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천의무봉(天衣無縫)
낙양검가.
특등급 폐관(閉關) 수련장.
무사 하나가 쭈뼛거리며, 폐관수련장의 입구로 들어왔다.
눈부신 오후의 햇빛 때문에 아주 잠깐 실내가 어둡게 보였다.
하지만 기를 다스리는 재능을 타고난 무림인답게, 눈꺼풀 한 번 깜빡이기 무섭게 실내의 모습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게 폐관수련장…?”
그의 기억 속에서, 사문의 폐관수련장이란 그저 산골의 동굴 하나를 그럴싸하게 표현하는 말이었다.
절대로, 양쪽 절벽 사이에 꽉 들어찬 오 층짜리 전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엄청나군….”
아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안내하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긴 특등급 폐관수련장이니까요.”
“아…!”
“하지만 일반적인 무사분들이 사용하시는 폐관수련장도 항상 이용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답니다.”
“아, 예. 그렇군요….”
두 사람은 반들거리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향했다.
“후후. 아직 본가에 익숙해지시지 않은 모양이네요.”
은근히 젠체하는 여인의 말투에도, 시설에 위압당한 무사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저는 감숙성 북쪽에서 활동하다가 검가(劍家), 아니지. 본가에 합류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검가를 아직 본가라고 표현하는것이 낯설었다.
“후후. 그렇죠. 본가라고 하셔야죠. 공동파(I控恫派) 또한 우리 낙양검가의 일원이니까요.”
무사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죠 공동파는 이제 검가의 일부….”
“일부가 아니라 한 가족이죠.”
“예, 가족이죠.”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가족으로도, 일원으로 여기기에도 아직은 낯설었다.
공동파는 낙양검가의 종속 문파에 불과할 뿐.
그는 자신의 낡은 검의 해진 손잡이가 괜히 부끄러웠다.
공동파가 낙양검가에 홉수되면서, 공중분해되어 버린 지, 어언 십여 년.
그는 스승과 단둘이서 부평초처럼 감숙을 떠돌았었다.
하지만 기댈 곳 하나 없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그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에 그는 스승의 사후(死後)에, 다른 공동파의 일원들처럼 낙양검가행을 택했다.
“그러시다면 이번이 본가에서의 첫 임무이신가요?”
무(武)학자들이 볕 드는 창가에 여유롭게 앉아 점잖게 토론하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던, 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첫 번째 임무입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갔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 주었다.
“본가의 폐관수련장은 본가의 무공학관에 소속된 무학자들이 상시 머물고 있죠. 그들은 사용자가 자신에게 적합하게 무공을 개량하는 작업을 돕는답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이곳은 특등급인 만큼 더 많고 훌륭한 무학자들이 배치되어 있지만 말이죠.”
무사의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멈췄다.
“무공을 사용자에 맞춘다고 하셨습니까…?”
스승에서 제자에게.
또 그 제자에서 다음 제자에게.
그렇게 수십 대를 이어 내려오는 무공에 모든 것을 쏟아, 그 전해 오는 형(形)과 담겨 있는 의(意)를 바르게 익혀 내는 것에 사활을 걸었던 구(舊) 정파.
그것이 신성한 전통.
“그럼요. 무공을 창시한 사조 이외에 그 무공에 완전히 적합한 이가 몇이나 될까요?”
여인은 구 정파의 전통을 비웃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과거의 악습에 묻혀 버리는 것을….”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본가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답니다.”
그녀는 매서운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뒤를 돌아 복도를 따라 걸었다.
충격에 휩싸인 무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여인의 뒤를 따랐다.
“기억하세요.”
여인은 정면의 거대한 문을 열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에게, 본가는 아낌없이 무한한 자원을 제공 한답니다.”
그것을 위한 금력.
그것을 위한 권력.
그것을 위한 무력.
그것이 낙양검가였으니.
문이 열리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절벽 사이의 넓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무장이 었다.
"...!"
무사는 가장 먼저 청아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향을 맡는 정도만으로도 기운이 꿈틀거릴 정도로 정순한 영약의 향기였다.
그 유명한 약선문(藥仙門)의 명찰을 착용한 약제사(藥劑師)들이 신중한 표정으로 기구들을 조정 중이었다.
그 옆에서는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여 배치된 것으로 보이는 의원들이 의서를 읽고 있었다.
연무장의 가장자리를 따라서는, 무사 '자신과 같은 임무'를 받은 인물들이 연습용 검을 들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인이 연무장의 가운데를 가리켰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저분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무학자들과 함께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는 한 묘령의 여인.
성인 남성과 맞먹을 신장에 잠시 보는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폭발적이고 사나운 기운을 담고 있는 육체.
눈에서 은은하게 흐르는 기운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고 사로잡을 듯한 기세.
명백하게 벽을 넘은 자의 그 존재감에 무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분이….”
저 고수의 대련 상대라는 첫 임무를 받은 무사의 말에, 그를 안내해 온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네. 바로 저분이 중원국에 그 이름 높은 천의무봉(天衣無縫). 이 낙양검가의 이공녀이자 자랑이신, 연서린(淵瑞鱗)님이십니다.”
* * *
잠시 후, 식사 시간.
이공녀 연서린은 자신의 전담시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으으…, 영약식(靈藥食). 맛없다. 맛없어.”
그녀는 자신의 털털한 성격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세상 편한 자세로 앉아 밥을 먹는 중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감히 출입할수 없는 곳이라 가능한 행동이었지만.
전담시녀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은근슬쩍 흘리지 마시고, 남김없이 모두 꼭꼭 씹어 드세요.”
다른 전담시녀도 웃으며 말했다.
“일부러 흘리시면 바닥에 떨어진것 전부 회수해서 다시 드시도록 해 드릴게요.”
“홁과 먼지가 묻었다고 해서 봐 드리지 않아요.”
이공녀는 씹을 때마다 올라오는 진한 쓴맛을 느끼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녀들을 바라봤다.
“…너희는 어디 가서 나를 평생 섬기며 함께했다고 말하고 다니지마라.”
“그보다는요.”
전담시녀들은 평소처럼 미소 지으며 그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
“방금 새로 들어왔던 그 신입 무사는 어떻던가요?”
“오랜 시간 무림행 속에서 실전을 겪었다고 하더니, 기세가 제법 사납던데요?”
이공녀가 억지로 음식을 삼키고 대답했다.
“아, 그 공동파의 검사?”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빈손으로 시작해서 그 험한 감숙 북부에서 오래 살아남았다기에, 혹시 공동의 비전(祕傳)을 익혔을까 싶어 불렀던 것인데….”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별것 없더군.”
그녀의 말에 전담시녀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감숙에서 마두(魔頭)를 몇이나 잡아 죽인 인간 사냥꾼을 별 것 없다고 하시다니.”
“공동이 분해되다시피 하고 십여 년 동안, 현상금만으로 살아온 실력자였는데요.”
이공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별것 없는 건, 별것 없는 거지.”
공동의 검사는 비무 이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헜지만, 사실 더 크게 실망한 쪽은 그녀 쪽이었다.
“…뭐, 그래도 감각은 상당히 쓸만한 것 같았어. 그러니 공동의 무공이 아니라 형산(衡山)의 개량된 무상검형(武像劍形)을 익히는 쪽이 나아 보이던데. 그게 아니라 체질을 따지자면 차라리 본가의 검심검명을 익히는 쪽이…?”
여느 때처럼 혼자만의 무공 세계에 빠진 이공녀의 모습에 시녀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친 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무공 바보….”
“이제는 자신의 수련이 아니라 다른 사람 수련까지 챙기는 건가요?”
이공녀가 한동안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이자, 전담시녀들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들었나요?”
“혹시, 잠시 후 본가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그분들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한목소리로 외쳤다.
“다선랑!”
그녀들은 꺅꺅거리며, 의자에 앉은 상태로 발을 동동 굴렀다.
“혹시 낙양에 다선랑의 지점이 생길지도 몰라요!”
“그럼 혹시 본가에도 다선랑의 장신구들이 납품될지도…?!”
“그러면 혹시 저희도 이공녀님의 전담시녀이니만큼 하나쯤은…?!”
그 소란에 이공녀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들을 바라봤다.
“다선랑이 뭐야…?”
무공밖에 모르며, 그저 남들이 꾸며 주는 대로 다니는 이공녀가 다선랑을 알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만 그 물음에 전담시녀들이 자신의 주인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 다선랑을 모르신다고…?”
그리고 폭풍 같은 다선랑에 대한 설명과 칭송이 이공녀에게 인정사정없이 퍼부어졌다.
“알겠어! 알겠다고!”
참다못한 이공녀가 귀를 막으며 외쳤다.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두 전담시녀는 한참을 더 쏘아붙이고서야, 이공녀를 놓아주었다.
그녀들은 넋이 나간 것 같은 이공녀를 버려두고 자신들끼리 재잘 거리며 수다를 이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 다선랑이 관심을 보이는 분야가 예술품 쪽이라고 하죠?”
“맞아요 무명 장인들을 발굴하여, 장신구의 세계를 예술의 경지에 끌어올린 그분들이 이제는 진짜 예술에도 관심을 보이고 계신 것이죠!”
“오오. 과연 그분들이 예술계에는 또 어떤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실지…!”
“그렇기에 그분들이 낙양. 아니, 중원국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분인 대공자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것도…!”
실언이었다.
급히 다른 전담시녀가 입을 막았음에도, 이미 튀어나와 버린 말은, 이공녀의 귀에 들어간 뒤였다.
“뭐라고…?”
다른 전담시녀의 입을 막은 전담시녀가 식은땀을 홀리며 답했다.
“아뇨, 아뇨. 아닙니다. 단순한 말실수랍니다. 사공자님을 말하려했던 것인데 말을 실수한 것이죠.”
그녀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자, 말을 실수했던 시녀도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사공자님을 말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사공자님이 다선랑을 초대하셨어요.”
“내가 바보로 보이나?”
이공녀의 손에 힘줄이 솟았다.
“연비. 그 녀석은 독이나 만지작거리는 녀석이지, 중원국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인이 아니야.”
건드리지도 않은 식탁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하고, 찻잔이 쓰러졌다.
“말해.”
전담시녀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 * *
“소현이가, 그 아이가 칩거를 끝냈다고?!”
전담시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걸 나에게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단 말이냐?!”
방 안을 서성거리던 이공녀가 자신의 연습용 검을 주워 들었다.
“지금이라도 가 봐야겠다.”
그러자 두 전담시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말렸다.
“안 됩니다, 주인 아가씨!”
“폐관을 깨고 나가신다면, 호위 각주님께서 불호령을 내리실 거예요!”
이공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스승님이…?"
전담시녀들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말렸다.
“그분께서 이 폐관수련장에 있는 모두에게 절대로 주인 아가씨를 내보내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셨어요!”
이공녀가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그리고 내 동생의 이야기를 내 귀에 들리지 않게 하라고도 명하셨었겠지.”
전담시녀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 이번만은 스승님의 명령을 어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