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편 투자단(投資團)
“최종적인 확인을 위해, 마지막으로 짚어 보자면….”
사공자, 연비가 발언했다.
“저와 제 수하들은 사천에서부터 오는 투자단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이번 계획에서 승패를 좌우할 핵심은 그들 투자단에 속하지 않은 '다선랑'입니다.”
연비가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바로, 큰형님이 담당하셔야 할 이들이지요.”
연소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선랑은 상회명(商會名)이기도 하지만, 그들 개개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연비가 보고서를 넘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의사 판단은 다선랑 다섯 명 전원의 합의로 이루어진다고 알려졌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상관난화입니다.”
* * *
마차의 창을 통해 불어오는 봄바람에 상관난화의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그녀가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들어 홀러내린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기자, 하얗고 가는 목덜미가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부럽다….”
다선랑 중 일인이 중얼거렸다.
“역시 사천제일미.”
다른 다선랑이 말을 받았다.
“나도 난화처럼 내공에 재능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호호호, 네가 학관에서 주안술을 배웠어도 호박에 줄 긋기 아니겠니?”
“그건 당신 이야기고요.”
두 사람은 곧장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아…. 저는 그냥 난화 언니처럼 집안에서 결혼에 대한 압박을 넣지만 않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들 중 막내로 보이는 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신장이 큰 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너랑 다르게, 나는 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으니까.”
“아…, 언니. 죄송해요.”
신장이 웬만한 남성보다 큰 여인이 괜히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낙양같이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에는 반드시 운명적인 사랑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막내가 양손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분명히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래. 고맙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감추며, 상관난화를 바라보았다.
'내 얼굴이 저렇게 예쁘기라도 했으면 좋았겠지만….'
마차의 창가에 앉은 상관난화의 곁에는 그들을 호위중인 관군의 지휘관이 끊임없는 구애를 보내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서 마차 옆에 붙어서 벌써 몇 시진째 떠들어 대고 있는 그의 근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도 저렇게 끈덕지게 달라붙는 이들이 어디서든 나오는 건 역시 엄청 피곤하겠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처럼 상관난화를 도와주기 위해서, 뭔가 끼어들 여지를 살피던 그녀의 눈에 창밖의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아, 저기!”
모두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와아!”
누구랄 것 없이 창에 다닥다닥 붙어 밖을 내다봤다.
그녀들이 일시에 창가에 달라붙자, 무게중심이 흐트러진 마차가 순간적으로 기우뚱거릴 정도였다.
“호수다!”
멀리, 거대한 호수가 그 모습을 슬며시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나 그 호수의 규모가 컸는지, 마차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호수에는 사천 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서양식 범선(帆船)들이 가득했다.
그 신기한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상관난화의 도톰한 입술이 달싹였다.
“저 호수가 바로….”
다선랑 아가씨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서, 말을 조금 뒤로 물러 몰고 있던 지휘관이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네, 저 호수가 바로 중원국 최대 규모의 인공 호수인 황호(黃湖)입니다!”
그는 다선랑 아가씨들의 시선이 모이자,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이 아는 지식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황호는 호수이면서 동시에 동서 대운하(東西大運河)의 시작 지점이기도 하죠. 외국(外國)의 무역선들이 남북대운하(南北大運河)를 거쳐 동서대운하를 통해 도달하는 도착 지점이기도 합니다.”
"아, 그렇군요….”
“아, 네….”
이미 다선랑 아가씨들이 익히 알고 있는 지식이었기에 반응은 미적 지근했고, 그는 당황하며 자신의 머릿속을 뒤졌다.
그때 상관난화가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저 정도 규모의 호수를 어째서 인공적으로 만들었는지는 아시나요?”
인력(人力)으로 과연 가능할까싶은 공사의 결과는 전대 왕조의 종말이었다.
“아! 아주 훌륭한 질문입니다! 역시 상관난화 아가씨다운 날카로운 질문이시네요!”
그 질문에 그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저도 이건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가 말을 능숙하게 움직여 차창 가까이 붙어 왔다.
그가 풍경을 가리긴 했지만,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다선랑 아가씨들은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이 거대 도시 낙양의 근처에는 '운(運)'이 솟아오르는 지점이 있다고 합니다.”
“…운이 솟아올라요?”
다선랑 아가씨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얼굴들에는 명백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나이대가 나이대인 만큼 이름 높은 다선랑의 아가씨들도 점술이나 흥미 위주의 미신들을 좋아했다.
“물론 미신입니다. 당연히 미신이죠. 그런 말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가 얼른 말을 이어 나갔다.
“전대 왕조의 어떤 왕이 뛰어난 도사에게 예언을 들었답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운을 고이게만 할 수 있다면, 그 운을 독점한 왕조는 천년 동안 지속되고, 오직 번영만을 누릴 것이라는 예언이었죠.”
“그래서 운을 고이게 하려고, 저 호수를 팠다고요?”
“그런데 저 호수를 만들고도 전대 왕조는 망했잖아요?”
“그럼 예언이 틀린 것 아닌가요?”
“후후.”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 황호가 완성된 것은 전대 왕조가 몰락한 이후입니다. 거의 그 직후였죠.”
“그런…?!"
“오오!”
아가씨들은 흥미롭고 신비로운 이야기에 서로를 돌아보며 재잘거렸다.
지휘관은 아가씨들의 반응에 만족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속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어머니께 감사를 드리고 있던 때였다.
“그렇다면….”
그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상관난화가 그에게 물었다.
“왕조는 망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저 호수를 완성한 것이죠?”
지휘관이 미소 지었다.
“바로 그 유명한 '낙양검가'입니다.”
* * *
“큰형님….”
사공자가 조심스럽게 연소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혹시, 여전히 아직도 다선랑을 큰형님께서 담당하실 생각이신가요? 지금이라도 제게 맡기시는 편이….”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사공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뽀송한 뺨을 긁었다.
“아시다시피 다선랑은 엄밀히 학도(學徒) 신분입니다. 아미파(峨嵋派)에서 성도에 운영 중인 아미학관(峨嵋學館)의 소속이죠.”
아미파는 다선랑이 아미학관 소속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들의 보호를 위해 동행한다는 취지를 들어 투자단에 합류했다.
“아미파는….”
그는 큰형님의 눈치를 살폈다.
“사천을 지배하는 당가(唐家)와도 공공연하게 마찰을 일으키는 작자들입니다. 사천당문(四川唐門)이 아니라, 직계 가문인 당가 말입니다.”
연소현이 웃으며 귀여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들이 나를 무검자라 하여 무시할까 그것이 걱정이더냐? 다른 곳도 아니고 이 낙양 땅에서?”
그러자 연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들이 큰형님의 분노를 사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들의 목이 중앙 광장에 매달리면, 평화로운 사천 땅에서 온 투자단의 인원들이 기겁해서 도망갈걸요?”
연소현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 * *
“누가 이리도 방정맞게 구는 것이냐?!”
꺅꺅거리며 흥분한 다선랑 아가씨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익숙하게 말을 몰아 마차를 따라온 이는 화려한 승복(僧服)을 입은 비구니였다.
길게 기른 머리를 틀어 올려 불교 문양이 새겨진 옥(玉)비녀로 고정한 깐깐한 인상의 젊은 비구니였다.
"너희는 우리 아미학관의 학도임을 어디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차의 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선랑의 아가씨들을 질책했다.
“너희가 그 장난처럼 벌이는 장사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 하여 자신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알았느냐?!”
다선랑은 장난도 아니었고, 장사라는 말로 폄훼될 만큼 허술한 사업도 아니었다.
“…그런 장난 같은 장사에 편승해 돈 좀 벌어 보려고 합류한건 누군지.”
비구니의 폭언에 한 다선랑 아가씨가 입을 비죽였다.
작은 혼잣말이었지만, 내공이 충만한 아미파의 비구니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
다들 입을 다물고 딴 곳을 바라 보고 앉아 있자, 젊은 비구니가 다 시 한번 노성을 터트리려던 참이었 다.
“너희는…!”
“저희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사감(舍監)님.”
입을 연 것은 상관난화였다.
그녀의 봉목(鳳目)이라 부를 만한 눈동자가 사감이라 불린 젊은 비구니를 향했다.
금(金)실로 수놓아진 최고급 비단 승복.
불교적 향기는 나지만 결과적으로 패물(佩物)이라 할 수밖에 없는 장신구들.
지체 높은 집안의 아가씨들보다도 능수능란한 화장.
“…상관난화. 지금 본 사감에게 뭐라고 했느냐?”
상관난화는 심상찮은 기세의 비구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했다.
“저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감님.”
“상관난화…!”
아마도 상관난화가 사천 땅을 대대로 다스리는 사천지사(四川知事)의 외동딸이 아니었다면, 사감은 당장에 그녀의 뺨을 후려쳤으리라.
“…너희 모두. 돌아가면 이번엔 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잠시 눈가에 경련을 일으키며, 상관난화를 노려보던 사감이 먼저 눈을 돌렸다.
“지휘관님.”
뻘쭘하게 옆에서 말을 몰던 관군의 지휘관이 답했다.
“예, 스님.”
“한창때의 남녀가 서로에게 홍미를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이들은 사천 땅에서도 지체 높은 집안의 아가씨들이니, 충분히 주의를 해 주시지요.”
지휘관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예. 알겠습니다요, 스님.”
그 불성실하기 짝이 없는 지휘관의 태도에, 젊은 비구니의 안면이 꿈틀거렸다.
'감히 허름한 피풍의나 걸치고 다니는 관의 개 따위가…!’
사천이었다면, 감히 관병 조금 거느리는 지휘관 따위가 아미파의 일원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천이 아니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애초에 대관절 무슨 이유로 서안(西安)의 관군이 여행자들의 호위를 하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그저 높은 곳에서 내려온 명령이라니 따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명령이 누구의 명령이었냐고 묻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투자단의 주변으로는 피풍의로 몸을 감싼 관병들이 함께 움직이는 중이었다.
“잘 모릅니다. 그저 저는 군인답게 내려온 명령에 충실한 것이지요.”
원래 이 투자단 행렬의 행로와 호위를 담당하던 것은 아미파였다.
그런데 갑자기 서안을 지날 때부터 이 병력이 합류하더니, 이젠 경로마저도 자신들이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때 매 한 마리가 하늘에서 울더니, 한 바퀴 돌아 지휘관의 팔에 내려앉았다.
한낱 짐승 때문에 비구니 사감이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래. 착하다.”
낡아 빠진 피풍의와는 다르게, 드러난 지휘관의 팔을 감싸고 있는 갑주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매에게 말을 걸며, 턱을 긁어 주던 지휘관이 턱짓으로 저편을 가리켰다.
"스님. 그리도 궁금하시면, 저들에게 물어보시지요.”
“저들…?”
비구니의 시선이 지휘관을 따라 향한 곳에서는 자욱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