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30화 (130/350)

제5편 예측 불가 (1)

며칠 전 회의.

연소현이 입을 열었다.

“연하응.”

연하응이 즉각 대답했다.

“다선랑에 대한 형님의 초청은 외원을 통해 정식 절차를 거쳐 승인되었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호위 병력에 대한 요청은?"

“명하신 대로,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본가의 무력 단체장 중 한 분이신 염 장로님께 요청을 넣었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염백하가 이어서 답했다.

“외원에 정식으로 요청을 받은 염 장로님은 '혹시 모를 사태'에 유연하게 대비하기 위한, 다양한 병종 지원을 전쟁부(戰爭部)에 요청 하셨습니다.”

공식적인 회의 자리였기에, 아버지를 염 장로라 칭하는 염백하였다.

“낙양 근교까지의 호위 요청은?”

“서안지사께서 협력 요청을 받아 들이셨습니다.”

“좋아. 어떤 명분도 적들에게 주지 않게끔, 공식 요청에 어떤 작은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연하응과 염백하가 동시에 답했다.

“청수.”

그동안 회의에서 오가는 말을 멀뚱멀뚱 듣고만 있던 청수가 즉각 대답했다.

“예, 주군.”

“만일 적들이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한다면, 그 대상은 다선랑이다. 그들에 대한 호위는 네게 일임한다.”

“존명(尊命).”

청수는 원래 가주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수호하는 기관의 지휘무사 출신이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아미파는 낙양검가에 비하면 약소 문파에 지나지 않는다.”

연소현이 모두에게 말했다.

“그리고 투자단과 함께하고 있는 아미파의 인원들은 우리 진영에 비해서도 전력이 약세다.”

낙양은 그들에게 낯선 땅이었으며, 투자단과 함께하는 이들은 아미파 전체 전력에서도 일부에 불과했다.

“저들도 그것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미파에 대응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은 무력 충돌이 아니다.”

연소현이 단정했다.

“그들은 철저히 약자의 싸움을 할 것이다.”

* * *

낙양검가, 내성 구역.

점차 해가 저물어 가는 가운데, 잘 정비된 거리를 따라 늘어선 고층 전각들에 하나둘씩 유등이 켜지고 있었다.

성도에서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보기 힘든 고층 전각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던 투자단의 행렬을 맞이한 것은 사공자 측의 유 장로였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녀의 모습에 당고규가 마차의 지붕에서 펄쩍 뛰었다.

“유, 유 장로님-!”

그가 한달음에 유 장로에게 달려 갔지만, 유 장로는 그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크허헉!”

그녀가 우아한 보법으로 달려드는 당고규를 피해 버리자, 당고규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 이쪽으로."

그가 구르든 말든, 유 장로는 품위 있는 미소로 창밖을 내다보는 투자단 일원들에게 말했다.

“접객당에서 여러분의 여독을 풀어 드릴 연회를 준비 중입니다.”

그녀의 말에 투자단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연회를 싫어하면 사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중에는 물론 별종도 있는 법.

“저희는 숙소부터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아미파였다.

연회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어찌보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나, 그들이 오늘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냥 무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물론이죠. 접객당에서 가장 훌륭한 숙소를 준비 중입니다."

그때 아미파 마차의 문이 열리고, 총무사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오, 유 장로.”

유 장로는 염 장로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아미파 총무사태에 비하면 배분이 아래였다.

“아, 총무사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총무사태의 등장에도 유 장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이미 아미파의 책임자가 총무사태라는 정보를 연하응의 전서구를 통해 얻었으니.

“유 장로..."

“잠시.”

유 장로는 공손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손을 들어 총무사태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낙양검가의 대로 한복판에서 고독노귀와 기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길을 막고 있는 것은 본가의 예법에 어긋나니, 먼저 접객당으로 이동하시지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겠네.”

총무사태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검가에 왔으니, 검가의 법을 따라야겠지.”

무슨 속셈인가.

그 의외의 모습에 유 장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쨌든 순순히 총무사태가 통제를 따라 준다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자, 그럼 저를 따라서 이동을...“

“아, 그러고 보니….”

하지만 총무사태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 빈니는 지금부터 선약이 있어, 그쪽으로 향해야겠네.”

어두운 마차 안에서 총무사태의 말이 이어졌다.

“혹시 선약을 지키러 가는 것도 검가의 예의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역시 쉽게 갈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요. 단지….”

유 장로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물었다.

“총무사태께서는 본가에 초행이라고 알고 있는데, 혹시 안내가 필요하시면…."

부드럽게 돌려 목적지를 알아내려는 유 장로의 의도에 총무사태가 코웃음을 쳤다.

“그쪽에서 마중을 나오기로 했으니, 내 걱정은 할 것 없네. 우리 아이들이나 잘 부탁하네.”

“그러시지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낙양검가 내부에서 움직일 총무사태의 행선지는 결국 유 장로의 손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자, 그럼 투자단은 제 인도를 따라 주시길.”

잠깐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큰 문제 없이 투자단 행렬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연소현이 유 장로에게 말했다.

“유 장로는 투자단을 어떻게든 접객당으로 안내해 주시오."

“어떻게든 말입니까?”

“어떻게든.”

연소현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된다면….”

* * *

투자단을 뒤따라 출발하던 아미파의 마차들과 말을 탄 무승들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중진들을 태운 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던 총무사태의 마차도 멈춰 섰다.

“무슨 일이냐?!”

총무사태의 호통이 날아들자, 다선랑의 호위를 책임지는 사감 비구니가 급히 대답했다.

“다선랑의 마차가…!”

다선랑의 마차는 이미 그들의 행렬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당장 저들을 따라가거라!”

총무사태가 자신의 마차를 돌리려던 때, 그녀를 마중 나온 이가 도착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가늠하기 힘든 수준.

적어도 벽을 넘었을 것이 분명한 고수에게 총무사태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게.”

고수는 인상을 썼지만,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도 한마디를 보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총무사태님. 얼마나 급한 용무가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쪽에서 기다리시는 분들도 한가한 분들은 아닙니다.”

총무사태는 그런 그의 말을 무시하고, 사감 비구니에게 전음을 날리는 것에 집중했다.

[나는 이 약속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지금부터 네게 지시를 할 것이야. 반드시 이 지시에 따르도록 하여라.]

* * *

“아미파 쪽의 책임자는 백발성성 고독노귀라고 하오.”

연하응의 전서를 받은 연소현의 말에 유 장로가 한숨을 쉬었다.

“그 노파가 다선랑을 따라붙는다면, 떼어 놓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 사천에서 근무했었기에 노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유 장로였다.

“그러니 유 장로는 본 대공자가 이야기한 대로만 하시오.”

“투자단을 어떻게든 접객당으로 안내만 하라는 말씀이셨지요?”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 노파는 철저한 계획 속에서만 움직이는 자이니, 틀림없이 본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영향력 있는 이들을 만날 약속부터 잡았을 것이오.”

* * *

급히 행렬의 방향을 돌려, 유유히 앞서가는 다선랑의 마차를 따라잡은 아미파였다.

“연 고문님! 이게 대체 무슨 경우입니까!”

“무슨 경우냐니요?”

사감 비구니의 외침에 다선랑 마차의 지붕으로 옮겨 앉아 있던 연하응이 의뭉을 떨었다.

“다선랑은 본가의 대공자님께서 초청한 분들이니, 당연히 대공자님의 처소로 향하는 것이지요.”

사감 비구니가 벌컥 화를 냈다.

“어찌 남녀가 유별한데, 한 처소에 남녀를 함께 머물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연하응이 무슨 말이냐는 태도를 과장되게 몸짓으로 표현했다.

“한 처소요? 대공자님의 원각정은 규모가 작은 장원(場院)과 맞먹습니다. 그저 전각 한 채가 아닙니다.”

"...."

순간 말문이 막힌 사감 비구니였다.

가주의 처소도 아니고, 무슨 공자의 처소가 작은 장원만 한 규모란 말인가?

그 틈을 타서 연하응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원각정에는 귀빈들을 모실 수 있는 모든 시설과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요. 본가에서도 가장 수준 높은 시녀들과 하녀들이 있으며, 동시에 본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안전한 지역이면서….”

“자, 짐깐!”

“그리고 원각정의 풍광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풍광을 보고싶어 하는 이들이 낙양의 사교계에서도 부지기수에….”

사감 비구니가 말을 달리며, 버럭 소리쳤다.

“다선랑은 우리 아미파에 보호 책임이 있단 말입니다!”

연하응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지만,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가 정면을 본 채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한낱 외원 소속의 고문일뿐이라, 그저 요청받은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이익…!”

사감 비구니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두 사람이 그렇게 설전 아닌 설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다선랑의 마차는 원각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미파의 말을 탄 무승들과 마차들도 그 뒤를 추격하듯 쫓았다.

* * *

“안 됩니다.”

원각정의 정문.

자신을 일령이라고 밝힌 시녀의 태도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사감 비구니는 자신들이 호위로서 다선랑과 함께 원각정에 머물러야 한다고 다시 한번 주장했다.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

얼굴 두껍기로 아미파에서도 밀리지 않는 사감 비구니가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힐 정도였다.

어디 일개 시녀가 대(大)아미파의 제자에게 이리도 당당한지.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였다.

"...."

하지만 하녀들을 대동한 일령이라는 시녀의 오만할 정도로 싸늘한 눈빛을 보는 순간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곳이 어디던가.

낙양검가 대공자의 처소가 아니던가.

머리를 식힌 그녀는 곧 총무사태가 전음으로 내렸던 지시를 떠올릴 수 있었다.

* * *

[우리는 약자이나, 명분은 분명 우리에게도 있다.]

[반드시 놓치지 않고, 그 점을 물고 늘어져야 할 것이야.]

* * *

사감 비구니는 다선랑을 구경하기 위해서 원각정 앞에 대기하던 이들에게 호소하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부디 우리 아미파의 선생들이 어린 다선랑을 곁에서 도울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외침에 좌중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사감 비구니는 품에서 문서를 꺼내 들어 보이며 계속해서 호소했다.

“이 문서는 다선랑의 부모 되시는 분들이 저희에게 주신 서찰입니다! 이 문서에는 저희 선생들이 다선랑을 꼭 곁에서 보살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녀의 호소가 이어지자 점점 좌중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감 비구니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비록 대공자님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고 하나, 이 점을 어떻게든 넓은 아량으로 받아 주시어, 부디 저희가 다선랑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꽤 설득력이 있는 명분에 호소였다.

좌중이 그런 그녀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원각정 시녀의 얼굴에 난처함이 스쳤다.

'좋아. 이대로 계속 밀어붙인다면…!’

회심의 미소를 감춘 사감 비구니가 호소를 이어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니 부디 대공자께서는!”

그때 그녀의 말을 끊는 목소리가 있었다.

소란을 뚫고 너무도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누가 이리 남의 집 앞에서 시끄럽게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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