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편 오합지졸(烏合之卒)
대공자 연소현이 회의실에 등장하기 전, 사공자 측의 유 장로는 담뱃대를 물고 가만히 좌중을 둘러 보는 중이었다.
“자, 준비가 끝났어요.”
먼저, 손뼉을 치며 혼자 좋아하고 있는 염백하.
그녀는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바리바리 싸서 들고 왔던 물건들을 자신의 자리에 장식해 놓고 좋아하는 중이었다.
갖은 모양의 봉제 인형들, 자신이 꺾어 온 것으로 추측되는 봄의 들꽃, 빗, 거울, 소녀풍이 물씬 느껴지는 문방사우 등등.
“으, 으억?! 누, 누구 이것 좀 떼 줄 분 없으신가요? 저기요?”
가발을 고정하던 작은 집게가 머리카락에 엉겨 혼자서 몸을 뒤틀며 씨름 중인 연하응.
그의 딱 달라붙는 구라파 귀족 바지는 차마 눈 뜨고는 못 봐 줄 정도였다.
“…어머, 손톱이 갈라졌네?”
그리고 오늘 처음 봤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는 기생복의 가인(佳人).
그녀는 곧장 품을 뒤적거리더니 도구를 꺼내 손톱을 세심하게 손질하고 있었다.
"...."
그나마 현월각주, 세아 정도만이 팔짱을 낀 채, 무언가 생각을 정리중인 것으로 보였지만….
“드르렁....”
자세히 보면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이 조합의 인물들을 처음 보았을 때(이젠 기생까지 추가되었다!), 유 장로의 머리에는 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합지졸.
하지만 지금 시점에, 이 모든 사람 중에서, 유 장로에게 있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바로….
“우와?! 그, 그건 큰형님을 본뜬 봉제 인형! 염 소저! 제발 그 인형을 저에게 팔아 주시오!”
염백하와 대화하는 사공자, 연비.
“후후후. 저희 '대공자님을 사모하는 소녀들의 모임'에 가입하시면, 이 인형을 증정해드리는 중이랍니다.”
“다, 당장 신청서를…!”
연하응과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연비.
“자, 잠깐! 연 고문! 가만히 있어야, 이걸 풀어 주든 말든 할 거 아니오?!”
“으아! 아픕니다! 아파요!”
“앗?! 머리카락까지 자르고 말았소….”
“내 머리에 땜빵이?!”
그리고 졸고 있는 현월각주 세아를 놀리는 연비.
“하하하, 현월각주는 멋있는 표정으로 침을 흘리면서 조는구나.”
“…드르렁.”
...저 인물이 바로 유 장로가 전력으로 밀고 있는 당가의 피를 이은 사공자 연비였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더니.'
사공자는 대공자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는 것만으로 기쁜지, 앉아서 주변인들과 쉴 새 없이 떠들면서 다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함께 회의한 지, 일주일.
이젠 훌륭히 오합지졸 중 하나처럼 보이는 그였다.
'충분히 소가주(小家主)가 될 수 있을 자질과 능력을 갖춘 저 아이가 어째서 저리도 자신의 큰형님밖에 모르는지….'
도대체 이공자나 삼공자 진형에 있는 이들이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그저 그녀는 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나마 나은 것은….
마침 그 인물이 유 장로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유 장로님. 자료의 정리가 완료 되었답니다.”
공손하고, 조신하며, 우아한 여인.
그녀는 바로 사공자의 최즉근, 홍독지주였다.
“…그래.”
속눈썹을 가지런히 깔고, 세상 조신한 척하는 그녀는 과연 사공자의 집무실에서 봤던 그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책상 위에서 날뛰며 괴성을 지르고, 바닥에서 개돼지처럼 구르며 떼를 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호호. 차라도 먼저 한 잔 따라 드릴까요?”
턱까지 내려온 기미를 감추기 위해 엄청난 두께로 바른 분이,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아니다.”
그 가증스러울 정도의(한편으로는 안쓰러운) 인상 관리에 유 장로의 주름진 눈매가 떨려 올 정도였다.
'그래. 이 아이도 옛날부터 정상은 아니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괴짜 사이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인물의 행동은 항상 유 장로의 상상 밖에서 이루어졌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인물은 바로….
“대공자님께서 들어가십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토처럼 걸친 검은 외투를 휘날리며 등장한 인물.
미소년인지 미청년인지 딱 찍어 말하기 모호한 외형.
퇴폐적이면서도 동시에 강렬한 야성이 드러나는 인상의 소유자.
“다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불가사의(不可思議).
기상천외(奇想天外).
괴상망측(怪常罔測).
세상 어떤 말이 있어 이 인물을 몇 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대공자 연소현의 등장이었다.
* * *
유 장로는 일주일 전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는, 이 회의를 그저 오합지졸의 모임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판단을 철회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었다.
그 근거는 이번 회의에서도 확인 할 수 있었다.
먼저 연하응의 경우.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발언 차례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아하게 좌중을 향해 인사했다.
이번엔 어째서인지 구라파식 예법이었지만.
그러고는 박수를 받은 후 언제나처럼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
말이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 대공자에 의해 회의상에서는 발언을 금지당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가 모아 온 소문들은 먼저 세쌍둥이 시녀라 불리는 이들에 의해서 정리 가공되어 보고서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놀랍게도, 유각풍문이 모아 온 소문을 기반으로 제작된 보고서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낙양검가의 기밀과 비밀들이 오가는 장로회의에 참석하는 유 장로가 보기에도 놀랄 정도였으니.
“다음은 현월각에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다음은 현월각주 세아.
“저희 현월각은 전에 보고드린대로 대선상회의 요원 셋을 비밀리에 납치하여 정보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특유의 당당한 태도로 거침없이 발언을 이어 나갔다.
아직 자신의 턱에 침 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흠이었지만.
“그리고 그들에게서 추출한 정보를 바탕으로 대선상회의 비밀 지부 한 곳을 파괴했으며, 그 과정에서 포로 하나와 암호문들을 대량으로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대선상회 쪽의 반응은?”
“없습니다. 저희가 급습했던 비밀 지부는 누가 보아도 부주의에 의한 화재 현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좋아.”
그녀의 보고에 유 장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선상회는 이공자의 비밀 조직이었다(이 또한 이 회의에서 밝혀진 바였다).
그런 조직의 조직원을 납치하고, 거점을 급습하는 일은 그저 담력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정도의 공작은 정보상의 영역이 아니라 정보기관에서나 할 일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 모든 일이 이공자의 정보망 아래서 벌어지고 있는 점은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본가의 염곽추 장로를 대신하여 참석한 소녀가 보고하겠습니다.”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해 보인 염백하가 발언을 시작했다.
“저는 이공자의 내부 조직 상황에 대한 분석을 해 보았습니다.”
지병으로 인해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염백하.
“…이공자의 세력은 아직까지 자신의 외척인 사패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날카로운 분석.
판세를 읽어 내는 시각.
뛰어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한 대담한 추론 능력.
유 장로는 그런 그녀에게 지난 한 주간 몇 번이나 놀랐던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이공자는 자신이 더 이상 위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선(線)을 넘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연소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을 넘는다면?”
잠시 망설이던 염백하가 대답했다.
“…이번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 서, 앞으로 이공자 측과 물리적 충돌이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연소현이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분석이었소.”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유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내렸던 결론과 염백하의 결론은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했으니.
유 장로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이런 이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한다는 대공자에게 벌컥 화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든 저들 중 하나라도 우리 진영에 영입하고 싶을 정도지.'
권력도 금력도 부족하던 현월각주.
그저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유각풍문.
어린 나이에 집법사자가 되었지만 병약하여 매일 출근조차 못 하는 집법희.
도대체 대공자는 저런 이들을 어떻게 발굴해 낸 것일까.
자신이라면 진홁속에 있던 이들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유 장로는 속으로 깊이 침음했다.
“무력 충돌이라….”
대공자는 자신의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이 자리에서 무력 충돌을 두려워하는 이가 있나?”
답을 할 필요가 있던가.
그 질문에 모두가 대공자를 따라 미소 지었다.
연약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집법희라 불리며, 놀라울 정도의 담력과 호승심을 갖춘 염백하.
겉으로는 경박해 보이지만, 깊은 곳에 야망과 야성을 감추고, 무엇 보다도 날카로운 칼을 갈고 있는 연하응.
혈혈단신으로 시작해 지금 이 자리에까지 선 세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무력 충돌을 반기는 기색까지도 엿볼 수 있었다.
“지금 투자단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연소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 장로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아마 저 대공자는 언제나처럼 그녀가 상상도 못 할 계책을 꺼내 놓으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번에도 대공자는 그녀의 예측을 배반했다.
“적들은 반드시 그들을 노릴 것이다.”
연소현이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아 좌중을 바라보았다.
“적들은 반드시 우리를 노릴 것이다.”
그의 어깨에 걸려 있던 흑잠사 외투가 그에 맞춰 펄럭였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적들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기습할 것이고, 적들은 언제라도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고.”
연소현의 목소리가 커졌다.
“우리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방어를 해내야 한다고!”
그가 탁자의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무언으로 좌중을 압박하던 대공자는 거기 없었다.
그는 전투에 나서기 전의 수하들을 독려하는 장수처럼, 웅변을 토해 내는 중이었다.
“적들이 공격하고, 우리가 방어하는 싸움이 아니다.”
그가 시선을 움직여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주 보며 말했다.
“우리가 공격하고, 적들이 방어하는 싸움이다!”
그는 거침없이 웅변을 이어 나갔다.
“계획을 추진하는 쪽이 바로 우리가 아니던가? 그 계획을 막아야 하는 쪽은, 방어해야 하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다!”
그의 말에 다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유 장로조차도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랬다.
대공자와 사공자의 세력은 합쳐봐야 적들에 비해 한 줌밖에 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을 방어자의 위치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다들 깨달았나?”
대공자 연소현은 그런 좌증의 표정에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어느 누가 닥쳐오든 이 계획을 성공시킬 것이고, 이 사업을 밀어붙일 것이다.”
그가 주먹을 천천히 들어 올려 보였다.
“우리는 적들의 모든 저항을 부수고 파괴하여….”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공자 놈의 명치에 우리의 승리를 꽂아 넣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