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43화 (143/350)

제18편 가장 무서운 무사 (3)

낙양.

북망산 검문소 근처 번화가.

이공자 계파의 강 장로는 자신의 넓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십육가문의 방계혈족에 해당하는 문관(文官)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대공자가 초대장도 없이 십육가문들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다고요?”

강 장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오는 것을 체면상 못 본 체해 주며, 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방금 저희 가문에서 검가의 대공자께서 떠나시는 것을 확인하고 온 참입니다.”

"...."

“그럼 저는 이만.”

문관은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주변을 살피며 다루(茶樓)를 떠났다.

"...."

이미 자신의 선에서 사고하고 추리하는 것을 그만둔 강 장로는,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상황을 써갈긴 종이를 전달했다.

* * *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대회의장.

무사들에 의해 전달되는 정보는, 상대적으로 느리지만 착실하게 쌓여 갔다.

그리고 정보가 쌓여 갈수록, 대회의장은 점차 조용해져만 갔다.

“...여덟 번째 가문의 방문인가.”

“…예.”

“지난번 가문에서는 은퇴한 가주와 식사도 함께했다고?”

“예.”

“미리 약속도 없이 들어가서 밥을 얻어먹어?”

“…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책사에게 벌컥 화를 내는 장로의 어깨를 하후 장로가 두드렸다.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갑시다. 계속해서 대공자와 십육가문의 연결고리를 조사하고 있으니, 우리가 지금 집중해야 할 부분에 집중하는것이 좋겠소.”

하후 장로가 손뼉을 쳐서, 주변의 주의를 끌었다.

“자! 우리가 지금 분석해 봐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그는 대형 탁자에 순서대로 놓인 가문들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공자가 이 가문들을 방문하고있는 순서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분석할 수 있다면, 현재 대공자가 어떤 우선순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겠지.”

다른 장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순서를 분석한다면, 대공자가 공씨 이후 가문들을 어떻게 초대장도 없이 드나들 수 있는지, 그 방법 또한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대공자가 열 번째 가문에 들어섰다는 정보입니다.”

무사는 그 말만을 남겨 놓고, 대회의장에서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대회의장의 분위기가 너무도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

아무도, 어느 그 누구도 말을 하지않고 있었다.

대회의장에는 책사들과 장로들이 피워대는 연초의 연기만이 가득했다.

“저기….”

책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공자의 강남사단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책사였다.

그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아, 아닙니다.”

하후 장로가 외쳤다.

“괜찮다! 아무거라도 좋으니 말해 봐!”

그 말에 젊은 책사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모두 머리를 모아 궁리를 해 보았지만, 대공자의 의도를 짐작하기는커녕, 오히려 말이되지 않는 분석만이 남았지 않습니까?”

하후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애초에 대공자의 의도를 짐작하기 이전에 이딴 순서로 십육가문 정도되는 가문들을 방문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다.”

가문들 간에는 각기 복잡한 역학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의 어느 가문을 먼저 방문하는가, 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권력 지향적 명가라는 족속들은 그 체면이라는 것에 때론 모든 것을 걸기도 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재 대공자는 그 역학 관계를 무시하고 방문을 해 대고 있었다.

젊은 책사가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그렇다면 혹시… 처음부터 순서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뭐라…?”

“그러니까, 순서에서 의도를 찾는 시도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슨 생뚱맞은 말인지.

“대공자 정도 되는 이가 아무 의도도 없이 역학 관계를 무시하고 움직인다고…?”

모두의 시선이 한심함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자, 젊은 책사가 고개를 푹 하고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던, 책임책사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혹시…?!”

누가 어떤 시선으로 보든 무시하고 자신의 집무실로 달려갔던 그가, 낡아 빠진 종이 한 장을 들고 돌아왔다.

“다들 이것을 보십시오!”

그가 대형 탁자에 펼친 종이는 다름 아닌 낡은 지도였다.

“이것은…?”

책임책사가 설명했다.

“이것은 150년 전의 북망산의 모습을 그린 이름없는 화공의 작품 입니다.”

“지금 그 그림이 왜…?”

“이 그림이 제 집무실에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지요.”

그가 북망산의 초호화 저택 구역을 손으로 가리켰다.

“당시 법이라고는 모르던 화공이 남긴 그림에는, 대충이지만 각 가문의 저택 위치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대형 탁자로 달려들어, 그림상에서 대공자의 방문 순서를 확인했다.

“150년 전이라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십육가문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현재의 구조와 크게 변한 것도 없겠지.”

모여든 이들 때문에 그림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이들은 상대의 어깨 위를 타거나 발돋움까지 해가며, 그림을 보려 애썼다.

“…이것은?!”

하후 장로의 입에 물려 있던 여송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림을 가져왔던 책임책사가 헛웃음을 지었다.

“…애송이의 말이 맞았군요.”

다른 장로는 부들거리는 양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감싸 쥐었다.

“정말로 순서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줄이야….”

하후 장로가 비틀거리며, 몰려든 인파를 물리치고, 단상에 마련되어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

그의 손이 습관처럼 입가로 올라와 물고 있던 여송연을 찾았지만, 그 여송연은 바닥에 떨어져 몰려든 이들에게 밟혀 으깨진 뒤였다.

'그저 입구에서 가까운 순서였다고?,

대공자는 역학 관계를 무시하고, 그저 검문소에서 가장 가까운 순으로 방문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방문했던 공씨 가문은, 검문소에서 입구가 가장 가까운 가문이었다.

다른 장로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대공자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지?”

* * *

과거, 연소현의 어린 시절.

어린 연소현이 물었다.

“저는 낙양뿐만 아니라, 중원국 전체에서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요.”

아버지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린 연소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네가 좀 더 자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될 것이야.”

“하아….”

어린 연소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나중은 나중 가서의 일이에요, 아버지. 제가 여쭙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의 방법입니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영향력 투사를 위한 방법론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어린 연소현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 그, 그렇구나….”

“현 중원국의 관료제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물리적인 거리가 먼 황실로부터 시작되는 수직적인 명령 체계 아래서 관료들은 보신주의와 혈연 지연에 얽매여 부패를 거듭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명령체계의 장점을 굳이 꼽자면, 최고 위층의 의사결정이 내려지면, 중원국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를 통해 명령이 예외 없이 일괄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는 점이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검가라는 거대한 수직적 명령 체계의 정점에 있는 아버지께, 제왕학적 지식과 대를 이어 온 지식에서 비롯된 지혜를 빌리고자….”

“자, 잠깐! 잠깐. 알겠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잠시 자신의 큰아들을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대했던 아버지는 자신의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으, 으음."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어떤 대답을 해야, 이 천재 아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 멋진 아버지로서의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으음. 그럼 관료제에서 가장 힘이 강한 이들과 친해지는 것이, 네 의사를 가장 쉽게 전달하는 방법이 되지 않겠느냐?”

어린 연소현의 눈이 반짝였다.

“가장 강한 관료 말인가요?”

“그래, 그렇다!”

아버지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황실을 수호하는 황도십육가문의 가주들같은…?”

* * *

낙양, 북망산.

황도십육가문, 공손가(公孫家).

대문이 열리고, 연소현이 탄 철갑 우마차가 육중한 중량을 자랑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 바퀴가 구르며 사나운 소음과 불꽃을 튀겼고, 영물 두 마리가 거친 콧김을 뿜었다.

그렇게 초고가의 포석이 실시간으로 박살 나는 것을 보는 집사들의 눈이 사납게 흔들렸다.

“호오. 저것이 그 소문만 들었던, 약 선녀의 철갑요새로구먼!”

그럼에도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을 소유한 저택의 주인은 그런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고, 문이 열렸다.

기품 있는 가인(佳人)이 먼저 내려서서, 우아한 태도로 자신의 주인을 기다렸다.

“마당까지 직접 나오셔서 환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이 마차에서 내려섰다.

봄바람에 흑잠사 외투가 우아하게 휘날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 공자!”

삭막했던 노인의 얼굴이 친손주라도 본 것처럼 활짝 펴졌다.

“이렇게 우리가 얼굴을 직접 마주 보는 것은 처음이지 않소?”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대면은 처음이군요.”

노인은 예의범절을 지키기를 목숨처럼 여기는 황도의 사람답지 않게, 세상 털털한 모습으로 연소현에게 먼저 다가갔다.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봐도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구려.”

“그렇습니까?”

연소현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실로 믿어지지 않소.”

노인의 두 눈에는 오 할의 감탄과 오 할의 의문이 담겨 있었다.

“두 분의 황제 폐하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했던 이 공손나강이, 당시부터 그토록 서신을 주고받았었던 상대가 이리도 어린 아이였다니…!”

* * *

과거, 연소현의 어린 시절.

“아버지!”

어린 연소현이 도도도 달려왔다.

“어이쿠, 우리 소현이 왔느냐?”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안아 주었다.

“하하, 녀석. 오늘은 또 무슨 소식을 가져왔느냐?”

어린 연소현이 방긋방긋 웃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황도십육가문의 가주님들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요?”

아버지의 활짝 웃고 있던 얼굴이 그 모습 그대로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연소현이 다시 외쳤다.

“가주님들과 친분을 가지는 단계는 성공했어요! 그러니 다음 단계를.. ”

“아니, 잠시, 잠시.”

아버지가 고개를 흔들었다.

“소현이, 네가 황도십육가문의 가주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다고?”

“네. 아직 전원은 아니지만….”

어린 연소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한 마리 소처럼 눈을 껌뻑거리기만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연소현이 안고 왔던 비단 주머니를 열어 보였다.

“여기 가주님들께서 보내 주신 초청장이 있습니다.”

과연 비단 주머니 안에는 한눈에 봐도 범상찮은 봉인이 찍혀있는 초청장들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

“그 노마(老魔)들이 초청장을 보냈다고…?”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의 표정으로 어린 연소현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걸 네가 어떻게 한 것이냐?”

어린 연소현이 활짝 웃었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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