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38화 (138/350)

제13편 행렬

“모두 길을 비키고 고개를 조아려라! 본가의 대공자님께서 행차하신다!”

원각정 하녀의 내공을 담은 외침이 널리 울려 퍼졌다.

“검가의 대공자가…?”

대공자의 행차라는 말에 아미파의 부총무 비구니가 앞으로 나섰다.

상관난화의 말대로, 직접 대공자와 만나 대화 자리를 마련해 보기 위함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부총무 비구니를 맞이한 것은, 대공자가 아니었다.

“물러서라!”

특임대원들이 발한 묵직한 경고성 기운이 좌중을 뒤흔들었다.

그저 경고성으로 발한 기운에, 밤사이 바닥에 깔렸던 먼지가 파도처럼 밀려날 정도였다.

“…고수?!”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경악할 틈도 없었다.

정문 초소에 배치되어 있던 특임대 전원이 나서서 아미파의 인원들을 정문 옆으로 일제히 밀어붙이다시피 했다.

“이, 이거 왜 이러시오?!”

“본니는 그저 대공자님을 만나뵈려고…!”

항의해 봤자, 대답은 없었다.

그저 단호한 태도로 손을 들어 그들의 앞을 막아설 뿐.

깜짝 놀랄 정도로 강압적인 분위기와 함께 밀려난 아미파 비구니들과 달리, 처음부터 순순히 물러나있던 다선랑들은 조용히 몸가짐을 바로 할 뿐이었다.

원각정의 정문에서부터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원각정의 하녀단장, 향(香)이었다.

평소처럼 하녀복에 검을 찬 모습이 아닌, 하녀복 위에 완전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하녀단, 전진! 대로에서 경계 태세를 취하라!”

그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문으로부터 하녀단의 하녀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녀들의 무공 수위가 아미파의 무승들과 비교해 비슷하거나 아래로 보여, 은근히 무시하는 기색을 보이던 아미파 비구니들의 안색이 달라진 것은 금방이었다.

'...많군.'

부총무 비구니의 안면이 가늘게 떨렸다.

오십의 무사로 이루어진 하녀단은 낙양검가의 웬만한 검대와 맞먹는 전력이었다.

[무장 수준이 대단히 높습니다. 저들이 착용하고 있는 가죽 경갑주부터가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저 정도 수준의 무림인이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무장입니다.]

만련만단 (萬鍊萬鍛).

낙양검가에서 정예 무사들을 위해서만, 철저한 주문 제작 제도로 쇠를 두드린다는 무기공방, 만련만단.

하녀단 전원이 착용한 모든 무장이 바로 그 만련만단의 무장이었다.

기본적으로 검이 두 자루.

인원 따라 단검이나 비도 따위를 가죽띠에 단단히 고정해 두었으며, 드문드문 등에 활을 메고 허리에 화살집을 매단 이들도 있었다.

특이 사항이 더 있다면, 모두가 각반에 징이 박힌 전투 군화, 심지어는 가죽 투구까지 장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들이 대공자의 하녀들이라고요…?]

그 전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당장 어느 전선에 투입해도, 크게 활약할 것이 분명한, 고도의 집단전 훈련을 거친 무림인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구대문파 중 과연 어느 문파가 있어, 감히 저런 이들을 하녀로 부릴 수 있겠는가.

아니.

천하에 저런 하녀단을 꾸리고 운영할 수 있는 세력이, 황실을 제외하면 몇이나 있겠는가.

'낭비도 저런 낭비가 없군….'

부총무 비구니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분명 아미파 개개인 무승들의 수준이 더 높았지만, 저 광경 앞에서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길을 터라!”

하지만 아미파 비구니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길을 터라!”

내공을 담은 외침과 함께, 하녀단이 비워 낸 대로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마를 탄 일단의 무사들이 었다.

그들은 일전에 염 장로가 이끌던 철갑기마무사들보다 훨씬 가벼운 차림의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의 무장 수준과 경지 수준은 천지 차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가장 안에 받쳐 입은 무복만 통일했을 뿐, 무기도, 차림새도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는 이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저들 하나하나가 우리 아미파의 일대제자급이라고 봐도 무방할것 같습니다….]

눈에서 은은하게 흐르는 기운만 보아도 명백하게 벽을 넘은 것이 분명한 고수가 하녀단의 단장에게 말했다.

“원각정의 요청에 따라 호위제장 예하 호위무사 십 인 도착했음을 알리는 바요.”

“저는 현재 원각정 정문 앞 통제를 담당하고 있는 원각정의 하녀단장입니다. 이대로 대기해 주시지요.”

“음."

호위각에서 파견 나온 무사들은 잡담도 없이, 점점이 흩어져 말에 탄 채로 대기했다.

일견 느긋하게 보이는 기색과는 다르게, 주요 방위를 차단한 채 그들은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 중 거리가 가까운 몇몇이 아미파의 비구니들을 잠시 살피더니, 관심이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

그들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었지만,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것만 같았다.

괜히 치밀어 오르는 모멸감에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치를 떨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커먼 색상의 사두(四頭) 장갑마차 여섯 대와 그 옆에서 구보(驅步)로 동행하고 있는 수십 명의 경비단 병력이었다.

장갑마차들이 대로 앞에 자리를 잡기 무섭게, 뒤이어 도착한 경비단의 병력이 하녀단과 교대하여,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부총무님. 저 마차들을 좀 보시지요.]

그 전음에 장갑마차들을 바라본 부총무 비구니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침음이 새어 나왔다.

마차의 지붕은 위로 열리는 형태로 생겼는데, 장갑 철판으로 둘러 싸인 가운데에는 성벽에서나 볼 수 있는 연노가 장치되어 있었다.

[…혹시 저 마차가 검은 이유가, 통짜 흑철목으로 제작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전음이 있었지만, 역시나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부총무 비구니는 어딘가 망연자실해 보였다.

아미파는 이미 몰락하다시피한 어떤 구대문파보다도 크게 성공한 문파였다.

그들의 사업체, 그들이 벌어들이는 수익, 그들의 영향력, 사천당가를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사천 땅에서 꿀릴 것이 없는 것이 아미파였다.

그럼에도 결코 채울 수 없는 너무나도 거대한 간극을 보라.

어디 이 중에 낙양검가가 천하제일가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있던가.

이들은 감히 하나의 가문이라고 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세력이었고, 그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는 극명했다.

이런 차이 하나하나를 직접 이렇게 확인할 때마다, 부총무 비구니는 그저 아득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마차와 기마를 준비한 것은 역시 검가의 대공자가 어딘가로 향한다는 의미겠지요…?]

한 비구니의 전음에, 부총무 비구니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은 우리의 주인이신 대공자님께서 칩거를 끝내신 후, 처음으로 외부에 공식적인 일정을 행하시는 날이다!”

하녀단장의 내공을 담은 일갈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미 하녀단원들의 기세와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하녀단의 일원 누구 하나라도 주인님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충(忠)!”

하녀단원들의 외침이 새벽안개를 흩어 버릴 기세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가 등장했다.

정문으로부터 위용을 드러낸 것은 두 마리의 '소'였다.

하지만 그저 그것들을 한낱 가축이라고 치부하기엔 부적절해 보였다.

어깨높이가 성인 남성을 넘고, 전신이 강철 같은 근육으로 뒤덮인 검은 소와 누런 소.

그 두 마리의 영물이 사납게 콧김을 뿜으며, 강철의 우마차를 끌고 있었다.

낙양검가의 태상가주가 항상 위험한 곳만 다녔던 부인을 위해서 직접 주문하여 제작했다는 우마차.

철갑요새(鐵甲要塞)라는 이명을 가진 약 선녀의 우마차가 그렇게 십수 년 만에 외부로 모습을 드러 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철갑요새에는 낙양검가를 상징하는 거대한 깃발과 함께, 그 깃발만큼이나 화려하고 거대한 대공자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철갑요새의 강철 바퀴가 저속임에도 포석을 박살 낼 기세로 불꽃을 튀기며 정문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원각정 정문 폐쇄!”

“폐쇄!”

대공자의 명에 따라 통제권을 가진 하녀단장이 외치자, 특임대원들이 원각정의 거대한 정문을 걸어 잠갔다.

이제부터는 미리 허가를 받은 극소수의 인원만이 원각정의 쪽문을 이용해서 출입할 수 있었다.

어느샌가 아미파의 누구도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고, 전음조차 오가지 않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그때까지 가만히 그들 옆에 서 있던, 다선랑의 상관난화였다.

"이제는 깨달으셨나요?”

"...."

부총무 비구니가 아무 말 없이 상관난화를 바라보았다.

"이제 적어도 낙양에서는 저희 다선랑과 아미파가 신경전을 벌일 이유는 없습니다.”

상관난화는 어딘가 안쓰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착각에 휩싸여 있던 중년 비구니를 마주 봤다.

“아직도 저희가 감히 대공자님께 아미파를 만나 달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 보이시나요?”

"...."

아무런 대답이 없었음에도, 상관난화는 조곤조곤 자신의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여러분이 가진 저희 부모님들의 서신이나 학도 보호를 위한 명분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낙양검가의 대공자.

강철의 우마차 안에 앉아, 그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대공자.

하지만 그 수미산과 같은 무게를 지닌 이름만으로 아미파의 비구니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들이 허튼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저희도 가족들의 생명은 소중하니까요.”

"...."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 일지도

아미파는 적어도 이 낙양에서는 다선랑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었으니.

"...."

그 순간 부총무 비구니는 깨달았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고, 누구보다도 낙양검가를 저주하는 총무사태가.

어째서 지금도 다른 이들의 힘을 빌리러 다니고 있는지.

"...."

말을 잃어버린 부총무 비구니에게 상관난화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선랑은 뒤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청수를 따라 자신들에게 배정된 사두마차에 올라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만 보던 부총무 비구니의 머릿속에 어젯밤 들었던 총무사태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기억하거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이들에게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할 것이야.’

총무사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선랑에 딱 달라붙으라고 명을 내렸었다.

'총무사태님은 이 상황에서 내가 마음이 꺾일 뻔할 것을 예측하고 계셨다…!’

그렇다면 총무사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선랑에 붙어 있으라고 했던 말에도, 자신이 이해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으리라.

“대공자님!"

발작적으로 외친 부총무 비구니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즉시 하녀단장으로부터 일갈이 날아들었다.

“감히! 중이 주제를 모르고, 본가의 대공자님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부총무 비구니는 그런 하녀단장을 무시하고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부디! 부디 저희 아미파가 다선랑과 함께 곁에서 대공자님의 사업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외치는지도 모르는 그녀였다.

저딴 말을 듣고 대공자가 합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당장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다선랑과 멀어지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확신이 그녀에게 있었다.

“대공자님!"

그때 우마차의 창이 열리고, 시녀장의 목소리가 밖으로 들려왔다.

“주인님께서 합류를 허락하셨다. 저 중들에게 마차 자리를 내어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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