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46화 (146/350)

제21편 황도십육가문(皇都十六家門)(1)

낙양, 낙양지사 집무실.

공무가 끝나고 퇴청이 가까워진 시각.

심신을 평안하게 한다는 향내가 집무실에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이번엔 어깨 쪽을 좀 더 강하게 주물러 보아라.”

"예, 지사 어르신!”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침상 위에 엎드린 낙양지사의 말에, 전문 안마사가 힘차게 어깨의 혈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어이쿠, 좋구나! 아주 좋아!”

낙양지사가 아주 함박웃음을 지으며, 극락에 온 것 같은 기쁨을 즐겼다.

“너는 이 어르신께서 이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얼마나 어려운 길을 걸었는지 알고 있느냐?”

전문 안마사가 고개를 저었다.

“저 같은 천것이 감히 나랏일을 알겠습니까? 그저 수많은 높으신 분들께서 낙양지사 자리에 오르고싶어 하신다는 이야기는 귀동냥으로나마 들어 보았습니다.”

“그래. 바로 그렇다. 이 자리가 모든 최고위 관료들이 꿈꾸는 바로 그 자리이지!”

낙양지사의 말은 조금의 과장이나 거짓이 없었다.

낙양지사의 자리는 중원국 모든 지사 중에 가장 권력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최고위 관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자리면서, 모두가 가고싶어 하는 자리였다.

“역시! 이 잡것이 다른 것은 몰라도 안마는 좀 아는지라, 이렇게 안마만 해 보아도, 천하대인(天下 大人)분들은 그 타고난 골격과 혈자리부터가 다름을 잘 알고 있습 죠!”

“크하하! 뻔한 아부이지만, 오늘 만큼은 이 어르신께서 받아 주마!”

부임한 지 몇 달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매일매일이 행복한 낙양지사였다.

낙양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낙양 검가로, 지사라는 자리는 거의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지만, 그것이 이 자리의 묘미였으니.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같지만, 검가가 알아서 잘하겠지.'

그저 모든 것을 낙양검가에 맡겨놓고,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낙양검가에서 받으며, 최고위직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락을 즐기는 것.

그것이 낙양지사의 경쟁률이 그토록 치열한 이유였다.

“지, 지사님!”

집무실의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뭐야?!”

“급보입니다!”

낙양지사는 벌컥 화를 내려다가, 문관(門官)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화를 참았다.

누운 그대로, 안마를 받으며, 귓가로 들려오는 보고를 듣던 낙양지사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사라졌다.

“너, 너는, 당장 물러가거라!”

낙양검가 외원의 요청으로 접객당에서 보내 준 초일류 안마사가 대번에 쫓겨났다.

“그 보고가 사실이더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런 중대한 소식으로 장난을 칠 정신 나간 이는 이곳에 없음을 잘 알고 있는 낙양지사였다.

잠시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을 뿐.

“대공자가? 낙양검가의 대공자가 북망산을 방문했다고? 그것도 가문들을 일일이 방문하고 있다고…?”

속곳 차림으로 침상에 걸터앉은 그가 다리를 덜덜 떨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건, 큰일이다. 예삿일이 아니야. 내 임기 중에 벌써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어딘가 최고위 관료치고 모자라 보이는 낙양지사였지만, 결코 그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다.

낙양지사의 자리는 그 긴 시간을 제국에 봉사하면서, 그 경력상에 조금의 책이 잡힐 일조차 하나 남겨 두지 않아야 최소한의 자격이 생기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 대공자라는 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미친 짓이야. 그자는 자신이 무슨짓을 하는 건지 알고나 있는 것인가?”

그 십육가문을 자신의 위세와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용한다?

정신 나간 짓이었다.

그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다면 거래다! 뭔가 거대한 거래가 있을 것 같구나! 이 낙양을 뒤흔들 만한 거래가 있을 것이야! 이건 천재지변이다! 천재지변이야!”

과연 중원국에서 수위권을 다투는 보신 능력을 소유하여, 낙양지사에 오른 인물답게, 상황 파악이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당장 내 측근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아무도 퇴청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문관이 구르듯이 집무실을 빠져나가 달렸다.

“그런데, 도대체 그 대공자라는 작자는 무슨 생각인가?”

낙양지사가 손발을 덜덜 떨었다.

“십육가문이라고! 십육가문! 절차를 거쳐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휘저으면, 거래 이전에, 그 방만함의 대가만 하더라도 상상을 초월할 터인데…!”

* * *

낙양관청.

한 중년인이 관청 안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가고 있었다.

“게 비키거라!”

그와 부딪친 문사 하나가 서류를 흩날리며 나자빠졌지만, 그는 본척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검가의 대공자를 태연하게 집 안에 들이셨다니…!’

그는 다름 아닌 공씨 가문의 넷째 아들이었다.

'어서 황도에 계신 큰형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노망이 난 아버지가 낙양검가의 후계자 다툼에 끼어들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가주로 복귀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는 것인지는, 그가 알바 아니었다.

그가 할 일은 조금이라도 빨리, 황도의 본가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뿐.

그리고 그 시각 달리고 있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비켜라! 전부 비키거라!”

십육가문에 속한 다른 일원들 또한 황도의 본가에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눈썹이 휘날려라, 달리는 중이었다.

대공자 연소현이 한 일은 초대장 없는 방문에 불과했지만, 그 여파는 점차 상상도 할 수 없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 * *

낙양 북망산, 공손가, 식객 숙소.

수십 명의 집사와 하녀들이 식객 숙소를 일일이 방문하여, 식객들에게 정중하게 안내를 하고 있었다.

“객들께서는 이 시각부로 외부 출입을 삼가시고, 이후 안내가 다시 있을 때까지 실내에 머물러 주시길 바란다는 주인님의 간곡한 부탁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안내라는 형식을 빌려 부탁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통지였다.

그렇게 이 거대한 저택 부지에 오가는 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 * *

중앙 정원.

“호오?”

공손나강이 새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이 공손나강이 정확히 들은 것이 맞소? 지금 대공자께서 값을 치를 준비를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오?”

더 이상 젊은 스승이라는 친근한 칭호는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공손 가문의 전대 가주와 낙양검가의 대공자 뿐.

“솔직히 이 공손나강은 잘 모르겠소이다. 이 북망산을, 이 십육가문을, 이 공손 가문을, 대공자께서는 설마 무슨 마음씨 좋은 친구들이 모여 사는 동네 뒷동산처럼 여겼던 것은 아니지요? 아니겠지요. 아무렴.”

귀신 같은 표정의 노인이 눈에 흰자를 가득 드러내며 말을 홍수처럼 퍼부었다.

“이 공손나강. 검가 내부 사정엔 정통하지 않았지만, 감히 짐작해 볼까요?”

말을 내렸다가, 올렸다가.

자기 내키는 대로 말을 주워섬기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것은 말을 주워섬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집어삼키는 것 같은 환관 특유의 기이한 말투였다.

“검가의 셋째 공자 쪽은 지금 건설 부지 쪽 일로 정신이 없을 터이니, 둘째 공자 쪽인가? 셋째 공자가 손이 모자란 틈을 타서 덮쳐 들어오는 둘째 공자 쪽에 한방 먹여 주기 위해서인가?”

과연 앉은자리에서 그 복잡한 낙양검가 후계자 다툼의 정치판을 훤히 꿰차는 것이, 이자가 과거 어떤 자리에 있었던 인물인가 다시금 되새기게끔 했다.

“아니면 자신이 돌아왔음을 이 낙양과 저 멀리 황도에 거창하고 화려하게 알리고 싶어서였을까요? 과연, 과연. 그 오랜 시간을 칩거하다가 십육가문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면, 훌륭한 화젯거리가 되었겠지요.”

그의 눈알이 떨리고 시선이 구불거리며 끊임없이 연소현의 표정 변화를 살피고,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을 때마다 그 눈동자 깊은 곳에 가학적인 쾌감이 어렸다.

“사실 이유야 아무래도 좋소. 아무래도 좋아.”

그가 혼자서 킬킬거리면서, 침을 튀기면서 웃었다.

“그러나….”

한참을 그렇게 웃더니, 이번엔 대뜸 낯빛을 전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굳혔다.

그 표정 변화만으로 된서리와 같은 박력이 주변을 차갑게 내리누르는 듯했다.

그가 슬금슬금 탁자 위를 기어오는 형상으로, 그 면상을 대공자 연소현에게 들이밀었다.

그 더운 입김이 대공자 연소현의 긴 속눈썹을 흔들었다.

“과거의 인연을 통해 쌓았던 호의를 통해서 십육가문을 이용하는 일이 저렴한 대가로 용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오!”

노인은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앞선 가문의 노인네들이 뭐라고 했든, 어떤 조건에 납득했든, 어떤 거래에 만족했든, 하등 상관없소!”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렴! 크게 잘못 생각하신 것이지. 한참을 잘못 생각하신 것이야!”

그러고는 마귀의 앞발 같은 손을 들어, 탁자를 마구 내리쳤다.

“자아! 그러니 이 공손나강에게 그 값을 한번 제시해 보시오! 납득이 갈 만한 거래를 제시해 보란 말이오!”

감히 공손가를 열 번째로 방문한 대가!

평생을 일인지하(一人之下)의 위치에서 살아왔던, 평생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며 살아왔던, 그 명예에 입힌 상처의 대가!

“하지만 그 전에! 대공자는 똑똑히 기억하셔야 할 것이오!”

* * *

공손가 정문 앞.

대로의 한편에 준비된 공간에서 대기하던 대공자의 행렬.

“경계 태세! 경계 태세!”

하녀단장이 외치자, 하녀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마차 주변에 벽을 만들었다.

호위제장과 그 예하 호위무사들이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말을 뒤로 물리면서 검의 자루를 쥐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뽑아든 검이 보이지도 않는지, 호위무사들의 기세가 느껴지지도 않는지, 제이근위여단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포위 진형!”

그러고는 날이 선 동작으로 대공자의 행렬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날카로운 어조로 외치는 하녀단장의 앞에 태연한 걸음으로 다가온것은 여단 지휘관이었다.

"'요청'이 들어왔다. 그대들은 언제든지 본 지휘관이 명령하면, 북망산에서 철수할 수 있게 준비를 하도록.”

그는 자신을 겨누는 수십의 칼날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철수?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수 있는 것은 본가의 대공자님뿐입니다!”

“그래?”

지휘관이 팔짱을 꼈다.

“우리 근위대에게 칼을 겨눌 수 있는 것은 반란군뿐이라는 것도 잘 알아 두어야 할 것이야.”

투구 아래서 지휘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 서늘한 눈빛은 오싹하기 짝이 없었고,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더욱 차가웠다.

* * *

낙양지사의 집무실.

“지사님! 지사님!”

문관이 문을 부수듯이 열어젖히고 들이닥쳤다.

“또, 또 무슨 일인가?!”

최측근들과 함께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할 방법을 궁리하던 낙양지사가 펄쩍 뛰었다.

“북망산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뜸 들이지 말고, 당장 전령의 말을 전하거라!”

거친 호흡에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리던 문사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켜고 외쳤다.

“지금부터 그 누구도 퇴청하지 말고, 관청 내에 낙양 모든 고위 관료들을 대기시키라는 '요청'이십니다!”

* * *

과거 다른 이도 아니고, 그 낙양검가의 ‘가주'가 '노마(老魔)'라 불렀었던 자가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대공자. 똑똑히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오. 혹여나 그대가 조금이라도 만족할만한 값을 치르지 못한다면….”

노마의 입가가 길게 벌어지며, 미소같은 것을 만들었다.

“대공자는 당장에 북망산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오.”

그 입에서 거침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는커녕, 낙양 전체의 비웃음이나 사게 되겠지!”

낙양검가의 대공자가 자신이 벌리고 있던 입으로 알아서 걸어 들어왔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할쏘냐!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였다.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정도의 성의를 보여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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