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편 황도십육가문(皇都十六家 門)(2)
북망산, 공손 가문 정문 근처.
제이근위여단에 포위되어 있던 와중, 아미파의 호신술 선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너는 이 상황에 뭘 그리 두리번거리는 것이더냐?”
“그, 그것이….”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사감 비구니가 낮은 목소리로 질타하자, 호신술 선생이 목을 움츠러들며 대답했다.
“다선랑 아이들이 탄 마차가 보이질 않는 듯하여….”
“뭐라고?”
* * *
북망산 공손 가문 저택, 정원.
“자아, 대답은 무엇이오? 대공자! 어서! 어서 대답해 보시오! 제발 대답좀 해 보시지요!”
광기가 번들거리는 얼굴로 다그쳐 오는 공손나강의 위압적인 기세에 연소현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 긴 한숨에 공손나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한숨은 방금까지 굳어 있던 표정과는 달리, 조금의 부담감도 느끼지 않는 가뿐한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건 부담감이 아니라, 오히려…?’
공손나강이 자신의 앞에 앉은 대공자의 표정에서 무언가 추론하려고 할 때, 연소현의 입이 다시 열렸다.
"공손 대인. 어찌 이리도 쪼그라들어 버리셨습니까?”
연소현이 '불쌍하고 한심한 것'을 보는 눈으로 공손나강을 바라보았다.
"무, 뭣이?!”
공손나강이 펄쩍 뛰었지만, 연소현의 말은 그보다도 더 빨랐다.
“이제 막 칩거에서 벗어난 본인을 만나자마자 가진 것을 벗겨 먹으려 들다니….”
연소현의 어조는 느긋하고, 평온했다.
그 자세는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꼿꼿했다.
“마치 노상강도나 다름없는 행동 아닙니까?”
“노, 노상강도?!”
연소현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소. 노상강도나 마찬가지구려.”
“이, 이, 이익…!”
그 말에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마치 귀신의 형상처럼 변했던 공손나강이었다.
하지만.
“…호오?”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에 작은 조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변검술사(變臉術士)가 가면을 바꾸는 것 같았다.
"아하…! 통하지 않소. 통하지 않아. 도발을 통해 이 공손나강의 위치와 자존심을 자각하게 하여,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 들다니.”
그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 공손나강이 아는 대공자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얄팍한 심리전이오.”
그 말에 연소현이 눈을 들어 공손나강을 바라봤다.
“심리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음..?”
연소현은 여전히 불쌍하고 한심한 것을 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까?”
연소현의 입이 벌어지고 하얗고 가지런한 치열이 드러났다.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늘어놓았다.
마치 나이가 들어 귀가 먹기 시작한 노인을 위하듯이.
“본인이 아는 '그 과거의 공손나강'이라면, 이 시점에서 겨우 노상강도처럼 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연소현이 혀를 찼다.
“언제부터 그리도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버린 것입니까? 범인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던 배포와 배짱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그 번뜩이던 재치와 끝이 없어 보였던 지혜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연소현이 한숨을 쉬었다.
“…본인이 기억하는 그 과거의 공손 대인(大人)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습니다.”
“……?!"
공손나강이 몸을 일으켰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 그 무슨…!”
헐렁한 비단옷 사이로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몸에, 굽어가기 시작한 허리.
그리고 그저 신경질적일 뿐인 인상의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무슨….”
몇 번이나 연소현의 말에 반박하려던 노인이었다.
하지만 연소현은 그가 반박할 여유 따위는 주지도 않았다.
“본인이 알고 있는 공손나강이란 인물은 말입니다….”
연소현이 아련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 공손나강이라는 거대한 환관은, 감히 다른 권력자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을 하던 존재였습니다.”
연소현은 허공에 이리저리 손짓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 나갔다.
“그는 위세를 잃어 가던 공손가를 다시 일으키고, 자신을 황상의 가장 가까운 곁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누구도 해내지 못한 발상을 해냈지요.”
연소현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는 우선 전대 왕조 때 남은 야사(野史)에서 언급되던, '운(連)'이 인공 호수의 건립으로 말미암아, 궁전에 충분히 깃들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연소현의 목소리가 커졌다.
“전대 왕조의 수도였던 낙양에 유적으로 남아 있던 그 궁전 말입니다!”
이야기가 거침없이 이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는 소문이 충분히 황도까지 전해지자, 그 유적을 전부 '해체'하여, 모두 현재의 수도인 황도로 옮겼습니다!”
궁정을 해체하여 옮기다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연소현이 소리쳤다.
“마지막 주춧돌 하나까지!”
연소현이 허공에 손짓으로 우마와 사람들이 황도로 길게 이어지는 모양을 만들었다.
“당시 동원되었던 말과 소가 무려 오천여 두. 인부가 이만여 명! 과연 그 행렬이 낙양에서 황도까지 이어질 정도였다, 그런 노랫말이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노래하듯 이야기하는 연소현의 목소리에, 공손나강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아련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이 깃들었다.
'어찌 이리도 쪼그라들어 버리셨습니까?’
연소현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가문의 재산을 모조리 써 버린 것도 모자라, 조상들을 모시는 북망산의 이 저택마저도 저당 잡히셨다고 들었지요!”
연소현이 거대한 저택을 가리켰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가문의 모든 인원이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그때 젊은 가주였던, 그는 끝까지 계획을 추진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성공했지요!”
연소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그 충정을 선황제께 인정받아 재산 따위로는 결코 얻을 수도 없었던 자리까지 이르렀으니까!”
연소현의 이야기가 끝나자, 정원에는 침묵만이 길게 감돌았다.
"...."
이제 그곳에 있는 것은 더 이상 귀신과 같은 기백을 뿜던 공손나강이 아니었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그저 한 명의 노인이 남았을 뿐.
잠시 바닥을 바라보던 공손나강이 고개를 저었다.
“…제법 훌륭한 이야기 솜씨였소, 대공자. 하지만….”
그 또한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공손나강의 귓가에 연소현의 목소리가 닿았다.
“아무리 본인을 '시험'하고자 한 협박이었다지만, 그 협박조차 배포가 줄어 버리다니….”
시험이라는 말에 공손나강의 입이 뒤틀렸다.
“시험이라니…?”
연소현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공손나강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연기 중이십니까? 본인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연소현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적 없었던, 서신 너머의 인물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판단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공손나강의 얼굴이 굳었다.
“확실히. 서신을 주고받았을 때의 나이를 생각하면, 연소현이라는 사람이 그 서신들을 전부 썼던 당사자라는 것을 믿기 힘들기도 하셨겠지요.”
어떠한 이유에서 낙양검가가 집단적인 지성을 활용하여 전략적으로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
충분히 그렇게 의심해 볼 수 있을 사안이었으니.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어떻게 아셨소?”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 * *
북망산, 공손 가문 정문 근처.
'하녀단장. 뭔가 이상하오.’
호위제장의 전음에 하녀단장, 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에게서는 살기도 투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 * *
연소현이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첫째. 공손 대인께서는 저를 개인 회랑에 끌고 다니시며, 끊임없이 예술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셨지요.”
서신을 통해 예술 교류를 하던때처럼, 젊은 스승이라 친숙하게 부르며, 분야를 계속해서 바꿔 가며 던졌던 질문들.
자신이 제자이니 스승에게 질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던 질문들.
연소현의 두 번째 손가락이 펴졌다.
“그리고 예술 분야에 대한 검증이 끝나자, 이제는 '노상강도'를 위장하여 압박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려 하셨지요.”
연소현이 빙긋 웃었다.
“설마 그 노상강도의 위장이, 위장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
침음을 억지로 삼킨 공손나강이 입을 열었다.
“시험에 대한 것은 대공자가 맞소. 하지만 대공자는 옛날이야기나 늘어놓았을 뿐 아직….”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운이 깃든 궁전의 소문을 퍼뜨린 것이 공손 대인 본인이었다는것을 아는 이는, 이 연소현밖에 없을 텐데요?”
“그것은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을수도 있지 않소? 그러니 지금부터 이 공손나강이 난제를 하나 던질 것이니….”
연소현이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설마, 우리 사이에 '공짜'로 정치적 난제 하나를 풀어 달란 소리를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것도 시험을 핑계로?”
또다시 정곡을 찔린 공손나강이 손을 저었다.
"이 공손나강 또한 그리 뻔뻔하지는 않소. 그저 작은 문제 하나를… ”
연소현이 말을 끊어 버렸다.
“이쯤 주고받았으면 시험은 충분했고, 이제는 시간을 끄시는 겁니까?”
공손나강의 안색이 변했다.
“시간을 끌다니…?!”
연소현이 정원 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그만두셔도 되겠습니다. 혹시 누군가를 기다리시던 것이라면 그분들은 전부 도착한 것 같으니.”
연소현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 본 공손나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도착했는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섯 명의 인영(人影) 이었다.
“미안하오, 대공자.”
"...."
공손나강이 다시 고개를 돌려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다시금 음흉하고 기괴한 표정이 돌아와 있었다.
“말씀하셨던 대로, 이 노인네가 이제 배포도 배짱도, 부쩍 쪼그라들어서 말이오.”
그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내, 지원군을 좀 불러 보얏소.”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자, 하나같이 값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의복과 장신구를 걸친 노인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도(司徒)가, 노(盧)가, 원(袁)가, 순우(淳于)가, 복양(濮陽)가, 모(牟)가.
그들은 연소현이 아직 만나지 않았던, 여섯 개 가문의 전대 가주였다.
“대공자. 혹여라도 큰 걱정일랑 접어 두시오. 다들 대공자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것뿐이었으니 말이오.”
조금 전에 자신의 입으로 '지원군'이라 떠들어 놓고는, 연소현을 압박하기 위해서 은근한 조롱을 던지는 노마였다.
"다들 그동안의 정이 있으니, 아무래도, 후순위로 인한 무례를 조금은 눈을 감아 주….”
낄낄하고 웃음을 터트리려는 공손나강을 무시하고, 연소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실제로 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이라고 합니다.”
연소현의 무시에 공손나강의 주름이 순간 푸들거리며 떨렸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이제 그와 같은 급의 인물이 여섯이나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반갑소, 대공자.”
반대편에 늘어선 전대 가주들이 그런 연소현에게 일제히 손을 모아 인사했다.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인 그들에게 누가 대표로 인사를 건네어 오는 일은 없었다.
다들 연소현은 배려하지도 않은 채, 제각기 자신을 소개하며 한데 뒤섞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을 뿐.
누가 누군지도 모를 상황이었지만, 연소현은 당황하지도 않는 모습이 었다.
"자, 다들 서 계시지 마시고 이쪽으로들 오시지요.”
연소현은 더 넓은 탁자와 더 많은 의자가 놓인 곳으로 그들을 안내 했다.
마치 자신이 이 저택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은 당당하고 뻔뻔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
그 모습을 뒤에서 노려보는 공손나강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다른 것은 제쳐 두고서라도, 저 뻔뻔함은 서신에서 느꼈던 것 이상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