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편 신경전(神經戰)
“마적 (馬賊)…?!”
검에 손을 가져가며, 사감 비구니가 한 말에 지휘관이 피식하고 웃었다.
사감 비구니가 자신을 노려보자, 지휘관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매를 쓰다듬는 척했다.
“오구구, 그랬어?”
처음부터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방금 보았던 그 범상찮은 갑주의 모습이 떠오른 사감 비구니는 그저 애꿎은 자신의 검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을 뿐이었다.
“저, 저게 무슨 일이오?!”
“도적 떼인가?!”
점차 느껴지기 시작한 진동과 소음에 혼비백산한 사업단의 인원들 이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난리를 쳤다.
"호위! 호위병!”
관군 덕에 느긋하게 임무를 날로 먹고 있던 무림인들과 호위 병력이 급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말에 타고 있거나, 마차 안에 있던 아미파의 비구니들 또한 침착하게 무장을 꺼내 들었다.
가진 바 무공에 자신이 있는 그들은 딱히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심상치 않은 먼지구름과 진동에 긴장 정도는 한 모양이었다.
“지휘관. 대체 뭣 하고 있는 게요? 당장 병력을 배치하시오!”
무장을 꺼내 들고 다가온 아미파의 비구니의 말에, 결국 지휘관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지휘관...?”
미친 자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을 보내는 주변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한참을 웃은 지휘관이었다.
“아이고, 나 죽겠네….”
“웃지만 말고, 설명을 하세요!”
사감 비구니가 결국 벌컥 소리치자, 눈물을 닦은 지휘관이 피풍의 아래서 미소지었다.
“아니, 다들 이곳이 대체 어딘데 마적이나 도적 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여기가 어디냐고요…?”
그 말에, 마차 안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던 투자단의 수장(首長) 되는 자가 어슬렁거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접근하는 먼지구름을 보며 하품 섞인 혼잣말을 했다.
“흐암. 이제 낙양에 다 도착한 모양이군.”
이 난리 통에도 느긋한 모습이 필시 평범한 늙은이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때 먼지구름을 뚫고 몇 기의 철갑기마(鐵甲騎馬)가 먼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가장 앞에 말을 달리는 기수(旗手)가 거칠게 휘날리는 커다란 깃발을 들고 있었다.
[낙양검가(洛陽劍家)]
그 깃발을 본 이들이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자, 지휘관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이 도로는 낙양검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도로입니다.”
무슨 촌뜨기를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이 근방에서는 도적 떼를 만나기보다는 우연히 낙양검가의 장로님을 만나는 것이 더 쉬울 거라는 말이죠.”
그의 말에 비구니들이 얼굴을 붉혔지만, 급격히 가까워지는 낙양검가의 병력을 앞에 두고 괜히 지휘관에게 시비를 걸 간담이 있는 이는 없었다.
딱히 아무에게서도 반응이 없자, 잠시 실망한 표정을 지은 지휘관이 피풍의 아래서 짧게 다듬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도로순찰단(道路巡察團)도 아니고, 철갑기마라…?”
아무래도 자신이 서안에서부터 호위해 온 이들이 생각보다는 낙양검가에 더 중요한 이들인 모양이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던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달려오는 장갑수송마차(裝甲輸送馬車)들의 모습이 보이자 그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엥? 검가의 전투수송당(戰鬪輸送堂)까지?”
그리고 그 장갑수송마차에 걸려 나부끼는 깃발을 보고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검악파산(劍岳破山)?!”
* * *
“염 장군님을 뵙습니다!”
지휘관은 한쪽 무릎을 꿇고 두손을 앞에 모아 극상의 예를 차렸다.
“염 장군님을 뵙습니다!”
그를 따르는 병력 또한,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예를 표했다.
그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것은, 투자단 쪽이었다.
도대체 자신들을 서안에서부터 호위하던 병력이 무슨 이유로 낙양검가의 장로에게 저리도 정중히 예를 표한단 말인가.
“여기서 자네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일반적인 남성보다 머리가 두세개는 더 큰 체격을 자랑하는 염 장로가 지휘관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지휘관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자네의 부대가 직접 투자단의 호위를 맡아 주었는가? 자당(慈堂)께서 너무 큰 호의를 베풀어 주셨군.”
“아이고, 호의는 무슨. 염 장군님께서 오실 줄 알았다면, 제가 어머니의 명령이 없었어도 맨발로 달려왔을 텐데요.”
지휘관이 못 이긴 척 일어나자(사실 염 장로의 힘에 들리다시피 일어났다), 나머지 병력도 자리에서 일어나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그 재회(再會)를 바라봤다.
“그래, 자당께서는 여전하신가?”
지휘관이 손을 내저었다.
“여전히 한 성격 하시지요. 어떻게 날이 갈수록 그렇게 정정해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서안을 통치하시는 지사(智士)께서 정정하시다니, 이웃으로서 마음이 놓이는군.”
“아이고, 말을 마십시오. 저는 그저 죽을 노릇입니다.”
서안지사를 어머니라 부르는 인물.
그때야 지휘관의 신분을 눈치챈 이들이 작게 입을 벌렸다.
그중에서도 그에게 행렬의 지휘권을 뺏기다시피 하고서, 방금까지도 신경전을 벌이던 아미파의 인원들의 표정은 특히나 불편해 보였다.
“내 지금부터 손님들을 맞이해야 하나, 자네와는 나중에 꼭 회포를 풀고 싶군.”
“하하, 그 말씀 잊지 마십시오. 낙양까지라도 따라갈 겁니다.”
그렇게 지휘관에게 양해를 구한 염 장로가 투자단의 앞에 서서 정중히 사과했다.
“우연히 전우(戰友)를 만나게 되어, 귀빈들을 기다리시게 하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
투자단의 대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아미파 인원들 방향에서 먼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오, 염 장로.”
검을 찬 비구니들 사이에서 보호받던, 늙은 비구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華山)에서 그대를 보았던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군.”
염 장로는 그 늙은 비구니의 모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중히 답했다.
“…아미파의 총무사태(總務師太)께서 이렇게 기별도 없이 본가를 방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장 화려한 승복 위에 금빛 가사(袈裟)를 걸친 늙은 비구니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결코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미소였다.
“이 늙은 빈니(貧尼)의 예의 없음을 탓하는가?”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오느냐는 염 장로의 말에 직설적으로 답한 총무사태였다.
“글쎄요….”
하지만 상대는 더 이상, 과거 화산의 검군(劍君) 앞에서 긴장을 감추지 못하던 한낱 대주(隊主)가 아니었다.
“일단 총무사태께서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시니, 초대받은 손님을 제가 먼저 응대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투자단의 수장에게 다가가는 염 장로였다.
“감히…!”
비구니들이 발끈했지만, 총무사태는 손을 들어 그녀들을 막았다.
'상대는 낙양검가의 장로다. 너희들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하거라.’
총무사태의 전음에 비구니들은 속으로 화를 삭였다.
그런 비구니들을, 염 장로가 이끌고 온 낙양검가의 무사들과 병력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투자단의 대표 되시는 분이십니까?”
염 장로의 정중한 질문에, 오랜 기다림에 대한 불만 하나 없이, 그저 싱글거리는 투자단의 수장이었다.
“허허, 염 장로 같은 분께서 저처럼 할 일 없는 늙은이에게 존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초청하여 모신 손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런 염 장로의 대응이 부담스러웠는지, 손을 내젓던 투자단의 대표는 자신의 넓은 이마를 쳤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이 투자단을 대표하고 있는 당고규(唐菰葵)라 합니다. 그 이름 높은 북부 전쟁의 영웅께서 이렇게 친히 마중을 나와 주시니, 감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염 장로는 미리 사공자측에서 들어 두었던 인명록을 떠올렸다.
“아! 사천당문에 덕이 높은 현인(賢人)이 한 분 계시다고 들었는데, 바로 그분이셨군요.”
“아이고, 저야 방계 중의 방계이고, 평소엔 그저 뒷방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며 시간을 죽이는 늙은이에 불과합니다.”
낙양검가로 치면, 외원의 명예장로 정도 되는 당고규는 겸손을 떨며,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저야 그저 당문 소속이고, 나이가 많아, 대표라는 이름만 달고 있을 뿐. 여기 이분들이 진정한 낙양 검가의 손님에 어울리는 분들이지요.”
각기 다른 사천의 명문 가문을 대표하여 찾아온 인물들이 염 장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을 향해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올린 염 장로가 말했다.
“부디 자리가 자리인지라, 한 분씩 인사를 올리지 못하는 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염 장로의 말에 당고규가 나머지 투자단을 보고 외쳤다.
“염 장로께서 이리도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시니, 오늘 낙양검가에서 술 한번 거하게 얻어 마실 수 있겠소!”
와하하,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투자단의 인원들이 즐거워하며 박수를 쳤다.
그들은 투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먼 거리를 찾아온 투자단이 아니라, 마치 낙양까지 한바탕 놀러 온 유람단(遊覽團) 같은 모습이 었다.
“아무래도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나 보네.”
“우리도 일단 내려야겠지?”
밖의 분위기가 왁자지껄하자, 막아 두었던 창을 열고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확인한 다선랑 아가씨들이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아!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귀한 분들을 소개해 드려야지!”
그러자 당고규가 늙은이답지 않은 잽싼 몸놀림으로 염 장로를 그들에게 이끌었다.
“자 자, 이 참한 영애(令愛)들이 바로 요즘 중원국 전체를 들썩이게 한다는 그 다선랑입니다.”
염 장로가 다섯 명의 아가씨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다선랑의 다섯 대표분이 낙양에 직접 오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낙양검가의 장로, 염곽추라 합니다.”
상관난화가 앞으로 나서 대표로 염 장로의 인사에 답했다.
“이리도 저희를 반겨 주시니, 감히 소녀들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선랑의 첫 번째 대표 자리를 맡고 있는 상관난화라 합니다.”
사천제일미라 불리는 그녀가 우아하게 예를 갖추니,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상관 대표님이시군요.”
염 장로가 그렇게 말하자, 상관난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 보통 상대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아! 사천제일미!’ 혹은 '사천지사님의 영애이시군요!’ 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염 장로가 조금 난처한 기색을 비쳤다.
“원래 다선랑의 대표님들을 모시기로 한 자는 따로 있사온데 그자가 아직….”
그때 염 장로의 뒤에서 말 한 마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여, 여러분! 죄송합니다!”
말에서 헉헉거리며 뛰어내린 이는 다름 아닌 키가 크고 훤칠한 미남이었다.
어딘가 경박해 보이는 구석이 조금 홈이라면 흠이랄까.
“…그러게 자신 없으면, 함께 마차에 타라고 하지 않았던가?”
염 장로의 나직한 목소리에 찔끔한 표정을 지은 그였지만, 이내 은근슬쩍 다선랑쪽으로 다가가 아무일 없었던 척 자기소개를 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대공자님의 요청으로 낙양검가의 외원에서 여러분의 응대를 위해 파견된 연하응이라고 합니다!”
그때, 그런 그들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쯤 했으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도 신경을 써 줄 때가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