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44화 (144/350)

제19편 가장 무서운 무사 (4)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대회의실.

책사 하나가 외쳤다.

“무언가 태상가주님과 십육가문간에 밀약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대공자의 행보는 설명이 되지 않아!”

옆의 책사가 받아쳤다.

“멍청한 놈! 그런 밀약이 있었다면, 그 어찌 대공자만이 그 밀약의 존재를 알고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냐?!”

“그, 그건 태상가주가 대공자를 아꼈기 때문일지도…!”

다른 책사가 끼어들었다.

“태상가주가 대공자를 칩거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잊었군! 게다가 과거 가문 대 가문의 밀약이 있었다면, 현재는 최고 운영 회의가 그 밀약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책사는 탁자에 머리를 박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과연 방문 순서에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을까? 혹시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순서대로 방문한 것 자체에 무언가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늙수그레한 책사가 침을 튀겼다.

"애초에 가문 대 가문의 밀약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밀약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침을 뒤집어쓴 책사가 핏대를 세웠다.

“멍청한 낙양 출신 놈들! 아무런 논리적 기반도, 근거도 없는 자신들의 주장을 지키려고 계속 무리한 가정만 더해 가고 있구나!”

그 말에 낙양 출신 책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 바다 비린내에 뇌까지 절여 버린 항구 출신 촌놈들이…!”

“지금이라도 짐을 싸서 돌아가서 해적 무리에 들어가 약탈 계획이나 세우시지!”

강남 출신 책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몰려들었다.

“낙양 바닥에서 유흥에 빠져 뼛속까지 물렁물렁해진 쭉정이 같은 놈들이 감히!”

“서책이나 만지작거리던 문사 출신들 따위가 해적을 무시해?! 당장에 나 혼자서 네놈들 전부를 때려 눕혀 주마!”

분위기가 좋고, 일이 잘 풀릴 때는 드러나지 않지만.

안 좋은 상황 속에서 내재된 갈등이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기폭제와 같은 법.

“하아….”

급하게 물러난 몇몇 책사들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들이 떠들어 대고 있는 말들은 그저 나오는 대로 뱉고 있는 것일 뿐.

사실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책사들이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나름 이 바닥에서 날고뛴다는 이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되니, 도대체 무슨 책략을 논할 수 있겠는가?”

혈기가 왕성하거나 성질이 급한 이들이 그저 답답한 마음에 폭주하는 것뿐.

그때 누군가의 주먹질이 시작되었고, 책상과 의자들이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회의장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만!”

내공을 담은 외침이 먼저 울려 퍼지고는, 곧 폭탄이라도 터진 것같은 굉음과 충격이 대회의장을 뒤흔들렸다.

기가 약한 책사들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릴 정도였고, 강남에서 포격음에 익숙해졌던 이들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모두의 시선이 단상을 향했다.

벽에 일권(一拳)으로 거대한 구멍을 뚫어 버린 하후 장로가 큰 소리로 웃었다.

“다들 머리를 좀 식히는 것이 좋겠다!”

모두가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손을 내저었다.

“지금부터 다들 나가라! 나가서 밥을 먹든지, 술을 마시든지, 혼자 수음을 하든지, 평소에 좋아하는 짓거리들을 하며 머리를 좀 비우라는 말이다!”

그가 처음 보았던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 그대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집합령이 떨어질 때쯤이면, 우리 장로들이 여러분에게 제대로 된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일찌감치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던 책임책사 하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시점에서의 개입이군.”

그와 함께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다른 책임책사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대공자의 첫수는 대응할수 없는 수였어. 그건 대공자 자신의 압도적인 위상을 이용한 수였으니.”

“우리는 대공자의 신산이라 불리는 지략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말일세.”

“처음부터 방향성을 잘못 잡았던 것뿐이야.”

“그렇지.”

"그런데 말이지….”

묵묵히 함께 움직이던 책임책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갓 칩거를 끝낸 대공자가 어떻게 그런 위상을 가진 것이지?”

대답은 없었다.

* * *

이공자 진영, 장로 휴게실.

"...."

하후 장로가 문 여송연에서 연기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연초든, 담뱃대든, 뭐든 홉연을 하는 모든 장로가 그저 입에서 연기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가운데 놓인 재떨이는 수정을 깎아 만든 예술품이었지만, 담뱃재와 피우다 꺼 버린 연초 따위로 원래의 아름다움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에는 생기와 의지가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짚어 봅시다….”

연기를 피해 창가에 서 있던 장로가 오랜 침묵을 부쉈다.

“대공자가 유명한 예술가라는 점이 은퇴 가주들과의 접점임은 분명한 것 같소.”

그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처음부터 그것 말고는 접점을 찾기가 힘들었소.”

급한 불을 끄고 되돌아왔던 대선 상회의 책임자, 안 장로가 자신의 안경을 추켜올렸다.

“최상위 예술계는 폐쇄적인 정도로만 따지자면, 북망산과 마찬가지지.”

적어도 여기에 모인 낙양검가의 장로들은 누구 하나 예술을 예술의 관점에서 보지 않았다.

물질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낙양검가 장로 대부분에게 있어서, 예술품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재물(財物)이었다.

소비재, 장식품, 혹은 전문가가 권하는 방식으로 구매하고 판매하는 투자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술품 시장에 해박했다.

위치상 자주 만나게 되는 고위 관료들을 상대하기 위해 요구되는 직업적 전문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십육가문의 전 수장쯤 되면, 사실상 중원국 예술계의 원로쯤 되는 이들이오.”

“그런 그들이 예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공자를 총애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대공자는 시, 서, 화뿐만 아니라, 석공, 목공, 죽공 등의 도예 부문을 넘어서, 잡기(雜技)라고 불리는 영역들까지도 능하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 * *

낙양 북망산, 공손가.

공손나강과 연소현.

두 사람은 연령대로만 보았을 때는 그저 조손(祖孫) 그 자체로 보였지만, 행동을 보면 실상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 자, 어서 이쪽으로 오시오.”

가벼운 차림의 공손나강이 뒤에서 느긋하게 걷고 있는 연소현을 연신 채근했다.

“마음이 급하신가 봅니다?”

“내 어찌 마음이 급하지가 않을수 있겠소?”

앙상한 다리를 잘도 힘차게 움직이던 공손나강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이렇게 젊은 스승께서 직접 이 늙은 제자의 자택까지 왕림해 주셨는데.”

히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으며, 그가 연소현을 안내했다.

“항상 인편으로 서신과 작품만을 교환하다가 이렇게 직접 젊은 스승을 만나게 되니, 이 늙은 제자의 가슴이 어찌나 뛰던지…!”

“하하하.”

복도의 갈림길에서 갈림길로.

방에서 또 다른 방으로.

별관만 해도 구십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저택의 규모는 가히 황도십육가문이 중원국에서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자아. 여기가 바로 이 늙은이의 보잘것없는 창고라오.”

이윽고 그들이 도달한 곳은, 자신의 작품을 보관하기 위해서 특별히 설계된 회랑(回廊)이었다.

태양 빛이 직접 들어오지 않으며, 유등과 작품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통풍이 원활하여 곰팡이가 생기지 않으며, 항상 습도가 큰 차이 없이 유지되는 공간.

보잘것없는 창고라는 말로 그 공간을 낮춰 이르는 것이 낯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예술품 보관소였다.

“어르신의 훌륭한 작품에 어울리는 훌륭한 장소입니다.”

“아니오. 아니라오. 이곳은 그저 한낱 창고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연소현이 우아하게 손뼉을 치자, 늙은 전대 가주가 잇몸을 활짝 드러내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젊은 스승께서 흡족하실 정도라면 공을 들인 보람이 있소이다. 보람이 있어. 이힛힛

그들이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공손나강의 가장 최신 작품들이었다.

그 작품을 보자마자, 연소현이 감탄을 터트렸다.

“호오, 이것은…?!”

그 순수함으로 가득한 놀람의 표시에, 공손나강의 어깨가 춤을 추는 듯했다.

“어떻소? 어떠하오?”

연소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림을 해부하듯이 낱낱이 훑었다.

“…대단합니다.”

과연 그 작품이 훌륭했던지라, 연소현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감탄을 표했다.

“이 작품의 탄생으로, 어르신께서는 중원국에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붓 흘림 기법의 사조가 되신 겁니다.”

그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렇소?! 젊은 스승이 봐도 그러하오?!”

첫 만남의 서먹서먹함은 금방 날아갔다.

그 광경은 얼굴을 모르던 스승과 제자가 봄날처럼 훈훈한 교류를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 * *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장로 휴게실.

“최상위로 취급되는 작품들은 최상위 계급의 관료들의 손에서 탄생되고, 그들 사이에서만 오고 가지.”

안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과 대공자의 조합은 처음부터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 맞소.”

“그렇게 보면 그들의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하후 장로가 여송연을 입에서 떼고 길게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이러한 추측들을 미루어 두었던 이유가 있지 않소?”

그랬다.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의 교류? 단지 그러한 이유만으로 그 십육가문을 제 문턱 넘듯이 넘나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그것은 설사 전대 가주들이 대공자를 스승처럼 여긴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오.”

그것은 사실이었다.

개인적인 호감이 아무리 높더라도 상관없었다.

십육가문의 문턱이 가지는 높이는, 은퇴한 가주 개인의 체면이 아닌, 가문의 체면이었고, 가문의 위상이었으니.

하후 장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유야 무엇이든, 대공자가 북망산에서 저렇게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단지 예술적인 교류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오.”

다른 장로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가문의 체면을 접어 둘 만큼, 거대한 것이겠지.”

* * *

과거, 연소현의 어린 시절.

"아들아…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한 것이냐?”

아연한 아버지의 물음에 어린 연소현이 활짝 웃었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안긴 어린 연소현이 낭랑한 목소리로 지저귀듯이 말했다.

“우선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황도에서 들어온 기밀 정보를 통해, 황도십육가문의 가주들이 처해있는 상황들을 확인했습니다!”

어린 연소현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문제를 겪고 있는 가주들에게 그 상황을 빠져나갈 해결책을 알린 것뿐입니다!”

* * *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장로 휴게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하후 장로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깔렸다.

“대공자와 그 노마(老魔)들이 무언가 거래를 할 것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군.”

* * *

“좋군! 아주 좋아!”

공손나강이 큰 소리로 웃으며 자신의 무릎을 연신 내리쳤다.

“이렇게 젊은 스승이 직접 지도를 해 주시니, 이 늙은 제자의 솜씨도 오늘 일취월장한 것 같소이다!”

시간이 흘러, 인공 개울이 흐르는 정자에 마주 앉은 연소현과 공손나강이었다.

“그런데, 젊은 스승….”

느긋하게 차향을 즐기는 연소현을 향해 공손나강이 물었다.

“그저 늙은 제자에게 지도나 해주기 위해서, 이 가문의 문턱을 그 흉포한 쇠바퀴로 짓밟아 넘은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것은 지금까지 온화하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온도의 말투였다.

“이 공손가에 도달하기 전에, 무려 아홉 가문.”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한층 더 삭막해졌다.

늙은이답게 깊은 곳에 박힌 눈알이 마치 기름칠한 유리알처럼 희번덕 거렸다.

“그 값을 치를 준비는 충분히 해오셨을 것이라고 믿고 있소.”

과거 황제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필하며, 중원국의 정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환관(宦官)이 본 얼굴을 드러냈다.

“물론이지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연소현의 입가에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지금까지 연소현이 그 어떤 놀라운 작품을 보았을때의 표정보다도, 더욱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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