 그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충격이 떠올랐다.

“…이 정도의 인원이 출입했는데, 아무도 나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말이냐?!”

저택의 주인인 공손나강이 벌컥 화를 내자, 탁자에 도달한 이들 중 하나가 손을 저었다.

“아니, 애초에 이 정원에 아무도 출입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대가 아니었소이까? 감히 우리를 막지못한 것이라면, 그것이 그들의 죄겠지.”

누가 있어서, 감히 이들을 막겠는가.

이 북망산의 주인인 황도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을.

“기다리느라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그들은 연소현의 안내대로, 그를 마주 보는 형태로 길게 늘어앉았다.

거동이 불편하여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 공씨 가문의 전대 가주를 제외한 전원이었다.

“여기까지는 웬 행차들이오?”

못마땅해 보이는 공손나강의 말투에 새로 합류한 전대 가주들이 미소지었다.

“우리 또한 '기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오.”

그가 검버섯이 핀 손을 들어 연소현을 가리켰다.

“여기 대공자께서 우리 전체가 모여야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다고 했기에 굳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오.”

"하지만 실제로 전부를 모을 줄은 몰랐군.”

그들 중 하나가 연소현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남은 가주들 전체를 설득할 자신이 있다고 해서, 기다려 보긴 했는데 말이오.”

“실제로 우리 전체를 모으다니.”

공손가에 방문하기 전, 연소현이 방문했었던 가문들의 전대 가주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 말에 전대 가주 하나가 킬킬 거렸다.

“우리 전체가 모이는 일은 황도에 있을 때도 드문 일이었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오.”

그들이 마지막으로 한자리에 모였던 것은, 북부 전쟁에 대한 결의가 황궁에서 진행되었을 때였다.

그런 국가 중대 사태가 아니라, 그저 개인의 힘으로 이들 전체를 한자리에 모으다니.

가히 그것만으로도 위업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으나, 연소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는 아직 오히려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연소현은 적당히 악담을 나누며, 나름의 방식대로 회포를 풀고 있는 전대 가주들 하나하나를 살폈다.

꾸며 내던 감정 표현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권력을 향한 욕망을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은 상태.

'무표정의 상태'였다.

'이들은 표정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한자리에 모인 열다섯 마리의 뱀들.

그 뱀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척'하면서, 연소현을 교활한 시선으로 홀금흘금 살피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각기 다른 '온도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경계심이 앞서고, 누군가는 그저 호기심 수준에서, 누군가는 또 다른 수준의 감정으로.

그렇게 각기 다른 생각과 계산, 그리고 판단 속에서, 연소현이 먼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먼저 제안을 꺼내서는 안 된다.’

지금으로서는 부족했다.

이들의 제각기 따로 노는 감정선을 하나로 묶어야 했다.

열다섯 마리 뱀들의 머리를 한데로 묶어 내야 했다.

그렇게 하나로 머리들을 묶어 내야만, 각기 다른 감정을 가진 머리들이 아니라, 단 하나의 감정선을 가진 머리만을 상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게 만들려면, 저들의 무표정을 부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저들이 끓어오르고 있는 욕망을 밖으로 쏟아내게 만들어야 한다.'

누구랄 것 없이 연소현에게 달려들 정도가 되게 만들어야 했다.

'이들을 더욱 흔들 수 있는 것은 권력, 오로지 권력뿐!’

연소현이 일부러 시선을 끄는 큰 동작으로 걸치고 있던 흑잠사 외투를 벗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요.”

연소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전대 가주들의 시선은 연소현을 향하지 않았다.

"...."

"...."

그들의 시선은 전부 연소현이 벗어서 의자에 걸어 놓은 흑잠사 외투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들은 너무나 강렬하여, 마치 그 이글거리는 눈빛만으로도 흑잠사 외투를 불태워 버릴 것만같았다.

“…음?”

연소현이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는 '시늉을 했다.

“아! 이것 말입니까?”

연소현이 외투 사이로 비쭉 솟아있는 화려한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가 두루마리를 들자, 모든 전대 가주들의 시선이 그 두루마리를 따라 움직였다.

연소현이 두루마리를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계신 분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물건이겠습니다.”

그것은 연소현이 칩거를 풀고,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했던 날.

그날 받았던, 중원국 황제로부터의 칙서(勅書)였다.

"...."

연소현의 말에도 전대 가주들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누군가는 입을 조금 연 채로, 누군가는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침묵 속에서 그 시선만이 살아 꿈틀거리며, 칙서를 바라볼 뿐.

“대공자, 혹시….”

그들 중 하나가 연소현에게 떨려오는 손을 내밀었다.

“그 칙서를 좀 보여 줄 수 있겠나?”

그 말에 연소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내용이 궁금하십니까? 내용을 보셔도 별것 없습니다.”

연소현이 칙서를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낙양검가의 대공자가 이제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니, 앞으로 중원국과 황실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길 바란다는 내용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겨우 칩거를 끝낸 사람에게 황제가 직접 칙서를 보내는 일만으로도, 대단하긴 하지만.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낙양검가의 대공자이니, 그리 놀랍지는 않은 일이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오…!”

“어서…!”

누구랄 것 없이 그들이 내뻗은 손들이 탁자 너머로 부들거렸다.

마치 사막에서 고사(枯死)해가던 이들이 물주머니를 든 사람이라도 발견한 듯이.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기에는 아우성을 치는 노인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수십 개의 손이 허우적거리며 다가오는 광경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어쩔 수가 없군요. 조심히 다뤄 주십시오.”

연소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 중 하나에게 칙서를 넘겼다.

혹시나 칙서를 뺏으려, 다른 누군가 달려들지 않을까 했지만.

그들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연약한 것이라도 대하듯이, 칙서를 대할 뿐이었다.

“오오…!"

그들의 눈이 칙서를 핥듯이 타고 움직였다.

그저 내용 따위는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중원국 황궁에서만 만들어지는 황금 비단….”

누군가는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럽게 칙서의 바깥쪽 비단을 만지작거렸다.

“황궁의 침방(針房)에서 수놓은 황룡(黃龍)과 옥룡(玉龍)!”

누군가는 안쪽의 종이를 쓰다듬었다.

“아아, 이 황궁의 난죽헌에서 만든 종이의 감촉...."

누군가는 칙서를 향해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황상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진룡강묵(眞龍康墨)의 그윽한 향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노령으로 흐려져만 가던 그들의 눈에 활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검버섯과 주름으로 가득해, 죽은 돼지의 가죽처럼 보이던 그들의 얼굴에는 홍조가 돌아와 새살이 오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들의 굽었던 허리가 거짓말처럼 펴지고, 잠시 움직였던 것만으로 떨리던 앙상한 다리에는 근력이 돌아왔다.

만 가지 몸에 좋다는 약재도, 그 용하다는 명의의 진단도, 노령 앞에서는 전부 소용없었건만.

중원국 권력의 정점(頂點)을 상징하는 두루마리 하나.

그 두루마리 하나가, 노마들의 늙어 빠진 육신에 의지와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했다.

'아아! 이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감촉, 권력의 향기, 권력의 맛, 권력의 색, 권력의 즐거움, 권력의 아련함, 권력의 행복..!

그렇게 육신에 활기가 돌자, 생을 향한 의지가 돌아왔지만.

동시에 그들은 깨달았다.

더 이상 자신들에게는 그 젊은날의 빛나던 재치도, 번뜩이던 발상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여전히 비할 데 없는 경험과 나이를 먹어 갈수록 독이 오른 감각이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 결여가, 그 손실이, 너무도 뼈아프게 다가왔다.

“충분히 감상들 하셨다면, 이만….”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뻗어 나와 그들에게서 칙서를 회수했다.

그들의 시선이 칙서를 거쳐, 그 팔을 지나, 연소현의 얼굴을 향했다.

연소현의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눈이 노마들의 얼굴을 향했다.

그들의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난 터무니없을 정도의 욕망.

그 표정은 결코, 꾸며 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생생한,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전부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연소현을 탁자에 묶어 놓고, 그 두개골을 열어서, 그 신선한 두뇌를 꺼내어, 날것 그대로 먹어 치워 버릴 것 같은 표정.

철저한 계산으로 이해득실을 따지기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억누르려던 감정.

그 감정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 표정이다.'

더 이상의 무표정은 없었다.

연소현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뱀들의 머리가 하나로 묶였다.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연소현에게 넘어왔다.

“대공자. 슬슬 본격적인 이야기를 좀 해 봐야 하지 않겠소?”

“그렇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어.”

그들이 연소현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은근하고, 조곤조곤했지만, 연소현이 판단하기로는 달랐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뒷방 늙은이라지만, 마냥 한가한 사람들은 아니오.”

“흠흠.”

그들의 목소리는 연소현에게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 마치 거대한 고함처럼 들렸다.

지금 당장 그 기회가 무엇인지 말해라!

그렇게 충분히 뜸을 들인 연소현이 입을 열었다.

“물론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연소현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중경(重慶) 도시 개발 사업과 장강(長江) 수로 확장 정비 사업.”

연소현의 입술이 나풀거렸다.

"그 양대 사업에 대한 사업자 선정권을 하나씩 드리도록 하지요.”

"...!"

좌중이 술렁였다.

“그 두 사업에 대한 사업자 선정권이라고?”

“그 두 사업에 대한 영향력 확보는, 우리 십육가문의 현(現) 가주들 또한 곤란을 겪고 있는 부분이지….”

“확실히. 그 사업자 선정권만 가져가기만 하면, 가뿐히 가문 내에서 세력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을 테고....”

중경 도시 개발 사업과 장강 수로 확장 정비 사업은 황도에서 대단히 멀었다.

황도를 그 세력의 중심으로 두고있는 십육가문으로서는, 황도에서하는 것처럼 쉬이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 가주들도 그만큼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지만, 투입한 자원만큼의 성과는 거두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 전대 가주들이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투사할수 있는 사업자 선정권을 가문으로 가지고 간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되찾는 일 또한 단숨에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의 시선이 의문을 담고 연소현을 향했다.

“우리에게 사업자 선정권을 주겠다는 말은...."

“십육가문조차 아직 손에 넣지못한 사업자 선정권을 대공자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오?”

“그것도 한 장도 아니고, 우리 전체에게 줄 만큼?”

연소현이 빙긋 웃었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짧게 덧붙였다.

“현재, 이 연소현이 다선랑을 보호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전대가주들 전원의 얼굴에 강력한 의문이 어렸다.

“그 소꿉놀이 수준의 사업이나하는 아이들이, 대체 사업자 선정권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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