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32화 (132/350)

제7편 연씨 혈족(血族)

그 시각.

낙양검가, 특등급 폐관(閉關) 수련장.

“그 아이가 그렇게 나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야?!”

중후한 내공을 담은 일갈(一喝)이 양쪽 절벽 사이를 튕기며,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죄송합니다!”

수련관주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지금 내가 너 따위의 사죄를 바라고 있는 것 같으냐?!”

중년 여인이 발을 구르자, 바닥에 깔린 포석들이 박살났다.

그 수법이 얼마나 절묘한지, 중년 여인의 주변으로만 충격이 제한되어, 폐관수련장의 전각에는 어떤 피해도 끼치지를 않았다.

극도로 분노한 와중에도, 마음에 선을 긋는 절도가 있는 것이, 중년 여인이 심(心)적으로도 이미 경지에 달한 심상찮은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지, 지금 백방(百方)으로 사람을 풀어 이공녀님을 찾고 있으니, 곧 소식이 도착할 것으로….”

중년 여인이 사납게 코웃음을 쳤다.

"그 아이가 마음먹고 움직이면, 고작 너 따위가 동원할 수 있는 이들로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을 모르느냐?”

"...."

사실이었다.

수련관주는 입술을 깨물면서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주제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냐?”

그 모습에 중년 여인이 혀를 찼다.

“같은 연씨 혈족이라, 어린 나이에 중책을 맡겼건만. 그 아이를 이곳에 붙들어 놓는다는, 그런 간단한 임무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 하다니.”

“면목 없습니다.”

수련관주는 이공녀가 이곳을 떠나는 순간 눈앞의 중년 여인, 호위각주에게 즉시 문제를 보고했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선에서 어떻게든 일을 해결하려고, 보고가 늦었다면 어땠을까.

그녀가 같은 연씨 혈족이라는 점은 아무런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 못했을 터였다.

“너는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이곳을 정비해 두어라.”

중년 여인, 호위각주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다음번엔 그 아이가 홍미를 보일 만한 대련 상대를 납치해서라도 여기에 묶어 두란 말이다. 알겠느냐?!”

수련관주가 포석에 머리를 내리 찧었다.

“예! 각주님!”

포석을 따라 흐르는 핏물을 보며, 호위각주가 말했다.

“기억해야 할 것이야. 우리 연씨의 핏줄에 어울리지 않는 이딴 실패는. 내 두 번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수련관주가 단단한 포석에 머리를 찧으며 대답했지만, 이미 상대는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린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더냐.”

낙양검가의 호위각주이자, 천의무봉 연서린의 스승.

그리고 지금 의식이 없는 태상가주의 누님, 연주태가 혀를 찼다.

“네가 어떤 헛된 마음을 품어 보아야, 결국에는 그 타고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인데.”

* * *

“그래서 너희는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다 이 말이더냐?”

매섭게 몰아붙이는 수련관주 보좌(補佐)의 말에도 이공녀의 전담시녀들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거듭 말씀드렸다시피, 주인 아가씨께서는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뛰쳐나가셨습니다."

“거듭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도 붙잡았지만, 미력한 저희가 어찌 주인 아가씨를 붙들 수 있겠습니까?”

“수련장의 무사들조차 일각을 버티지 못했지 않습니까?”

“저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련장의 무사들은 지금 부상을 치료받는 중이었다.

최고의 폐관수련을 위한 만반의 지원이 갖추어져 있는 이곳이었기에, 그들의 부상에 대한 조치는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나중에라도 너희의 말에 한 치의 거짓이나 숨김이 있음이 밝혀진다면….”

수련관주 보좌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는 내가 아니라, 호위각주님의 분노를 직접 느끼게 될 것이야.”

이공녀의 전담시녀들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뻔뻔하게 대답했다.

“부디.”

“그러시지요.”

그가 문을 나서고, 인기척이 멀어 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전담시녀가 한숨을 쉬었다.

“너…, 일부러 대공자님에 대해서 흘렸지? 나중에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하려는 거야?”

말실수를 가장하여, 대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홀린 전담시녀가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우리는 수련관주의 시녀도 아니고, 호위각주의 시녀도 아니고, 그 지긋지긋한 연씨 혈족의 시녀도 아니잖니.”

“…그건 그렇지.”

그녀가 창밖으로 어둠에 잠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우린 주인 아가씨의 전담시녀야.”

이 절벽 사이에 끼인 호화로운 폐관수련장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 * *

낙양검가, 원각정.

아미파의 인원들은 연서린의 압박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철수한다.”

아미파 사감 비구니의 말에, 나머지 비구니들이 말과 마차로 향했다.

“흐음. 아쉽네. 아미의 검이 그렇게나 매섭다던데.”

"...."

뒤에서 태평하게 중얼거리는 이공녀의 말에 사감 비구니의 안면이 떨려 왔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이곳에는 경지에 오른 이공녀에게 맞먹을 무승도 없었고, 배분으로 어떻게 해 볼 총무사태도 없었으니.

아미파를 향해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 다선랑의 마차가 열리고, 동승하고 있던 호신술 선생이 내려섰다.

"...."

가만히 서서 이공녀의 모습을 눈에 담던 그녀에게 사감 비구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멍하니 뭘 하는 게야?!”

“아, 아! 죄송합니다!”

그녀가 황급히 아미파의 마차에 올라탔고, 아미파의 행렬이 도망치듯 거리를 벗어났다.

떠나는 아미파에게 홍미를 완전히 잃은 이공녀가 좌중을 향해 외쳤다.

“시끄럽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이더냐! 너희들도 모두 물러가라!”

그녀의 호통 소리가 시원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자 자, 이제 돌아가세.”

“다선랑은 결국 못 봤지만.”

“그래도 이공녀님은 뵈지 않았는가?”

그녀의 말은 명령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군중 중에 누구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그것이 연서린이 가진 고유한 기질이었으니.

모두가 흩어져 제 갈 길들을 가자, 원각정의 정문 방향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어찌 그 무거운 발걸음을 여기까지 옮기셨소?”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동생의 목소리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하!”

정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연소현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낀 채, 자신의 누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연서린이 말했다.

“소현이 너는 여전히 쪼그맣구나.”

그것이 몇 년 만에 재회한, 동생을 향한 누님의 첫 인사말이었다.

* * *

원각정 정원.

태양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재잘거리며 우는 풀벌레 소리 이외에 남매의 재회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귀한 손님들이라고 들었는데. 그 손님들을 기다리게 두고, 이 누님이랑 잡담이나 하고 있어도 되겠느냐?"

“괜찮소.”

연서린의 말에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긴 여행 동안 쌓인 여독을 풀고 있을 것이니,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이 녀석이…!”

그러자 연서린이 성큼 다가와 연소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빈말이라도 이 누님이 더 중요하다 하지 않는 것이냐? 네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찾아온 내 발걸음이 다 민망하구나.”

연소현이 맑은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의 사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 어찌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둘째 누님을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겠소.”

“이 녀석. 여전히 그 주둥이는 청산의 유수와 같구나.”

“하하하."

“그사이에 키나 더 클 것이지.”

연서린이 얄밉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연소현의 머리를 더욱 거칠게 헤집어 놓았다.

“그래. 다른 아이들은 만나 보았느냐?”

“비 녀석은 만났지만….”

연소현이 쓰게 미소 지었다.

“누님이 더 잘 알지 않소? 지금의 이 가문은 피붙이조차 마음대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그 말에 연서린이 잠시 침묵했다.

“…그래. 그렇지.”

그녀의 한숨 섞인 말이,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섞여들었다.

“…이 빌어 처먹을 기문에서 결국 형제들끼리 칼을 겨누는 꼴을 봐야 한다니.”

연소현이 풀 냄새 나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피가 흘러도, 그 피가 누님의 손에 묻을 일은 없을 것이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피 냄새 가득한 말에 연서린이 벌컥 소리 쳤다.

“이 누님이 그토록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말이더냐!”

그녀는 힘껏 연소현의 등짝을 후렸다.

“내가 바로 그 강호(江湖)에 이름 높은 천의무봉이다!”

그녀의 말에서는 위엄이 절로 넘쳤지만, 연소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무리할 필요 없소. 누님의 처지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

"...."

잠시 연소현을 바라보던, 연서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그녀는 정원의 풀밭에 주저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소현 또한 말없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이 원각정은 여전히 이토록 아름다운데.”

호수에 달빛이 보석처럼 부서지고,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봄바람에 조용히 몸을 누이고 있었다.

“이제 가문은 선녀(仙女)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와 너무도 달라졌구나….”

선녀 어머니라는 말은, 연서린이 약소유를 일컫는 애칭이자, 존칭이었다.

“이젠 절대 그때와 같은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

그녀의 말에는 깊은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소현아.”

“예, 누님.”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돌대가리라서 말이다.”

"...."

연소현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는 연소현을 돌아보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에는 네 녀석이 먼저 나를 멍청하다 놀리더니."

연소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젠 누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것 같으니,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역시 너는 한마디를 안 진다니까.”

연서린이 낮게 웃었다.

연소현은 가만히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 봐도, 이 돌머리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더구나.”

"...."

이 너무도 거대한 가문에 짙게깔린 어둠은, 그 규모만큼이나 어둡기 짝이 없어, 가장 자유롭고, 가장 명예로운 무사마저, 단단히 옥죄고 있었다.

“네가 칩거를 깨고 나섰다는 것은, 이 더러운 가문을 씻어 낼 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란 말이겠지.”

“…최대한 살릴 것은 살려서 갈것이오.”

낙양검가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은, 중원국에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던, 세력간의 평화가 무너진다는 뜻과 같았다.

가만히 흐르는 침묵 속에서 연서린은 생각을 정리했다.

침묵이란 어련히 불편한 것이었지만, 이 남매간에 흐르는 침묵은 그저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그래. 옛날부터 너는 한다면 해내는 녀석이었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컸구나, 소현아. 늠름해졌어. 이제 대장부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연소현이 입술을 비죽였다.

“…조금 전까지는 여전히 작다고 놀리더니.”

연서린이 쓰게 웃었다.

“녀석. 나를 위해서 어린 시절의 흉내를 낼 필요는 없다.”

그 말에 연소현이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연소현의 얼굴은, 달빛 아래서 마치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

그녀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했다.

“정말 무섭게 자랐어. 처음엔 못 알아볼 뻔했다.”

연소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저 밤하늘을 볼 뿐이었다.

"...이제야 확신하겠구나. 어릴때부터 내가 생각하던 것이 맞았어.”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역시 아버지의 핏줄을 가장 선명하게 받은것은 바로 소현이 너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