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48화 (148/350)

제23편 황도십육가문(皇都十六家門)(3)

“이야, 이렇게 위명이 쟁쟁하신 대인들께서 제 앞에 앉아 계시니,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연소현의 가벼운 너스레.

긴 탁자의 맞은편에 앉은 이들중 사도가의 전대 가주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하는 대공자야말로 실제로 이렇게 마주하니 헌앙하기가 짝이 없소이다. 그런데….”

다른 가주가 말을 가로챘다.

“대공자는 마치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이 보이오만?”

연소현의 미소가 진해졌다.

“별로 추측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또 다른 가주가 입을 열기 전에 연소현이 먼저 그들의 뒤편을 가리켰다.

"저 멀리 높디높은 이 공손가의 담 위로, 제이근위여단의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그저, 공손 대인께서 쫓아내겠다는 협박을 하시던 와중이었으니, 그러려니 했습니다만….”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 거대한 저택 어디에서도 사람이 다니는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눈치를 챌 수밖에 없지요.”

연소현 하나 때문에 그들 전체가 한 번에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떠돌면 그들의 체면에 흠이 가니까.

제이근위여단은 대로에 머물고있는 대공자 행렬의 시야를 차단하고, 그사이를 틈타 전대 가주들이 움직인다.

공손가 저택 내부의 모든 이들의 외부 활동을 중지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흠.”

노가의 전대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맞는 것 같군.”

그들 또한 서신을 주고받았던 인물의 실제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슬슬 지겹군요. 시험은 다들 이쯤 해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연소현이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인데.”

순우가의 가주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그 말에 연소현이 과장된 태도로 한숨을 쉬었다.

“다시 문턱을 마음대로 넘은 대가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그것도 좀 지겹습니다만.”

“대공자가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뭔가 거래를 할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거래라는 것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먼저 정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오?”

그러더니 각자 요구 사항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먼저 본 사도가는 이번에 하남성 북단에서 발견된 구리 광산에 대한 채굴권의 지분을 요구하오.”

“원가는 황호의 선박 이용료를 일 년간 면제해 주길 원하오.”

“복양가는….”

“그리고 또한….”

다들 그 가문의 가진 바 권력에 걸맞은 거창한 보상을 요구한다.

연소현은 그들이 떠들어 대는 것을 들으며, 속으로 조소했다.

어찌 권력을 탐하고, 권위를 욕 심내는 이들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라도 이리도 똑같은지.

자신의 것은 숨기고, 남의 것을 탐하여, 바닥없는 창고를 채우는것에 끊임없이 몰두하는 이들.

'이렇게들 나오시면….'

연소현이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척하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다루기 쉽지 않은가?'

무엇이 다루기가 쉽단 말인지.

감히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를, 그것도 일곱이나 되는 노마를 앞에 앉힌 채, 연소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연소현이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의 끝이 없을 것 같은 요구 사항이 드디어 끝을 보였다.

“이쯤 해 두는 것이 좋겠군.”

“그렇지. 대공자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이 이상은 부담이 되지 않겠는가?”

사도가의 전대 가주가 연소현의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이 정도라면 우리도 대공자와의 정을 생각하여, 많이 사정을 봐준 것이오.”

그리고 연소현의 입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전대 가주들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대공자는 뭐가 그리 웃긴 것인지…?”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소현이 손을 저어 단호하게 말을 끊어 버렸다.

하나가 입을 열면, 다른 하나가 또 입을 열고, 놔두면 끝도 없이 돌아가며 압박을 하려 할 것이 뻔했으니.

“대인들 또한 공손 대인과 마찬 가지입니다.”

연소현이 그들을 도발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이제 잊으셨습니까? 그 정도로 감각이 떨어진 겁니까?”

시퍼런 눈빛들이 칼날처럼 사정없이 날아드는 것 같았지만, 연소현은 깨끗이 무시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기 급급하여, 방문 순서니 뭐니 핑계를 대며 득달같이 달려들 오시다니요?”

연소현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이를 드러냈다.

“그저 자신의 순번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당장 뜯어먹을 수 있는 부위가 줄어드는 것에 애간장이 탔던 것뿐 아닙니까?”

연소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러니 이렇게 다들 기다리지도 못하고, 시정잡배처럼 한데 뭉쳐서 들이닥친 것이지요.”

누군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나고, 노성이 날아들고, 그 모든 반응들을 연소현은 방금 전처럼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제 그것밖에 되지 않으니, 이 문턱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것에 대해서, 이 연소현이 대가를 치를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연소현이 노골적으로 그들에게 조소를 보냈다.

“모르시겠습니까? 이제 대인들께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연소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쪽 사정을 많이 봐주신 것이라….”

연소현이 천천히 팔짱을 꼈다.

“지금 봐주고 있는 쪽은 제 쪽인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당장 중원국에 새로 득세하고있는 가문들이 아니라, 그대들을 제가 찾아 준 것만 해도….”

연소현이 이를 드러냈다.

“이 연소현이 과거의 인연 때문에 당신들의 사정을 많이 봐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순간 전대 가주들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연소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들이 지금 이렇게 뒷방의 늙은이 신세가 된 이유가 무엇이오? 여기 그것을 모르는 이가 있을리는 없겠지!”

저들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 뒷방 늙은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마는 상관없었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자신을 여기고 있을 테니까.’

연소현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혹여 이 방음 처리 완벽한 저택에서 누가 들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당신들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북방 전쟁을 기어코 벌였고, 결국 패했다!”

움찔, 몇몇 전대 가주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그들은 뭐라 더욱 소리를 높이며 목에 핏대를 세웠지만, 연소현의 목소리는 그에 지지 않았다.

“황상의 선처와 당신들이 애초에 노령이었던 덕분에, 당신들의 정계 은퇴는 몇 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외부에서 보기엔 자연스러워 보였지! 하지만 실상은 무엇인가? 이렇게 북망산에 앉아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연소현이 기세를 돋우어 더욱더 그들을 몰아붙였다.

"다들 늙고 병들고, 어쩌니 저쩌니 해도, 당장에 힘이 남아도는 것 같군!”

연소현이 껄껄 웃었다.

“좋아! 이 어린 녀석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고 싶은가?”

그가 손을 펼쳐 보였다.

“그렇다면, 당장에라도 한번 제대로 자웅을 겨뤄 보는 것이 어떠 하겠는가? 본 대공자는 얼마든지 그대들 전부를 상대해 줄 자신이 있으니!”

눈빛은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기백은 태산처럼 묵직했다.

“내가 당신들 전부를 상대하면서도, 과연 낙양검가의 소가주가 되지 못할 것 같은가? 그리고 가주가 되지 못할 것 같은가?”

연소현의 입에서 벼락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이 북망산 저택들의 주줏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지워 버릴 것이야!”

연소현이 전대 가주들을 오시했다.

“그리고 이 북망산을 새 십육가문으로 채워 넣을 것이다.”

연소현의 선언이 끝나자, 정원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여 가며, 삿대질을하고 침을 튀기던 전대 가주들이 어느사인가 모두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연소현은 전대 가주 하나하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감정의 편린만이 남아 있을 뿐, 제대로 된 표정은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연소현은 알고 있었다.

'드디어 이들의 본래 얼굴이 드러 났군.'

왜 그가 처음부터 저들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았던가.

어째서 그들이 당장에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처럼 구는 와증에도 그것을 무시했던가.

그 반응은 그저, 그들이 필요에 의해서 표현하고 있었던것 뿐이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상황에 맞춰 자신에게 유리하게 꾸며내고, 그것으로 상대를 압박하면서, 그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이해득실을 따질 뿐인 괴물들..

이들이 감정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마저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두고, 그 실리와 이해득실만을 따져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노회한 이들일 뿐.

지금은 뒤로 밀려났지만.

중원국 정치권력의 최정점에 그 오랜 시간 동안 군림했었던, 그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자산들은 지금도 이렇게 생생히 살아 있었다.

연소현이 먼저 상대했던 공손나강만 하더라도, 기괴할 정도로 상황에 맞추어 표정을 순식간에 바꿔 대지 않았던가.

'실로 인중 마물이라. 노마(老魔)라는 별명이 너무나도 어울리는 이들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연소현은 그들의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움직이기 위해서, 그들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더 이상 감정을 꾸며 내는 것을 멈추게 만드는 데까지 이른 것이었다.

"...."

연소현은 팔짱을 낀 채, 이제 아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노마들에게 과거 자신의 전성기와 스스로를 비교할 시간을 주고, 가문 내의 권력에서 밀려난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 되새길 시간을 준다.

그리고 과거 숱한 경험 속에서 연소현이 보내 주었던 '서신'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를 다시 한번 느낄 시간을 준다.

사람 하나 죽이지 않으면서, 사람의 심리를 자극하고, 움직이게 만들어 원하는 대로 일의 흐름을 만들어 냈던 연소현의 능력을, 그들이 설마 모르겠는가.

지금 연소현이 그 방식으로 그들을 흔들고 있음을 어찌 그들같은 노마들이 모르겠는가.

하지만 연소현은 기다렸다.

* * *

연소현과 손을 잡게 되면,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따를 수 있는지 계산하던 전대 가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그저 보상만 두둑하게 뜯어갈 생각이었건만.'

어느샌가 이 '어린 괴물'과 손을 잡는 것을 한 번쯤 고려해 보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자신이 있었다.

'휘둘리고 있군.'

알고 있었다.

그게 저 아이의 수법이라는 것도.

그가 했던 도발들 또한 그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저 패기 넘치는 어린 괴물이 서슴지 않고 보이는 배짱은 어째서인지, 자신의 깊은 곳에 억눌러 놓았던 감정을 건드렸다.

처지가 처지인지라, 억지로 눌러 놓았던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깨닫는 순간.

냉철하게 굴러가는 것 같던 차가운 계산이, 그 무한한 권력의지와 만나자, 긴 동면을 끝내고 꿈틀거리는 욕망을 토해 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소현이라는 어린 괴물이, 감히 어리다고 표현하기가 저어될 정도의 존재가.

이젠 매력적인 '기회'로 보이기 시작했다.

* * *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공손나 강이었다.

다른 이들이 합류하기 이전에 흔들어 두었던 것이 효과가 있었다.

그 덕에 연소현이 기다리던 대화의 물꼬가 열렸다.

“그럼. 대공자가 제시하는 거래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이오?”

딱히 상의도 없었지만, 누구도 그 질문에 의문을 표하거나 막는 이가 없었다.

더 이상 자질구레한 보상에 관한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제 그들에게 그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졌다는 뜻.

팔짱을 푼 연소현이 다시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여기 앞에 계신 전대 가주님들께서, 다시 가주 자리를 되찾으시고, 황제 폐하의 곁에 서게 되는 기회이지요.”

연소현은 만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러니까 다루기가 쉽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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