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24화 (124/350)

제24편 완승(完勝)

마차 안.

창밖을 엿보는 청수에게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아. 결국에 쟤들 수준으로는 검악파산의 '검악(劍岳)'밖에 끌어내질 못하는 건가. 아쉽네. 말로만 듣던 '파산(破山)'을 보고 싶었는데….”

“저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청수가 창문을 다시 막고 자리에 앉았다.

“말씀하시죠.”

청수의 유유자적한 모습은 다선랑 아가씨들이 침착함을 되찾는데 큰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상관난화가 그녀에게 물었다.

“검가의 대공자님께서 보내셨다고 하셨습니까?”

“예. 그런데요?”

상관난화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혹시 대공자님께서 저희 상황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미리 언질을 주신 것이라도?”

청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일단 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상관난화가 말을 끊었다.

그녀의 어조가 더욱 급해지고, 빨라졌다.

“공격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희 다선랑의…."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

청수가 자신의 검을 잡으며, 손가락을 세워 보였던 것 때문이었다.

“저기….”

가만히 있어도 아무 일도 없자, 상관난화가 말을 다시 꺼내려 했다.

그때,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청수의 검집에서 검이 발사되듯 뻗어나간 것은 동시였다.

좁은 마차 안에서 어떻게 가능한것인지 설명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아름다운 발검이었다.

그것은 검가의 공통 검법인 검심검명(劍心劍鳴)의 기관식(機關式) 변형(變形) 발검세(拔劍勢).

"...!"

"...!"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려던 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의외로 놀란 것은 청수쪽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상대가 아미파의 승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녀의 발검술을, 상대가 들고 있던 검으로 막아 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힘을 빼긴 했지만….'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아미파는 아미파인 모양이었다.

청수가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상대방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익!”

아무리 내력을 끌어 올려도, 청수의 검을 밀어내거나 흘려 버릴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를 구한 것은, 다선랑 아가씨들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잠시만요! 이분은 저희 선생님이세요!”

“선생님!”

그 소리에 청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을 회수했다.

“…선생님?”

발검할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도 쾌속 정확한 납검이었다.

“얘들아! 괜찮니? 다친 사람은 없어?”

걱정에 찬 눈으로 아이들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은 청수보다도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젊은 비구니였다.

“네! 선생님! 저희는 모두 무사해요!”

“선생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상관난화가 청수에게 말했다.

“저분은 저희 학관의 호신술 선생님이세요.”

“아…, 그런가요.”

스승도 아니고 선생님은 뭔지.

학관 제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청수는 적당히 대꾸하면서, 눈으로는 상대를 살폈다.

'다른 젊은 아미파 무승들과는 다르게 칼밥 좀 먹었군. 피 냄새가나.'

꽤 미인상이었음에도, 하나도 꾸밈이 없는, 그래서 아미파치고는 특이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비구니 였다.

그녀의 드러난 피부에 드문드문 잔 흉터들이 눈에 띄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나는 너희가 걱정돼서….”

잠시 다선랑 아가씨들과 부둥켜 안고 있던 그녀가 청수를 바라보았다.

“이분은…?”

“아, 저는 검가의….”

청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거기!”

날카로운 목소리에 다선랑 아가씨들이 움츠러들었다.

호신술 선생이라는 비구니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다선랑 아가씨들에게서 떨어졌다.

사나운 표정으로 다가온 것은 검을 든 사감(舍監) 비구니였다.

“아직 교전이 끝나지 않았다는것을 모르는 것이냐?! 다들 도대체 정신을 빼놓고 뭘 하는 것이야?!”

그 대답은 마차의 천장에서 들려 왔다.

“뭐,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당신은…?”

어느새 마차 위로 올라가 주변을 확인하고 있던 청수였다.

그녀는 멀리 갈대밭 방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 * *

중진이 염 장로에 의해서 완전히 분쇄되었다.

그 위용에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그를 피해 갈라지는 청야의 단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노군사에 의해 미리 배치된, 전쟁 자문단의 무사들이었다.

좌우로 펼쳐져 날개를 만든 그들은 흩어지는 단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도살(屠殺)이었다.

“으아아아!”

가끔 기적적으로 공격을 성공시키는 단원도 있었지만, 전쟁 자문단의 갑주에 상흔을 더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단원 중에 남아 있던 무림인들도 채 몇 합을 버티지 못하고, 갈대밭에 쓰러졌다.

남은 수십 명의 단원은 원형진을 갖추고 서로 등을 맡긴 채,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진형을 유지해!”

“버텨! 이 새끼들아! 버티라고!”

그들은 눈에 독기를 품고 각자 전방을 향해 무기를 휘저어 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염 장로의 무사들은 침착한 표정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전투 속에서 머리에 열이 오른 이들이 있을 법도 하련만, 북방 땅에서 백전연마된 그들은 결코 쓸데없이 홍분하는 법이 없었다.

아니면, 이 전투 정도의 수준으로는 그들이 홍을 돋우지 못하는 것일지도.

“X발, 덤비라고! 이 개X끼들아!”

“다 담가 버릴 테니까, 들어와봐!”

무사들은 대답도 없었다.

그저 차가운 비웃음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무사들은 약이라도 올리듯이, 상대가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무기를 튕겨 내거나, 허점이 보이면 그 사이로 일격을 가하기도 했다.

점차 악을 쓰는 단원들의 입에 단내가 풍기고, 입술은 말라 가며, 몸에는 힘이 빠져 갔다.

그들의 독기는 체력과 함께 빠르게 증발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상태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피던 노군사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지금!”

양익(兩翼)을 이루던 무사들과 단원들이 중돌한 순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염 장로가 돌아섰다.

“끝났군.”

그의 말처럼.

청야단원들의 후방에서 들이닥친 검가의 철갑기마 스무 기가 그대로 그들을 짓밟았다.

끔찍한 파육음과 함께 허공에 팔 다리들이 흩날리고, 머리통들이 저 멀리 나뒹굴었다.

철갑기마들이 양익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 * *

놀랍게도 청야의 단장은 아직도 멀쩡히 잘 살아 있었다.

“후우... 후우….”

검악파산이 개입하든 말든, 낙양검가의 정규 병력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던 그였다.

'부단장 녀석이 시간을 좀 끌어 주었으려나….'

자신의 단원들을 돌격시킨 직후, 미리 조사해 두었던 탈출 경로를 통해 교전 지역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후읍…. 후읍….”

이런 상황에 경공으로 달리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가 경공으로 뛰었다면, 지금쯤 비단로유격대의 연노에 벌집이 되었거나, 결국에 기마에게 따라잡혔을 터.

그 대신.

암살단 청야에서 가장 숙련된 암살자인 그는 무성하고 넓은 갈대밭을 이용해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기어가고 있었다.

'아까워할 필요 없다. 나만 살아있다면 얼마든지 단체 따위야 재건할 수 있지.'

뱀의 움직임을 모방해서 만들어졌다는 사행공(蛇行功)은 보기에는 우스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사행공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몇 번이나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신공(神功)이었다.

'좋아. 이대로 조금만 더 멀어지기만 한다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그의 바로 옆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이런 곳에서 기다리다보니, 뱀 한 마리가 '또' 지나가네.”

“...?!”

그가 사방으로 퍼뜨리고 있던 기감(氣感)은 여전히 주변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 으갸악?!”

그는 맹세코 이제까지, 평생 암살자로 키워져 암살자로 살아오며 이렇게 품위 없는 비명을 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얇고 긴 손가락이 등줄기를 파고 들어와 척추를 부여잡았으니.

“으읍?! 읍?!”

신경이 통째로 쥐어짜이는 고통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비명을 지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신체가 통제에 따르질 않았다.

'이대로는 생포 당한다…!’

겨우 그는 턱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것도 암살자로서 오랜 시간 단련해 온 신체 제어의 비법 덕분이었다.

“어머, 어머. 안 돼요, 안 돼.”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히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인의 반대쪽 손아귀가 그의 얼굴을 덮쳐왔다.

양쪽 뺨을 두부처럼 가르고 들어온 여인의 손가락들이 그가 턱을 움직이는 것을 막았다.

잇새에 끼워 놓은 자결용 독단은 그렇게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여인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인이 뺨 사이에 박힌 손가락을 오묘하게 움직이자, 그의 턱관절이 그대로 빠졌다.

“후후. 이걸로 뱀 두 마리를 모두 잡았네요〜.”

옆에는 시간을 끌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부단주가, 이미 같은 꼴이 되어 누워있었다.

* * *

청수의 소개를 마친 연소현이 세아의 옆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여기. 새로운 얼굴이 한 명 더있지.”

기녀복을 입은 가인이 일어나 좌중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그녀가 누군지 알 길이 없었지만, 다들 일단 박수는 쳐서 그녀를 환영해 주었다.

“감사해요〜, 감사해요〜.”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세아가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대공자님의 명에 따라 이번 계획에 고용된 인물로….”

기생복의 가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 서림청(西林靑)이라고 한답니다〜.”

다시 한번 좌중이 반사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이 화려한 미모의 기녀는 부드러운 미소로 좌중을 움직이는 묘한 힘이 있었다.

물론 그런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도 이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내가 고용한 낙양 최고의 암흑가 전문가다.”

연소현의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후후후.”

그녀가 부끄러운 듯이 소매를 들어 입가를 가렸다.

연소현이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낙양 전체에 대한 폭넓은 지리 지식을 바탕으로, 다선랑을 위해 낙양 곳곳을 안내할 안내인이기도 하지.”

“잘 부탁드려요〜!”

* * *

곳곳에서 전투의 뒷정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들의 정체는 아마도 하남성에서 이름을 날리던 암살단인 청야로 추측됩니다.”

염 장로에게 비단로유격대의 정륭이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일단 적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포위망 너머로 수색을….”

“여기예요〜!”

궁장 차림의 한 여인이 말을 타고, 갈대밭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손을 나긋나긋하게 흔드는 그녀의 등 뒤에는 청야의 단장과 부단장이 포개어 실려 있었다.

“그들은…?!”

“뱀들이랍니다〜.”

깜짝 놀란 정륭이 수하들을 시켜, 단장과 부단장을 확보했다.

“어머, 어머. 척추를 조금씩 뽑아 놓은 상태니, 조심해서 내리도록 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정륭의 수하들이 잠시 멈칫했다가,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소저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려던 정륭의 시선이, 그녀의 말에 매달려 있는 곡궁(曲弓)과 신호 화살이 섞인 화살통을 발견했다.

“아! 소저가 그 신호 화살을 쏘아 암살단의 위치를 알려 주신 분이로군요!”

“암살단요…?”

그녀가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미소 지었다.

“후후. 고작 저것들을 암살단이라고 부른다면, 어디선가 진짜 암살자가 슬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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