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예측 불가 (2)
[명분 싸움으로 끌고 가서 대공자를 충분히 깊이 끌어들이면, 승산이 생긴다.]
“명분 싸움으로 들어가려는 상대를 확실히 찍어 누르면, 우리가 이긴다.”
[그렇게 되면 대공자의 거처에 다선랑과 함께 묵을 수 있을 것이야.]
“그렇게 되면 원각정에서는 아미파를 다선랑과 떼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총무사태와 연소현.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는 두 사람의 전략이 거짓말처럼 한 지점에서 충돌했다.
* * *
정아가 연소현의 어깨에 흑잠사 외투를 둘러 주며 물었다.
“결국, 직접 나서시는 것이옵니까?”
연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명분을 권위로 누르려면, 내가 나서는 것이 확실하니까.”
그의 외투가 휘날렸다.
충실한 시녀장이 그 뒤를 따랐다.
* * *
해가 저문 시각.
평소였다면 상회나 상단 혹은 가문의 연락책들이 느긋하게 저녁 시간을 즐기고 있었을 시각.
하지만 오늘 원각정 정문 앞 거리에는 평소보다 이례적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제 곧 다선랑이 도착하겠군.”
“과연 그들이 낙양에 지점을 새로 낼 계획일까.”
“대공자와 사공자의 합작계획이 탄력을 크게 받겠군.”
이런 연락책들 이외에도.
“오오 사천제일미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라니!”
“거기 앞에! 끼어들기 좀 하지 맙시다!”
소문에 이끌려 그저 다선랑을 구경하기 위해서 모여든 이들까지.
그렇게 모여든 이들로, 원각정앞 거리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그렇기에 아미파 사감 비구니의 호소는 더 큰 힘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문서는 다선랑의 부모 되시는 분들이 저희에게 주신 서찰입니다!”
그녀의 호소가 이어질수록, 주변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는 이들이 늘어갔다.
“그래, 그렇지. 딸들을 만리타향에 보내야 했던 부모들 심정이 어떻겠어?”
게다가 말이며 마차에서 내린 비구니들이 보기 좋게 늘어서서, 원각정 방향으로 간절히 합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꽤 그럴싸한 연출이 되었다.
“평소에 아미학관이 다선랑의 부모들에게 충분히 믿음직한 모습을 보였으니, 저런 서신을 건넸던 것이 아니겠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동향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딸들과 함께하길 바랐던 것이겠지.”
웅성임이 커져 갔다.
“검가의 대공자님이 너그러운 아량을 베푸셔서, 저들을 함께 받아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초대장이라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부모의 마음도 대공자님께서 모르지 않으실 거야.”
심지어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연락책들조차, 다선랑의 복잡한 사정을 알 리가 없기에, 사감 비구니의 명분에 설득력이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
* * *
마차 안에서 사감 비구니의 호소를 듣는 다선랑은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을 협박해서 받아 낸 문서를…!”
견디다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막내 다선랑 아가씨를 다른 다선랑 아가씨들이 붙들었다.
“안 돼! 그 사실이 우리 입으로 외부로 새어 나가면, 사천에 있는 우리 가문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때가 아니야!”
막내 다선랑 아가씨가 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하지만…!”
상관난화가 분해하는 그녀를 조용히 안아 주었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무거웠고, 동승하고 있던 아미파의 호신술 선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좌불안석 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청수가 혀를 찼다.
“도대체 아미파는 뭐가 문제길래 이 착한 아가씨들을 괴롭히는 거요?”
“그, 그것이….”
호신술 선생이 우물쭈물하자, 청수가 인상을 썼다.
“그것이?”
그러자 호신술 선생이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문파의 일을 행함에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서는 안 되는… ”
“헹."
그녀의 중얼거림에 청수가 코웃음을 쳤다.
'구대문파라 불렸던 정파나, 이 사람 냄새라고는 없는 가문이나. 삭막하고 뒤틀린 것은 매한가지로군.’
비구니의 대답에 속이 쓰리기는 그녀 또한 매한가지였다.
이제까지 기관의 무사로 낙양검가에 충성해 오며, 납득이 가지 않는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해 왔던가.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 왔던 것은 그녀가 아니었던가.
'...적어도 나는 그 불합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만둔 거라고.’
그녀는 불편한 마음을 표정으로 내비치며, 창밖을 노려보았다.
밖에서는 아미파 사감 비구니의 호소가 절정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그러니 부디 대공자께서는!”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치고 들어와 그녀의 호소를 단숨에 끊어 먹었다.
“누가 이리 남의 집 앞에서 시끄럽게 구나?”
* * *
원각정의 정문에 거의 도달했던 연소현과 정아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이 목소리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감정의 동요와 그리움의 편린이 스쳐 지나갔다.
* * *
애초에 다선랑 때문에 모여들었던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던 원각정의 정문 앞 거리였다.
거기다가 아미파 사감 비구니의 행동은 물에 끓는 기름을 부은 것과 같았다.
그녀의 호소에 동조하거나, 서로 의견을 교환하거나, 갑론을박을 펼치던 이들로 소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이리 남의 집 앞에서 시끄럽게 구나?”
그 모든 소음이 일시에 그쳤다.
어째서 자신들이 입을 다물었는지, 이유를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 었다.
그 소란 통을 뚫고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온 목소리는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 목소리에는 너무나도 뚜렷하기 짝이 없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것을 느낀 것은 아미파의 비구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수...!'
소란을 뚫고 선명하게 울려 퍼진 그 목소리는 막대한 내공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막대한 내공보다도,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이가 보이는 존재감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말이야...”
고요해진 거리에 포석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통이 큰 옷차림 아래서도 느껴지는 단단하고 탄력 넘치는 체형.
훤칠한 성인 남성과 맞먹는 신장에, 보기만 해도 시원시원한 걸음걸이.
어깨에는 날이 서지 않은 검 한 자루를 얹은 채.
“여기가 무슨 야시장도 아니고 말이야.”
대충 끈으로 묶은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아무렇게나 흩날렸다.
“감히….”
그리고 그 머리카락 아래서,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기운으로 번들거리는 여인의 시선이 있었다.
그녀는 모두를 오시하고 있었다.
“웬 잡것들인지.”
그녀의 발걸음이 멎었다.
사람들은 숨을 삼켰다.
“내 직접 그 죄를 물어야겠다.”
거리의 불빛 아래, 낙양검가의 이공녀 연서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여기 모여든 이들은 애초에 낙양검가에서 일하거나, 상회나 상단의 연락책으로 일할 정도의 사람들로, 그들은 당연하게도 낙양검가의 정보에 밝았다.
그리고 그들이 낙양검가의 사정에 밝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작금, 중원국에 사는 이들 중에서 지금 자신들의 앞에 있는 인물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이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이, 이공녀님!”
“검가의 폭군(暴君)!”
“천의무봉(天衣無縫)! ”
“인중봉(人中鳳), 연서린!”
좌중에서 그녀의 별호와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선랑을 구경하고자 모여들었던, 호기심에 어린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강자를 향한 동경(憧憬).
군림하는 자를 향한 경외(敬畏).
“어라.”
연서린이 어깨에 얹은 연습용 검을 까닥이며, 비구니들을 향해 말했다.
“이거 아미파의 비구니들 아냐?”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
하지만 아미파 중 그 누구도 그 태도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운.
난세에 패도(覇道)를 걷는 군주의 기운이 이러할까.
“처음 뵙겠습니다.”
사감 비구니가 마른침을 삼키고 앞으로 나서서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저희는 검가의 이공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천의 아미파에서….”
“잊었나 본데.”
"...?"
사감 비구니의 말을 사정없이 끊어 버린 연서린이 시퍼런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 너희가 소란을 피운 죄를 묻겠다 하였다.”
"...."
논리도 없고, 경우도 없었다.
평소라면 입이 열 개라도 된 것 처럼, 따지고 들었을 이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알 수 없는 기운이라도 서려 있는 것인지.
지배자의 핏줄을 이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사감 비구니는 다시 한번 마음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검가의 이공녀님이라고는 하지만….”
입술이 바짝 말라 왔다.
“저희는 사천 아미파의 일원으로, 이런 식의 취급을 받는 것은 감히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연서린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납득하기가 어렵다?”
연서린이 되물어 오자, 이제 말이 좀 통한다고 느낀 사감 비구니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는 단지 대공자님께 호의를 구하고자….”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사감 비구니의 말은 듣지도 않고, 연서린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비구니 하나가 사감 비구니를 도우려 입을 열었다.
“저기….”
“그렇다면 말이다.”
그때 연서린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어 보였다.
“무림인답게 무기를 들어라.”
그녀의 연습용 검이 비구니들을 향했다.
“무림인답게 싸워, 내 존중을 구하라.”
갑작스레 산군(山君)을 마주친 약초꾼이 이러할까.
물질하던 해녀가 상어를 마주치면 이러할까.
조금의 날도 서 있지 않은 연습용 검이 마치 가슴팍에 쑤셔 박히는 기분이었다.
'이, 이건 말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상대다.'
검가의 폭군은 들었던 것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사감 비구니는 전략을 바꿔, 거리에 가득한 이들에게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러분! 저희는 단지 다선랑 아이들의….”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자신도 모르게 사그라들었다.
"오오오!”
이미 좌중은 열기가 띤 시선과 함성으로 연서린의 이름과 별호를 연호 중이었다.
“폭군! 폭군!”
“아미파가 천의무봉에게 도전한 다!”
“존중을 구하려면 검을 들라!”
“자신을 증명하라!”
그랬다.
여기는 낙양검가였다.
중원국에서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 권략술수(權略術數)와 암중모략(暗中謀略)을 펼치지만.
이곳은 결국 원로급 의전을 받는 내원총관조차 자신의 두 발로 걸어다니는 가문.
상무정신으로 무장한 무사들의 가문, 낙양검가였다.
좌중의 열광적인 연호와 광기 어린 환호 속에서.
무사들의 여왕.
천의무봉 연서린이 오만하게 웃었다.
“자, 오라.”
아미파의 비구니들은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 * *
“과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누님의 모습을 확인한 연소현이 껄껄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저분이 바로 그 유명한 이공녀님이시군요.”
“그래, 그 이공녀. 예측불허의 내 누님이시지.”
연소현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측 불허의 패왕지도(霸王之道). 아버지의 핏줄을 가장 진하게 물려받았다고 하는 말이 절대 틀린 말이 아니라니까.”
저 당당한 태도.
오만한 얼굴을 보는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가.
연소현은 어딘가 아득한 것을 보는 얼굴로 자신의 핏줄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 사람이 내 누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