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편 정중동(靜中動)
“그럼, 염 장군님. 다음에 또 뵐 기회가 있기만을 바랍니다.”
다시 피풍의를 뒤집어쓴 정륭과 비단로유격대가 염 장로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낙양까지 염 장로를 쫓아가니 어쩌니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서안으로 돌아가 다음 조와 교대를 해주어야 하는 그들이었다.
개항령(開港令) 이후, 지금에 이르러선 막대한 양의 해상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비단길 또한 매년 교역량이 순조롭게 증가하고 있었다.
서안은 거대도시 낙양과 비단로를 잇는 관문 도시로서, 여러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비단로유격대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 자당께 안부를 전해 드리도록 하고….”
잠시 망설이던 염 장로는 부모의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자당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자리를 좀 잡는 것이 어떤가?”
가문의 장남이지만, 사막과 황야를 사랑하는 사내가 미소 지었다.
“저보다는 저희 누님이 훨씬 뛰어난 서안지사가 될 겁니다. 제가 서안에 있어 봐야 분란만 일으킬 뿐이죠.”
“…부디 보중하게.”
정륭이 정중하게 포권했다.
“저희야 한낱 도적 떼나 상대하면 되지만, 장군께서는 더 큰 적들을 앞두고 계신 듯합니다. 부디 건승하시기를.”
* * *
“이야, 역시 천하제일가라는 검가의 이름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습니다!”
당가의 현인, 당고규가 진심을 담은 호들갑을 떨자, 연하응 역시 호들갑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아니에요. 여기가 사천이었다면, 당문은 이 이상을 보여 주었을 것이 아닙니까?”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게 사실이라면, 당문 또한 천하제일가문이라는 말씀이시지 않습니까?”
“앗, 아니었나요?”
“엇, 그렇습니까?”
잠시 후 두 사람이 함께 폭소를 터트렸다.
각 가문에서 외교적이고 사교적인 일에 매진하는 두 사람답게, 서로 사이좋게 얼굴에 금칠을 해 주며 아주 죽이 척척 맞아 들어갔다.
투자단에 속한 다른 이들 또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외지에서 습격을 당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었다.
어디 도움을 바라기도 힘들었고, 줄도 닿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지금처럼 습격의 이유조차 알기 힘든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모두 죽었고, 아군에는 피해 하나 없었다.
낙양검가의 무장병력과 그 이름 높은 검악파산이 함께한다는 것에는 단순히 안전을 보장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 * *
투자단의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다른 이들과는 반대로 분위기가 한껏 가라앉은 이들도 있었다.
아미 파였다.
"...."
누군가 상황을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아미파가 무슨 패잔병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전투 인원이든 비전투 인원이든, 방금 그들이 직접 목도한 낙양검가의 힘에 위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과거 구대문파(九大門派)중 하나의 일원으로, 자신들의 무공에 대한 무궁(無窮)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도 낙양검가의 무사와 겨루라고 한다면, 어떤 무승이든 기꺼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것이다.
하지만.
’…낙양검가는 사천당문과는 또 다르구나. 저들은 가문이나 문파따위의 규격을 넘어섰어.'
한 무승의 전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눈을 뜨고 있는 이 상태에서도, 방금 보았던 광경이 생생하게 그들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먼저 장갑수송마차.
지금도 암살단이 쏘았던 화살을 마치 훈장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달리는 마차의 위용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화살의 방어를 위해서 마부들이 보여 주었던 기민한 대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전투의 열기에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개개인의 무공이 아니라 집단적인 전술로 적들을 농락하던 검대의 모습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공포였다.
게다가 철갑기마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철갑기마를 탄 중갑의 무사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어딘가 국경의 군부여야 했다.
그런데 한 개의 가문이 그런 병력을 집단으로 훈련시키고, 집단으로 운용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다가 심지어 군사(軍師)도 있었다.
과거, 무림맹이 몰락하기 전.
그 시절 책사들이 서로를 높여주려 군사라 치켜세우던 것이 아니라, 진짜 전쟁과 전투를 위한 군사였다!
과거, 세가(世家)라 불렸던 이들이 지금은 대부분 훨씬 더 강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투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천하제일가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
'검악파산, 그놈의 경지가 더욱 깊어졌어.'
으드득.
한껏 호화롭게 치장한 마차였다.
'북방 전쟁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기나긴 여로로 인한 홁먼지와 흉하게 박힌 화살들로 인해서, 오히려 더욱 흉물스럽게만 보이는 마차였다.
으드득
게다가 아미파의 깃발마저 손상되어 버려, 지금은 깃발조차 없이 달리는 마차 안에 덩그러니 모셔져 있었다.
으드득.
차양을 한껏 드리워 어둠에 잠긴 마차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이를 갈고 있었다.
'어째서 저들과 우리는 이토록 차이가 나게 되었나?’
도대체 몇 번을, 몇십 번을, 몇백 번을, 몇천 번을 곱씹었던 물음이던가.
언제부터였던가.
어느 순간부터 무림의 대문파들이 비웃던 금력(金力)과 권력(權力)따위가, 천 년 이천 년을 쌓아 온 전통과 역사를 넘어서게 되었던가.
'돈(金), 돈(金), 돈(金), 돈(金), 돈(金), 돈(金), 돈(金)!'
자성신니라는 별호가 백발성성 고독노귀가 될 정도로 악착같이, 평생 모든 것을 갈아, 아미파에 바치고, 또 바쳤다.
희생하고 또 희생해 왔다.
자신의 악명과 아미파의 성공 신화를 바꾸었다.
그럼에도.
그런데 이미 과거 역사 속에서 벌어져 버렸던 차이는 어째서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가!
벌어지고, 계속 멀어만 지는가!
와자작.
잇몸이 찢어지고, 선홍색 피가 흘러내렸다.
벽을 넘어 경지에 이른 자의 철인(鐵人)과도 같은 육체에 상처가 났다.
하지만 그녀의 상처밖에 남지 않은 심장은, 대를 이어 내려온 해묵은 증오 위에서, 더 이상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선랑은 우리 아미의 품에서 키워 낸 보물이다. 아미파의 것이란 말이다!’
노파의 눈이 마치 훨훨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원한만이 가득한 심상 속에, 불심(佛心) 따위는 애저녁에 스러진 지 오래였다.
아니.
지금에 와서, 애초에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미몽(迷夢)과 망각(忘却) 속에서 희미할 뿐.
'다선랑은 나의 아미파를 앞으로 사천의 패자로 이끌어 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다.’
노파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 빈니가 그런 이들을 호락호락 넘겨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마라.’
평생을 금력과 권력의 개로 살아온 노파를 실은 허영과 증오의 마차가 낙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 *
염 장로는 담담한 표정으로 장갑 수송마차 안에 앉아 자신의 거검을 손질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그의 손길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오랜만에 맡은 전쟁의 향기로 점차 가열되어가고 있었다.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는 내면에서 조용히 끓어오르는 전의(戰意)를 다스렸다.
그는 검악파산.
과거 화산의 검군을 꺾어, 재기의 때를 노리던 정파의 위신을 바닥에 처박아 버린 장본인이었다.
* * *
낙양검가 원각정.
“아미타불, 오늘도 감사드리오.”
“허허. 보살님들의 따스한 마음씨가 부처의 마음씨와 같소이다.”
언제나처럼 거지꼴의 노승들이 원각정의 부엌에서 시주를 받고 있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노승들이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원각정이 소란스러웠기에, 조금 잠잠해진 틈을탄 것으로 보였다.
그런 그들을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령이 입을 열었다.
“스님들. 혹시 진짜로 소림사(少林寺)에서 오셨나요?”
그러자 노승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아닌가.
“음? 이 빈승이 늙어, 요즘 귀가 잘 안 들려서 말이오.”
“허허. 아미타불. 아미타불.”
삼령이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아까 분명 저 마경의 숲을 통해서 나온 것을 보았는데요? 저 숲은 숭산으로 이어져 있지 않나요?”
다른 노승이 급히 손을 저었다.
“빈승들은 그저, 저기, 뭣이냐, 그러니까 승산에 있는 다른 절에서온 중들이오.”
일령이 한숨을 쉬었다.
“숭산에 봉문 중인 소림사 말고 다른 절이 어디 있던가요?”
없었다.
“그, 그렇소? 사실 그 수, 숭산이 아니고….”
얼마나 거짓말이 서툰지, 추궁할 마음이 다 사라질 정도였다.
“에효.”
일령이 한숨을 쉬고, 그들에게 찻잎이 든 보자기를 넘겨주며 말했다.
“추궁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저 궁금해서 여쭈어보았던 것이에요.”
아마 봉문 중인 소림사를 벗어나 이렇게 내려오는 것이 밖으로 알려질까 두려운 것이리라.
그러자 노승들이 노골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 귀한 찻잎을….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평소처럼 노승들을 배웅하려던 세쌍둥이 시녀였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어물쩍거리는 노승들이 었다.
“음, 아미타불. 그것이….”
“험험.”
평소에는 축지법(縮地法)이라도 쓰는 것처럼 사라지던 노승들이 보이는 이례적인 모습에 일령이 물었다.
“볼일이 더 있으신가요?”
노승들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혹시 젊은 주인을 좀 뵐 수 있겠소?”
잠시 후.
연소현과 정중히 합장하여 인사를 나눈 두 노승이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어째서인지 세쌍둥이 시녀들은 그 미소에서 은은한 연꽃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마하목건련(摩訶目撻連)이여, 결국에 그 천안통이 사바세계의 고통받는 중생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도록 하니….”
“수보리(須菩提)여, 결국에 그 지혜와 자비가 그대를 팔고(八苦)의 나락으로 이끌게 되니….”
마하목건련과 수보리는 석가모니의 십대제자의 이름이었다.
연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고 있던 책임을 이제야 지는 것뿐입니다.”
그러자 두 노승이 빙긋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곧 보살이니, 그대의 고통을 죄의 대가로 생각하지 마시게나. 그것은 결국 고성제(苦聖蹄)에 지나지 않음이니.”
연소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고성제라니요. 이런 제가 감히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노승이 연소현을 달랬다.
“그대를 얽매는 어둠이 한없이 깊다 하여, 그 끝이 없을 것이라 여기지 말게. 나유타(那由他)의 세월이라 해도, 그 끝이 없겠는가?”
"...."
두 선사(禪師)의 말에 연소현은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부디 해탈(解脫)을 잊지 말게.”
“부디 열반(涅槃)을 잊지 말게.”
그런 연소현을 바라보며 두 노승이 길게 합장을 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대의 길에 줄수 있는 작은 선물이라네.”
“부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먼.”
무언가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에 잠시 넋을 놓았던, 세쌍둥이 시녀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노승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주인님, 이것은…?!”
연소현이 바닥에 놓여 있던 낡은 서책을 주웠다.
“…감히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을 받았구나.”
제암진천경 -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