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22화 (122/350)

제22편 개전(開戰)

“아미파도 사실 사천도 아니고 낙양까지 와서 큰형님이나 저와 각을 세우는 일 따위는, 당연히 피하고 싶은 일이겠지요.”

사공자 연비가 말했다.

“하지만….”

좌중의 시선이 연비에게 모였다.

“아미파가 다선랑의 지분을 어떻게든 매입하려 해왔다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신뢰할 만한 정보의 출처는 그의 외가(外家)이리라.

“이번 다선랑의 낙양 방문에 아미파가 보기 안 좋을 정도로 무리하게 함께한 것은, 십중팔구 그 때문일 것입니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다선랑이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나 버리는 불상사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은 것이겠지.”

“맞습니다….”

좌중은 씁쓸한 감정을 공유했다.

염백하는 코웃음을 칠 정도였다.

애초에 다선랑이라는 상회(商會)의 성공과 아미파라는 문파(門派)간에는 별 상관관계가 없었다.

단지 다선랑의 대표들이 아미파가 운영하는 학관에 다니는 아가씨들이라는 점밖에.

그런데 아미파는 그런 다선랑을 원래 자기 주머니 속에 있던 것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미파가 다선랑에 욕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결국 우리와 더 많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염백하가 인상을 썼다.

“그럼 아직 아미파가 얼마나 크게 우리와 충돌할지는, 그들이 우리에게 먼저 들이받을 때까지 모른다는 건가요?”

후수(後手)로 상황에 대응하는 것은, 대공자의 취지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대답은, 가만히 회의를 지켜보고 있던 사공자측의 유 장로에게서 나왔다.

“그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이 일에 임하고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게다.”

사공자가 말을 받았다.

"아미파가 투자단에 동행시킨 가장 높은 서열이 누군지를 알면, 모든 것이 일목요연해지겠지요.”

* * *

“이제 그쯤 했으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도 신경을 써 줄 때가 되지 않았나?”

권위적이면서 고집스럽고, 위압적이면서 어딘가 음험하고 스산한 구석이 있는 목소리.

만약 독사(毒蛇)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런 목소리를 내리라.

“대접을 해 달라고 강짜를 부리다니, 어디 가서 좋은 대접을 받기는 힘든 손님인 것 같습니다.”

염 장로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가발을 붙여 풍성하게 부풀리고, 온갖 패물로 장식했다.

주안공과 본인의 높은 경지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글거리는 주름이 가득했다.

“사실 빈니 정도 되는 위치의 사람이라면, 주인이 속으로 반기든 반기지 않든 좋은 대접을 받기 마련이라네.”

노인이 말을 할 때마다 구불거리며 꿈틀거리는 주름들은, 마치 거친 비늘을 지닌 냉혈동물(冷血動物)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았다.

“주인도 주인 나름이겠지요.”

크게 차이 나는 배분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를 지지 않고 받아치는 염 장로의 모습에 비구니의 눈이 칼날처럼 가늘어졌다.

“좌우(左右)도 구별하지 못하던 그 애송이가 이렇게 커서, 이 늙은이 앞에 이토록 당당한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다니….”

아미파의 총무사태.

아미파의 모든 자금을 관리하는, 핵심 인사중의 핵심 인사.

아미파 장문사태의 최측근이며, 무림맹 몰락 이후에 현재 아미파의 성공 신화를 이루어 낸 장본인.

자성신니(紫聲神尼)라는 별호가 있었지만, 무림사(武林史)에 익숙한 이들이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말은 따로 있었다.

아미파의 백발성성(白髮星星),

고독노귀(蠱毒老鬼).

그녀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감회가 아주 새롭구먼그래.”

염 장로는 무뚝뚝한 시선으로 총무사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아미파는 결코 다선랑을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내려놓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벽을 넘어 경지에 이른 두 고수 사이에 긴장감이 싸늘하게 흐르자, 주변의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말들이 가끔 푸르르 하고 투레질을 할 뿐, 누구 하나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를 내는 자도 없었다.

그때.

“아이고!”

모두의 시선이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그곳에는 머리카락을 말에게 물린 연하응의 모습이 있었다.

그가 타고 왔던 말이 태연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씹는 중이었다.

“으, 으악! 미친 말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사람 살려!”

긴장감은 그렇게 한순간 스러졌다.

무사들의 도움으로 말에게 벗어난 연하응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조소(嘲笑)를 보낸 총무사태가 말했다.

“아무튼.”

좌중이 연하응 덕분에 떠들썩했지만, 염 장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다선랑은 어디까지나 우리 학관의 소속이며, 우리의 보호 아래 있네. 그러니 그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면, 우리를 거치도록 해 주게.”

염 장로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답했다.

“저는 본가 외원의 요청으로 이 자리에 섰을 뿐. 그런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다른 인물을 찾으시지요.”

그 모습은 마치 만 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는 거대한 바위와도 같았다.

“그렇다면야….”

총무사태의 시선이 연하응으로 향했다.

“자네. 외원의 고문이라 했나?”

투덜거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확인하던 연하응이 그녀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아, 예! 연하응이라 합니다!”

그는 붙임성 좋게 성큼성큼 총무사태에게로 다가갔다.

“이야. 이거, 그 깊은 불심(佛心)이 마치 살아 있는 부처와 마찬가지라 중원국 전체에 이름이 알려진 자성신니를 뵙게 되어서 영광이고, 또 영광입니다. 이렇게 신니를 뵙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는 것일까요.”

"그래, 그런데….”

하지만 연하응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갑자기 제가 개봉에 있었을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요. 때는 바야흐로 지금으로부터….”

그것은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백전연마(百戦錬磨)의 총무사태를 당황하게 할 정도로 쏟아지는 말의 향연이었다.

그사이 눈치를 보며 염 장로를 향해 다가온 서안 병력의 지휘관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여쭙고 싶었습니다만.”

“무엇인가?”

염 장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지휘관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거창한 병력을 준비해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 어머니께서도 준비를 단단히 하라 이르셨습니다만….”

그렇기에 지금도 하늘에 자신의 매를 날려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그였다.

“그것은….”

염 장로가 대답하려 할 때, 먼 남쪽에서 무언가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하늘을 찢듯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위로 또 위로 치솟는 그것은, 전장을 겪었던 이들에게 너무 익숙한 물건이었다.

“신호 화살!”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하늘을 날고 있던 지휘관의 매가 길게 울어 경고했다.

“적은 서쪽! 갈대밭 방향!”

낙양검가가 통제하는 도로에서 적이라니.

상식 밖의 일이었지만, 지휘관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전 병력 방어 위치로!”

그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러 펴졌다.

* * *

“신호 화살이라고?”

하남성에서 악명을 떨치는 청부 암살단, 청야(淸野)의 단장(團長)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암살단 전원과 함께 갈대숲에 위장막을 덮고 엎드려 대기한지, 어언 다섯 시진.

이윽고 목표가 나타났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호위 병력이 증강된 것을 보고 고민했었다.

하지만 고민도 소용없이, 곧이어 낙양검가의 병력까지 등장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완전히 의뢰를 포기 하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신호 화살이 난데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까발렸다.

그것도 심지어 자신들의 배후에서 쏘아 올려졌기에, 위치까지 특정되어 버린 상황.

“단장! 지시를…!”

위장막을 쓰고 있던, 부단장의 외침에 단장이 이를 악물었다.

“놈들에게는 기마(騎馬)가 있어. 퇴각한다면 일방적으로 몰이사냥을 당할 뿐이다.”

“그렇다면…?!”

단장은 거칠게 위장막을 걷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원 공격을 준비해라!”

단장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미소 지었다.

“우리는 한 놈이라도 더 지옥으로 데려간다!”

갈대숲 곳곳에서 인영(人影)들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삼백이 넘었다.

그들은 일제히 방수천을 묶고 있던 줄을 끊었다.

방수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잘 손질된 활이었다.

* * *

급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이 시작된 투자단 진영(陣營)의 가운데에서 거대한 전투마(戰鬪馬)에 타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다름 아닌 염 장로 측의 노(老)군사였다.

주변의 움직임이 정지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노인의 사고는 가속중이었다.

'갈대숲. 적은 해를 등지고 있다. 풍향을 고려한 배치. 상황이 시작되었음에도 함성이 없다. 적은 돌격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노군사의 입에서, 도저히 허리 굽은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적의 사격(射擊)이다!”

그 목소리를 들은 염 장로가 외쳤다.

“전투수송당! 즉시 사격방어(射擊防禦) 진형으로!”

이미 전투준비를 모두 마쳐 두었던 전투수송당의 장갑수송마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마대는 적의 사거리 밖으로 이탈!”

스무 기(騎)의 중장기마무사들이 즉각적으로 투자단의 진영으로부터 달려 나갔다.

“전 인원 적의 사격에 주의하라!”

그의 외침이 채 울려 퍼지기도 전에 태양을 등지고 시커먼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염 장로의 등에서 뽑혀 나온 흉악한 거검(巨劍)은 그 자체로 금속 방패나 다름없었다.

'일제사격인가? 역시 평범한 도적은 아니로군.’

연속되는 금속음과 함께 거검의 넓은 날에 불똥이 사정없이 튀었다.

그는 최소한의 손목 움직임만으로 자신의 거대한 몸을 지켜 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미파의 전투 인원들은 총무사태를 중심으로 퍼져 어지러이 검을 휘둘렀다.

비구니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치 검에 화살들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말려들어 부러지고 있었다.

투자단이 고용한 호위 병력은 고용주들을 마차 밑으로 밀어 넣고 방패 따위에 숨은 상태였다.

그들은 나름 정예들로 보였고, 적어도 자신들의 임무를 방기하지 않을 정도는 해 줄 것으로 판단되었다.

쏟아지는 화살들이 자아내는 소음을 뚫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 왔지만, 혼자 진영을 이탈할 정도로 멍청한 자는 없었다.

그때 염 장로와 노군사의 눈이 마주쳤다.

마차 뒤에 숨어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이는 노군사의 모습에 염 장로가 외쳤다.

“두 번째 일제사격이 온다!”

* * *

“이런, X발! X 같은 새끼들!”

청야의 단장이 자신이 들고 있던 활을 내팽개쳤다.

발각되긴 했지만, 기습의 우위와 위치의 우위를 잡은 상태.

미리 계산을 마쳐 둔 사격각.

조(組)마다 미리 할당 지정해 둔 목표까지.

나름 완벽한 효력사(效力射)의 조건이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투자단 진영 앞을 가로막은 낙양검가 전투수송단의 육중한 장갑수송마차는 그 존재만으로 이미 절반이상의 사격을 차단했다.

장갑수송마차를 끄는 말들을 향한 화살들은, 전투수송당의 마부들이 철갑방패를 들고 막아 낸 탓에, 단 한 필의 피해도 없었다.

기마 병력은 이미 진영에서 멀리 빠져 달린 뒤였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두 번째 사격은 별 의미도 없었다.

'역시나 낙양검가인가?

적의 너무나도 능숙한 대응에 등골이 순간 서늘할 정도였다.

바닥에 침을 뱉은 그가 소리쳤다.

“단원들은 전부 무기 들어라!”

암살단이 정면 돌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악몽이 따로 없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 * *

“염 장로! 이 투자단의 호위에 대한 책임과 권한은 우리 아미파에게 있네!”

이 상황에서도 주도권 싸움을 거는 총무사태의 모습에 염 장로가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시죠.”

“뭐라?!”

염 장로는 처음과 똑같은 무뚝뚝 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호위가 아니라 공격을 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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