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35화 (135/350)

제10편 대표(代表)

이공녀는 밝은 달빛 아래서,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이런. 결국에 놓쳤나….”

애초에 '그 탈명귀검'이 쉽사리 그녀와 비무를 벌여 줄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

“같은 '검림(劍林)'의 일원이라는 이름이 아까운 작자 같으니.”

“이공녀님.”

투덜거리는 그녀의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묵어가실 예정이시라면, 제가 잠자리를 마련해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그것은 시녀장 정아의 목소리였다.

“흠. 잠자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데….”

이공녀가 천천히 몸을 돌려 동생의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외딴곳에 서 있는 나를 어떻게 찾은 것이지?”

그녀가 탈명귀검을 쫓아서 도달한 곳은, 이미 원각정의 정원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외딴 곳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시녀장은 어둠 속에서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곳 원각정의 시녀장이니까요.”

이공녀 연서린은 시녀장의 두 눈이 금빛 안광을 흘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말이지….”

연서린이 자신의 뒷덜미에 솟아오른 소름을 문지르며 말했다.

“너….”

그녀의 시선이 칼날처럼 예리해 졌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 * *

지금으로부터 수십 일 전.

사천성 성도.

황명을 받들어 성도를 통치하는 지사는 먼 길을 떠나는 딸에게 물었다.

“…돌아올 생각은 없는 것이냐?”

요 근래, 두 사람 사이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대화였다.

"...."

상관난화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성도지사는 이제 딸을 거칠고 험한 세상에 내보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선택 사항이 남지 않았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검가의 사공자에게 의탁할 것이냐?”

“…예. 검가의 사공자님은 사천에서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그 말에 성도지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의 마음에 못내 걸렸던 이야기를 꺼냈다.

“만일, 그런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만....”

의아한 표정의 상관난화를 향해 성도지사가 말을 이어 나갔다.

“검가의 대공자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만나 보도록 하거라.”

“대공자님을요…?”

무검자, 라는 말은 일단 접어 둔 상관난화였다.

매사에 조심성이 넘치는 성격 때문에 주변에서 소심하다 여겨지는 아버지가 대공자의 이야기를 꺼낸것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그 대공자를 알 기회가 없었다만….”

이어지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상관난화의 눈이 깊어졌다.

* * *

현재.

원각정, 대공자의 집무실.

“대공자님. 혹시 황실(皇室)에서 이문석학(二門碩學)을 역임하신 주(株) 어르신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상관난화의 말에 연소현이 가볍게 무릎을 쳤다.

“물론이오. 내 기억하고말고.”

그는 연소현이 어린 시절부터 서신 따위로 꾸준히 연을 유지해 오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분이…?”

상관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분께서 바로 제 아버지의 은사(恩師) 되시는 분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야 어째서 다선랑이 사공자가 아닌 자신의 초청을 그리도 쉽게 받아들였는지, 이해한 연소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분이 내 얼굴에 없는 말까지 지어내어 금칠을 해 주셨던 모양이군.”

“…처음엔 저도 믿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딸을 보내는 자리에서도, 그 아비가 반신반의하며 꺼낸 이야기였으니.

그 어린 나이에 수백의 의서를 정리하고 축약한 이야기.

새로운 농법을 반포한 이야기.

천문을 읽고 기상을 관측하여, 수많은 백성의 아사를 막았다는 이야기.

만일 그 이야기를 전해 주었던 이가 자신의 은사가 아니었다면, 성도지사는 절대 믿지 않았으리라.

“지금 그 이야기의 주인을 직접 만나 뵙고 있으니, 마냥 과장된 이야기라고는 생각하기가 힘듭니다.”

상관난화가 입가를 가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소.”

상관난화는 나름 연소현을 추켜 올리기 위해서 한 말이었건만, 그는 썩 기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뿐이었지.”

그 말투에 묻어나는 씁쓸함은 무엇인지.

“그것보다는….”

상관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려 할 때, 연소현은 이미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대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잘 들었소.”

이제 대공자의 결단만이 남은 시점이었다.

상관난화를 필두로 모든 다선랑들의 등줄기가 곧게 펴졌다.

“본 대공자가 다선랑의 새 대표가 된다라…. 사실 이렇게 원활한 방식으로 일이 풀려 가게 될 줄은 몰랐건만.”

덕분에 그의 계획도 훨씬 순조롭게 풀려 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소현이 작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현재 본 대공자의 상황을 설명해야만 하겠소.”

상관난화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청하겠습니다.”

“그대들이 너무도 큰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이 낙양에, 그리고 이 원각정에 도착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연소현은 천천히 하지만, 명확하게 다선랑이 앞둔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하지만 아미파에 의해서 그대들이 겪었던 그 모든 일은, 본 대공자와 얽히는 순간, 이 낙양검가와 얽히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오.”

그것은 명백한 경고였다.

“그대들도 이 검가의 후계 다툼과 관련된 갈등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오.”

다선랑은 낙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미 충분히 낙양검가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공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보았던 낙양검가의 무력, 오늘 보았던 낙양검가의 위세와 규모는 상정 이상의 영역에 있었다.

“그대들은 본 대공자에게 다선랑의 대표직을 맡기는 순간, 천하제일가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오.”

연소현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본 대공자가 '놓아주었던 이'가 열심히 본가의 요직에 있는 이들을 만나고 다니며 일을 급속도로 키워 나가고 있소.”

* * *

낙양검가의 어딘가.

“예, 바로 그 말입니다.”

검가전장의 부전장장은 자신의 앞에 앉은 장로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열 배라는 액수는 사공자님과의 합작 사업이 틀어졌을 경우에, 절대 그 대공자가 단기간에 감당이 불가능한 액수라는 말이죠.”

장로가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부전장장이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그 대공자의 첫 행보입니다.”

그가 침을 튀겨 가며 떠들었다.

“만일 그 첫 행보부터 넘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공자는 시작부터 후계 다툼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책임을 지고 대공자에게 대출을 밀어붙인 전장장은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필요한 자금이 있다면, 제가 바로 누굽니까? 이 검가전장의 부전장장에게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전장장의 자리가 제 것인 양, 눈 앞에 선했다.

“당장에 얼마든지 대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

“요즘 본 대공자와 갈등이 한창 커져만 가는 중인 둘째 녀석은, 절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오.”

연소현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 본 대공자에게 이를 갈던 모든 이들이 칼을 물고 덤벼들 테지.”

연소현의 시선이 다선랑 한 명 한 명을 향했다.

“그래도 본 대공자에게 대표 자리를 넘기고 싶소? 그대들 전체가 이제까지 겪어 본 적도 없는 전쟁터로 빠져들게 될 것인데?”

인생을 걸라는 무거운 질문.

집무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혹시, 그 합작 사업에 대한 계획서가 있으십니까?”

“물론.”

상관난화의 질문에 연소현은 흔쾌히 서류 한 뭉치를 꺼내 주었다.

“저희는 정치력을 겨루는 일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 서류를 받아 들며 상관난화가 말했다.

“검가의 권력자들이 보자면, 틀림없이 그저 귀여울 수준이겠지요. 하지만….”

다선랑들은 서류를 서로 넘겨 가며, 연소현이 세운 사업 계획을 확인했다.

“저희는 사업가로서, 사업 계획을 보는 것으로 승산을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들은 서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소곤거리기도 하고, 눈을 크게 떴다가, 박수를 치기도 했다.

연소현은 다선랑이 충분히 시간을 들여, 자신의 계획을 확인하고, 의견을 교환할 시간을 주었다.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차 한 잔이 빈 후, 상관난화가 대표로 말했다.

“사업 계획의 승산은 충분합니다.”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저 충분한 정도요?”

상관난화가 미소 지었다.

“저희가 이 계획을 개량한다면, 완벽해지겠지요.”

그 자신감에 연소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풀려 가지는 않을 텐데? 특히 적대 세력의 방해가 만만찮을 것이오.”

다선랑들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정치 싸움엔 약해서요.”

“그런 부분은 최고 책임자인 대표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 저희 아랫사람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연소현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아주 좋소.”

다선랑도 그와 함께 웃었다.

“사실 아미파가 사천에서 그런 힘을 가지고도 그것밖에 못하는 걸 보면서 얼마나 한심했다고요.”

“겨우 하는 일이 협박질에 지분 빼앗기라니.”

“산골짜기에서 망해 가던 절간을 성도로 옮기는 것까지는 좋았죠.”

“그리고 학관 사업에 뛰어들어 신부 수업을 통해 배출한 여식들의 중매 사업을 진행한 것도 괜찮기는 했어요.”

“중매 사업을 통해 상류층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했으니까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죠.”

“백발성성이니 뭐니, 띄워 줘 봐야 결국에 구시대의 인물이 굳은 머리로 떠올릴 수 있는 한계 지점이랄까.”

키 큰 다선랑, 안송경이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희가 장신구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첫 번째 사업으로 가장 진입 장벽이 낮았던 것뿐입니다.”

“낙양에서 낙양검가의 대공자님과 함께라니….”

상관난화가 연소현을 향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저희도 이렇게 '진짜 기회'를 손에 넣게 되어 기쁩니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짧게 덧붙였다.

“대표님.”

연소현이 크게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좋아. 그렇다면,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잠자리에들 들고. 내일 오전에 다시 모이도록….”

그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아니! 거기선 이렇게 하는 게 맞지!”

“아니라니까?! 너 지금 나랑 같은 계획서 보고 있는 거 맞냐?!”

“흐음. 이런 계획을 발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역시 낙양. 평화로운 사천 땅과는 비교가 안 되는구나.”

이미 다선랑들은 사업 계획서를 개량하고 강화하는 작업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상관난화가 조금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표님의 계획서가 너무 흥미로워 다들 머리에 피가 쏠린 모양이네요.”

연소현은 껄껄 웃으며, 시녀들을 불러 다선랑에게 충분한 다과와 음료를 제공하도록 일렀다.

'다선랑.'

그는 피로도 잊은 채 격론을 벌이는 다선랑의 모습을 한발 물러선채 지켜보았다.

'이전 역사에서는 이번 일에 휘말려, 구성원들을 잃고도, 결국에는 다시 성공해 냈던 이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기억 속에서, 중원국 십대상단 중 말석에 이름을 올려 일세를 풍미한 전설적인 상회.

'이걸로 또 하나의 말이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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