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편 통제 불가
어제의 소란이 무색할 정도로, 새벽녘 원각정 앞 거리는 깊은 고요함에 감싸 안겨 있었다.
멀리 동이 터 오며, 새벽안개가 은은하게 빛을 산란하고, 포석 사이로 얼굴을 내민 푸른 잎은 이슬이 맺혀 고개를 기울였다.
거리에 자리한 대기자용 전각에 밤을 지새운 당직 연락책들이 드문드문 거리를 두고 편히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졸고 있었다.
그들 중 조금 이르게 하루를 시작한 연락책들은 거리로 나와 기지개를 켜거나, 전각 안마당의 우물에서 간단히 세안을 마치고, 찻물이 끓고 있는 화로앞에 멍하니 모 여앉아 온기를 즐겼다.
그런 느긋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도, 연락책들이 이따금 대기소의 구석을 흘금거렸다.
"...."
그곳에 앉아 있는 이들은 아미파의 비구니들이었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졸음기 하나없는 얼굴로 원각정의 정문을 주시하고 있는 그들은, 지난밤의 소란 이후 깊은 밤을 틈타 슬그머니 찾아온 이들이었다.
연락책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어제 그렇게 꼬리를 말고 내뺀후에 다시 저렇게 뻔뻔하게 찾아온 것을 보면 대단하구먼.”
“수행이 깊다고 해야 할지, 얼굴 가죽이 두껍다고 해야 할지.”
그때 저편의 안개 속에서 일단의 아미파 비구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접객당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온 교대조였다.
“특이 사항은 있었는가?”
휴식을 취한 후에도 묘하게 신경질적인 태도가 누그러들지 않은 사감 비구니였다.
“반 시진 전쯤, 같은 얼굴의 시녀 세 명이 나와 어딘가로 향한 것 이외에는 특이 사항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향했는가?”
“거기까지는….”
사감 비구니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그들을 다그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선랑이었으니.
“그렇다면 자네들은 이제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사감 비구니의 말이 잦아들었다.
원각정의 정문에서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으으…! 아침밥을 너무나 많이 먹고 말았어요!”
“속이 조금 더부룩해….”
“아, 딱 지금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안개 속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다선랑이었다.
조금 피곤한 기색이 남은 그녀들은 외출할 준비를 모두 마친 모습들이었다.
“너희들…!”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급격히 가까워졌지만, 다선랑의 아가씨들이 움츠러드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정지.”
북풍한설이 몰아치듯 차가운 경고.
“허가받지 못한 자는 그 이상 접근할 수 없다.”
오히려 정문을 지키는 특임대원의 제지에 비구니들이 더 이상 다선랑들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발을 굴렀을 뿐.
“그저 저희는 다선랑과 대화를 나누려고…!”
“상관없다.”
이 무사들이 조용히 흘리는 기세는 이공녀의 그것처럼 폭력적이지는 않았다.
“이잇…!”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미파의 경거망동을 허용하지 않는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관난화의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에 사감 비구니가 눈을 치켜 떴다.
“상관난화! 혹여나 설마 너희들의 처지를 잊고, 뒤에서 허튼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키가 큰 다선랑, 안송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허튼짓이라니요. 다 사업과 관련된 중대한 대화와 결정들이었지요.”
"설마?! 아미파와 상의도 없이, 너희 마음대로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겠지?!”
상관난화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대답했다.
“저희 다선랑은 정식으로 낙양검가의 대공자님과 협약을 맺고, 대공자님과 사공자님의 합동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다선랑의 주인이 바뀐 이야기를 아직 아미파가 알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관난화가 밝힌 사항만으로도 아미파의 인원들을 펄쩍 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게 무슨…?!”
다른 다선랑들도 피식 웃으며 안송경의 도발을 슬쩍 거들었다.
“걱정하지 마시죠. 설마 저희가 스스로 손해 볼 결정을 내리기라도 하겠어요?”
“그렇게 협박하듯이 말씀을 하시면, 듣는 이들이 오해하지 않을까요…?”
“그런 중요한 결정을 너희 마음대로 내리다니, 너희가 진정 제정신들이 아니구나!”
사감 비구니는 현기증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감히 아미파를 거스르고도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더냐?!”
상관난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마치 지금 말씀하시는 것만 듣자면, 저희 다선랑이 낙양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을 아미파가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건…!"
순간 사감 비구니의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다선랑의 확장을 아미파는 원하지 않는 건가요?”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미파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해 나가는 다선랑이 가지고 싶은 것이었지, 사천에 그 가능성을 가둬 둘 이유가 없었다.
단지.
이 낙양검가에 발을 디딘 이후 받았던 유무형의 압박 때문에, 점점 다선랑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있다는 감각에 사감 비구니가 선을넘은 발언들을 쏟아 낸 것뿐.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뭐죠?”
“본니는 그저 너희가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안송경이 코웃음을 쳤다.
“도대체 그 허튼짓이라는 것이 무얼 말하는 겁니까?”
아미파가 이때까지 숨 쉬듯이 행해 온 다선랑에 대한 폭거 때문에, 어디까지가 허튼짓이고 아닌지, 순간적으로 구별하지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선랑은 사감을 너무 다그치지 않도록 하여라.”
구석에 몰린 사감 비구니를 구한 것은 안개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아미파의 마차였다.
“모두 진정들 하여라.”
그 마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부총무 비구니였다.
“아무래도 사감이 흥분하여, 너희가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발언을 한 모양이구나.”
일단의 행정 비구니들과 함께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난 부총무 비구니가 다선랑을 향해 말했다.
“우리 아미파는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선랑의 사업 확장에 훼방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단다.”
그녀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저 나이 어린 너희가 잘못된 길에 들지 않도록 보살피고자 할뿐."
* * *
지난밤.
“결국에 대공자와 사공자의 합작 사업을 무너뜨리면, 다선랑은 그들에게 필요 없는 말이 된다.”
총무사태의 말에 부총무 비구니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우리가 대공자와 사공자의 합작 사업을 방해한다고요?”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의미 이상의 행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것!”
그녀의 표정에 총무사태가 가래끓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대공자와 사공자의 합작 사업이 망하길 바라는 것이 우리뿐이더냐?”
“아…!”
“사정상 직접 방해 공작에 나서지는 못해도, 우리가 대신 움직여 준다면 얼마든지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줄 이들이, 이 검가에는 널렸다.”
총무사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내가 만난 점창의 늙은이 또한 그런 이들 중에 하나지.”
“그렇군요…!”
평소에 수족이라 불릴 만한 이들에게도 자신의 심중을 밝히지 않는 총무사태였다.
그런 총무사태가 지금처럼 상황과 의도를 친절히 설명해 주는 일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이들의 힘을 빌려,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면 될 뿐.”
“과연….”
그 말에 부총무 비구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 불안한 어투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가문의 권력 싸움 한복판에 끼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총무사태가 피식하고 웃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다.”
"그렇다면…?”
총무사태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다선랑 아이들이 정도를 넘지만 않는다면, 결국 다선랑을 손에 넣게 될 우리에게 그들의 낙양 진출은 이득이다.”
그 말 그대로였다.
다선랑이 낙양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그것은 곧 중원 전체에서 다선랑이 성공할 것이라는 말과 같았기에.
“그러니 너는 내일 날이 밝자마자, 다선랑을 찾아가 그 아이들의 비위를 맞춰 주고 달래 주도록 하여라."
다선랑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고, 그들 곁에 딱 달라붙어, 모든 정보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야, 그 아이들이 허튼수작을 부렸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 즉시 우리가 손을 쓸 수가 있지 않겠느냐?”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억하거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이들에게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할 것이야.”
진득한 살기에 부총무 비구니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우리가 대공자와 사공자의 합작 사업에 훼방을 놓겠다고 여기저기서 힘을 빌려 놓고, 다선랑이 허튼짓을 벌이지 않아, 손을 쓸 필요가 없어지게 되면 상황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째서?”
총무사태 가 히죽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때쯤이면, 우리는 사천으로 돌아갔을 터인데?”
부총무 비구니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 * *
“사감은 이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도록 하여라!"
부총무 비구니의 말에 사감 비구니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안하다.”
그런 사감 비구니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흘겨본, 부총무 비구니가 다선랑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너희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나쳐, 사감이 그만 과한 소리를 늘어 놓았구나.”
상관난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지요.”
“역시 도량이 넓구나…!”
그녀가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이자, 부총무 비구니가 은근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혹시 검가의 대공자님과 어떤 조건으로 거래를 했는지, 알려 줄 수 있겠느냐? 내 어제 검가를 둘러 보다가 풍광이 좋은 다루를 봐 두었느니라.”
“그것은….”
그 말에 다선랑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것은 어렵겠지?”
그녀들의 반응에 부총무 비구니가 괜히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면….”
애초에 계약 사항을 순순히 다선랑 쪽에서 털어놓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그녀였다.
“혹시 총무사태님과 검가의 대공자님의 자리를 주선해 줄 수 있겠느냐? 자리를 한번 마련해 주기만 한다면, 그 이상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이 없을 것이다.”
다선랑을 더 이상 곤란하게 하지 않는 대신, 자리를 주선하라.
그 말의 의미는 그녀들을 건너뛰고 직접 대공자와 대화를 열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크흡…!”
그 말에 결국 안송경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전에 다선랑들이 하나둘씩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난데없이 터진 그녀들의 웃음소리에 부총무 비구니의 눈살이 찌푸려 졌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대단히 상대를 불쾌하게 하는 행동이구나. 본니가 누군지 잊기라도 한 것이더냐?”
동료 다선랑들의 웃음보에 쓴웃음을 짓고 있던 상관난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착각을 하시는 모양이군요.”
“착각…?”
* * *
어젯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점창의 전 장문인에게 무사가 물었다.
“대공자와 사공자의 합작 사업을 무너뜨리다니요. 그 노파가 과연 그리 큰 역할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전 장문인의 눈이 커지더니, 그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 노파가, 그 마귀같은 대공자를?”
한참을 웃던 그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분명 그 노파도 보통내기가 아닌 만큼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있겠지. 하지만….”
전 장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애초에 주군과 대군사들이 바라는 그림은 대공자와 사공자의 합작 사업이 무너지는 것이 아닐세.”
* * *
“착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얼굴에 노기가 은은하게 어리기 시작한 부총무 비구니의 말에, 상관난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들을 오만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주제를 모른다 해야 할지.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아미파는 아직도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상황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대화를 나눠 보고자 하는 것이야.”
정곡을 찔린 탓에 대답이 늦은 부총무 비구니였다.
“그렇다면 직접 한번 기회를 잡아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직접?”
상관난화의 말에 부총무 비구니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때.
“모두 길을 비키고 고개를 조아려라! 본가의 대공자님께서 행차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