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한 번의 기회(機會)
“소현아.”
“네, 누님.”
연서린이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상대하기 가장 무서운 무사는 내가 모르는 무사라는 말은 들어 보았겠지?”
그 말에 연소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돌아왔다.
“...물론. 알고 있소.”
“그래, 네가 모를 리가 없지.”
연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녀석들이 네 진짜 실력을 모를 때,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녀가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제대로 한 방 먹여 주라고.”
“하.”
마치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듯이, 연소현의 심중에 든 계획을 맞히는 그녀였다.
자신을 돌머리라 부르는 그녀였지만, 실은 여러 면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감각을 보여 주는 자신의 누님이 었다.
“기대하시오.”
연소현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누님의 돌머리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일격을, 내 제대로 먹여 줄 것이니.”
그 말에 연서린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놀란 새 떼가 호수에서 날아올랐다.
“좋다. 좋아. 네가 그리 말한다면야.”
그녀가 앉아 있느라 묻은 풀잎들을 대충 털어 내며 물었다.
“원각정의 온천은 잘 관리하고 있겠지?”
“온천 말이오? 물론이오.”
그녀는 연소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내가 이 원각정의 온천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조금도 모를 것이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금방 모습을 감추었다.
"...."
연소현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귀한 손님을 모셔 놓고 기다리게만 하는 것이 못내 미안하여, 온천 핑계를 대는 누님의 마음을 어찌 그가 모르겠는가.
“얏호!”
멀리서 들려오는 누님의 즐거움 가득한 환호성에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정말 원각정의 온천이 그리워서 였는지도 모르겠군.'
그 천하의 연소현조차 생각을 따라가기 힘든 것이, 바로 연서린이라는 사람이었다.
예측 불허.
바로 그녀를 위해 준비된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 * *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강남사단 본부.
초점이 흐린 눈으로 돌아온 최 책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묘하게 허둥거리고 있던 강남사단의 책사였다.
“최 책사!”
짧은 신장에 단단한 체구의 중년인, 강 책사가 그를 보고 펄쩍 뛰었다.
“지금까지 어디 있다가 온 것이오?!”
“아? 아.”
최 책사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볼일이 있어서, 낙양 저잣거리에 좀….”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소.”
강 책사가 최 책사의 팔을 당겨, 급하게 달려가는 다른 책사에게 길을 터 주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저리도 뛰어 다니나 싶어 주변을 살피니, 이제 본부의 정신없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지금 난리도 아니라오.”
“대체 무슨 일이오?”
그 물음에 상대가 인상을 썼다.
“아니, 사공자 담당인 최 책사가 상황을 모르면 어떻게 하오? 손 장로께서 아무 말 없었소?”
“그게 말했다시피 저잣거리에….”
성격이 급한 강 책사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좋소. 지금 주군의 명으로 모든 책사가 회의장으로 집합하는 중이오.”
“강남사단 전체가?”
그가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주군의 진영에 포함된 책사 전부!”
그 말에 최 책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무슨 일로….”
“이건 아직까지 추측이지만.”
그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주군께서 이번에야말로, 대공자와 사공자의 사업을 완전히 끝장낼것을 명하신 것 같소.”
“완전히?!”
강 책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추측이지만, 근거가 있소.”
“무엇이오?”
상대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내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지금 주군 진영에 속한 모든 장로가 주군과 함께 회의를 진행 중이오.”
“모든 장로가?!”
“조용히 좀 하시오…!”
최 책사가 급히 자신의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을 담당하는 집사에게 들었는데, 휴식 시간에 장로들이 '다선랑'이며 '죄악계곡'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군.”
“근거는 그것뿐이오?”
“다른 장로들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랫것들이 들었다고 하더군.”
“장로들이 아랫것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어차피 곧 진영 내의 모두가 알게 될 이야기라는 것이지.”
그 말에 최 책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진행하던 방해 계획이 계속 실패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난데없이 모든 장로와 모든 책사라니?’
머리가 아찔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려고....'
멍하게 서 있는 최 책사 때문에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자, 강 책사가 성질을 부렸다.
“제길. 이런 상황에 한 책사는 어디로 간 것이오? 같이 나갔던 것이 아니었소?”
“한 책사?!”
그의 말에 최 책사가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한 책사가 나와 함께 들어오지 않았었소?”
“무슨 소리요? 최 책사 혼자 들어오셨잖소.”
“혼자?”
아까부터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최 책사의 말에 상대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쉬었다.
“하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겠군.”
그가 바삐 뛰어다니는 책사들을 보며 말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제 대공자와 사공자의 사업에 대한 임무는 더 이상 그대들의 소관이 아니니.”
* * *
낙양검가, 어딘가.
실내에 우두커니 앉아 상대를 기다리는 아미파 총무사태의 앞에 놓인 차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그렇게 약속 시각을 닦달하더니, 본인이 늦는 것인가?’
부드득, 노파의 이빨이 갈렸다.
이 낙양검가라는 곳은 겪으면 겪을수록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놈들밖에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부(副)총무 비구니가 공손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와 총무사태의 귀에 대고 전음을 시전했다.
밖으로 전음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보통 밀착전음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수법이었다.
[...그런 이유로 원각정에 들어가는 것을 실패했다고 합니다」
총무사태가 손을 내젓자, 부총무 비구니가 얼른 자리를 비켰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 노파를 곁에서 모셔 봤던 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하리라.
'실패라….'
그때 반대쪽 문이 열리며, 그녀가 기다리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기다리셨소, 자성신니(紫聲神尼)."
그녀의 오래된 별호를 부르며 나타난 이는 그녀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티가 나는 이였다.
“그 별호로 불린 것도 오랜만인것 같습니다.”
노파의 말에 노인이 잇새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같은 배분의 우리끼리라도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노파는 그 말에 작게 코웃음을쳤다.
“얼굴에 기름기가 가득한 것을 보니, 검가에서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것을 넘어서, 어디 벌모세수(伐毛洗髓)라도 해 준 모양입니다?”
가시가 돋친 노파의 말에도 노인은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뭐. 구대문파의 장문인 출신쯤되니, 벌모세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가문에서 장로 자리도 주고 대접은 확실하게 해 주더이다.”
그 능글거리는 태도에 노파는 한번 더 상대의 속을 긁었다.
“하. 그 이름 높은 점창파(點蒼派)를 통으로 바친 분이니, 어련히 대접을 해 주었겠지요.”
현재 낙양검가의 속파(屬派)의 형태로 명맥을 유지 중인 점창파의 전 장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덕분에 제자들도 더 이상 발품을 팔아 보호세를 걷으러 다니거나, 되지도 않는 객잔을 운영할 필요도 없어졌지. 그저 무공 연마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란 말이오.”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
상대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가자, 총무사태의 독기도 갈 곳을 잃었다.
“어쨌든, 장문인께서 미리 전해 주신 정보의 덕은 단단히 보았습니다.”
사공자의 사업에 대한 정보.
투자단에 대한 정보.
칩거를 푼 대공자에 대한 정보.
이런 정보를 넘겨준 것이 바로 점창의 전 장문인이었던 것이다.
“대리단가는 예로부터 우리 점창의 오랜 친구였고, 단가와 아미가 손을 잡았으니, 아미 또한 우리의 친구가 아니겠소?”
“이 만리타향에서 동맹이 있다는것은 든든한 일이지요.”
점창의 전 장문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대공자와 첫수를 교환해 본 감상은 어떻소?”
결과를 뻔히 알면서 감상을 묻는것이, 전 장문인이라는 자의 속이 꼬여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제법 매섭더군요. 만일 장문인께서 미리 대공자에 대해 경고를 해 주지 않으셨다면, 더 큰 낭패를 볼지도 모를 일이었겠지요.”
전 장문인이 껄껄 웃었다.
“고작 매섭다고? 그 아해(兒孩)가 요즘 본가의 장로원을 뒤집어 놓고 있는 꼴을 보면, 그런 무른 표현이 쏙 들어갈 것이오.”
총무사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무검자로 알려진 대공자에 대한 위험도를 훨씬 더 높게 평가해야 할 모양이었다.
“…이제 적의 실체를 알게 되었으니, 거기에 대응하면 될 뿐이지요.”
노파의 말에 점창의 전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소. 가장 무서운 적은 내가 모르는 무사이지.”
그가 노파의 식은 찻잔을 들어 옆에 부어 버렸다.
“실체를 알게 된 이상, 신니의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그 아해 놈을 골탕 먹여 줄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이 직접 준비해 온 술을 부었다.
“내 주군이신, 본가의 삼공자께서도 그대에게 협조를 아끼지 말라고 하셨소이다.”
* * *
총무사태와 점창의 전 장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방의 밖에서 두 비구니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검가의 대공자와 다선랑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모르는데, 총무사태께서는 불안하지 않으신 걸까요?]
부총무 비구니가 미소를 지었다.
[성공한 사업가라고 주변에서 받들어줘 봐야, 결국 아이들일 뿐.]
그녀의 입에 걸린 미소가 비릿한 혈향을 품었다.
[가족이 사실상 인질로 잡혀 있는 이상, 다선랑 지분의 과반수는 결국 우리 아미파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 * *
낙양검가, 원각정.
대공자 집무실.
“주인님. 다선랑 분들께서 주인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연소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모셔라.”
상관난화를 필두로 중원국에 명성이 자자한 다섯 명의 아가씨들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누적된 여독에, 오늘 그 난리 통을 겪었음에도, 다선랑의 상태는 기대 이상으로 양호했다.
정신력이 뛰어난 것일까.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연소현은 정중한 태도로, 하지만 가진바 위엄을 드러내며 그녀들을 맞이했다.
“본인은 이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이라고 하오.”
상관난화가 대표로 나서서 연소현의 인사를 받았다.
“저희를 이리도 후하게 대접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녀는 다선랑의 대표, 상관난화라고 합니다.”
나머지와도 인사를 주고받은 연소현은 손을 펼쳐, 그녀들을 미리 준비한 자리로 안내했다.
“자, 그럼.”
그녀들에게 손수 차를 따라 주며, 마음을 다스릴 시간을 충분히 제공한 연소현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본 대공자가 그대들을 초청한 이유에 대해서….”
그때 상관난화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정중한 태도로 손을 살짝 들어 연소현의 말을 끊었다.
“음. 먼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소현이 손을 펼쳐 보여 그녀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대공자님.”
상관난화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에 입을 열었다.
“저희 다선랑의 지분 전체를 대공자님께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