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17화 (117/350)

제17편 투자(投資)

육두문자가 목구멍까지 올라온것을 차와 함께 다시 넘긴, 부전장장이 입가를 힘겹게 끌어 올렸다.

“무이자, 무담보는 아무래도 어려운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단기 상환을 조건으로 하신다면야, 어떻게든….”

“상환은 십 년 후.”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부전장장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런 얕은수에 당할 이 몸이 아니지.'

그는 이런 연소현의 요구가, 지금까지 신경을 건든 자신을 도발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다.

남은 차를 몽땅 털어 마신 그가 은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실례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대공자님께서는 조금 더 현실을 직시하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연소현이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그런가?”

“아무래도 그렇지요. 대공자님께서는 낙양검가의 직계혈족으로 금전적인 감각이 남다르실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흠. 계속해 보게.”

그는 찻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찻잔에 차를 부으며 말을 이었다.

“대공자님의 성함이 요즘 본가의 장로님들 사이에서 많이 오르고 있더군요. 염 장로님 또한 본래 체급을 벗어나 급격히 영향력을 넓히고 계시고, 이제 막 칩거를 끝낸 분으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적을 내고 계십니다.”

연소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의 말이 나올 것 같은데?”

부전장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본가에서 대공자님의 지분은 너무나 적습니다. 대공자님 본인이 직접 판을 휘젓는 일이야, 타고나신 영민함으로 가능하지만. 글쎄요….”

아니꼽기 짝이 없는 부전장장이 었지만, 지금 그가 하는 분석은 상당히 정확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분이 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명확히 대공자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세력은 없다시피 합니다. 사실 본가 전체에서의 지분이 아니라, 다른….”

그가 슬쩍 연소현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골랐다.

“다른 형제분들의 지분에 비해서도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으셨지요.”

“그렇지.”

연소현이 흔쾌히 맞장구를 치자, 그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의 분석을 늘어놓았다.

“더하자면 대공자님은 본가의 사업체에서 현재 차지하는 비중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렇다고 지금 개인적으로 진행 중이신 사업 쪽의 전망이 그리 밝은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아직 상재(商材)를 입증한것도 아니시니….”

“그리 생각하나?”

"대공자님께서 여러 뛰어난 재능을 가지셨다는 것은 저도 알지만, 상재 쪽은, 뭐랄까, 글쎄요. 아직 증명이 필요하다는. 그런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지가 않나….”

그는 말을 비비 꼬면서 흘긋 대공자의 눈치를 살폈다.

“뭐, 사업 예정지를 기습적으로 바꾸신 것도 좋았고, 외부 투자금의 규모가 커지는 것도 좋습니다. 다선랑을 초청하셨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부전장장이 한숨을 내쉬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공사는 아무리 빨라 봐야, 본격적인 개장은 용봉지회 이후가 될 것이고, 기간을 단축하려면 검가건축의 힘을 빌리셔야 할 터인데, 그 쪽 단가가 너무 높아서 불가능하시겠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술술 말을 내뱉던 부전장장이 결국 말을 아꼈다.

“아닙니다. 어쨌든….”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결정적으로 내 형제들이 펼치는 방해 공작에 사업이 좌초될 것이라는 말이 하고 싶었겠지.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부전장장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아무튼, 그렇기에 대공자님께 무이자 무담보에 상환 십 년이라는 대출은 불가능한 것으로….”

연소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자네의 분석은 잘 들었네.”

“아, 예. 그러면….”

그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전장장이 입을 열었다.

“다섯 배의 대출을 원하신다고요?”

부전장장이 뭐라 말을 꺼내려 했다.

“전장장님? 그게….”

“그렇네.”

연소현의 대답에 전장장이 눈을 뜨고 연소현을 마주 쳐다보았다.

“열 배의 금액은 어떠십니까?”

부전장장이 펄쩍 뛰었다.

"전장장님?! 그건 말도 안 되는...”

두 사람은 옆에서 떠들어 대는 부전장장을 무시하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열 배라. 조건은?”

“대출이 아닌, 투자로 하겠습니다.”

“…저기, 제 분석은 들으셨는지. 이 사업은 실패할 것이 뻔한데….”

“이익 분배는 있겠지만, 경영에 대한 어떤 참견도, 감사도 불허하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전장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죻아. 검가전장의 성의를 봐서, 지연 건에 대한 일은 잊도록 하지.”

“감사드립니다.”

부전장장이 탁자에 온몸을 던지며 외쳤다.

"잠깐! 잠깐 기다리시지요!”

그는 전장장을 향해 외쳤다.

“이렇게 위험한 투자는 본 전장의 부전장장으로서, 제게 주어진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전장장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 건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네. 내 직권으로 이 투자안을 통과시킬 것이야.”

“…전장장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부전장장이 슬쩍 탁자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전장장님의 의지가 확고하시다면, 수하된 자의 도리로서 따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는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을 능숙히 감추었다.

전장장이 알아서 무덤으로 들어 가겠다는데, 더 이상 말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가 해임되면, 다음 전장장은 자신이었으니.

부전장장이 입을 다물자, 전장장은 연소현을 향해서 말했다.

“이번 투자금은 제가 직접 이른 시일 내에 받으실 수 있도록 조치 하겠습니다.”

“고맙네.”

전장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미 일어나 있던 부전장장이 먼저 연소현을 향해 인사했다.

“그럼, 저희는 여기서….”

의자에서 물러난 전장장이 연소현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 정중하고 예의 바른 그 모습에 부전장장의 입이 다물어질 정도였다.

“검가전장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공자님. 앞으로도 저희 전장을 이용해 주시길.”

* * *

그 시각 원각정, 회의실.

원각정에는 과거 연소현이 쓸 일이 없어, 폐쇄해 두었던 전각이 많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 회의실 이었다.

하녀단에 의해서 깔끔하게 재단장된 회의실의 가운데에는 일자 형태의 회의용 초대형 탁자가 놓여 있었다.

현재 회의실에는 먼저 도착한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멋진 안대네요!”

염백하가 감탄하자, 세아가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혹시 그런 안대는 어디서 파나요? 매일 다른 안대를 사용하시나요? 주문 제작하시는 건가요? 주로 이용하시는 공방이 따로 있으신 건가요?”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퍼붓는 염 백하의 말에 세아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예. 주로 장인에게 직접 부탁해서 제작하긴 하는데….”

세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주변에 안대가 필요한 분이 계신 건지…?”

염백하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제가 쓰려고요!”

“예…?”

“현월각주님이 너무 멋있어서요! 팔다리도 길쭉길쭉하시고, 당당하면서도 냉철한 표정에, 바로 제가 미래에 되고 싶은 모습 그 자체예요! 동경하게 되네요!”

나이 차이가 크지는 않은 두 사람이었지만, 낙양의 저잣거리에서 맨손으로 성공한 세아와 지병 때문에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염백하 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 예. 하하하….”

세아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끼며, 습관대로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꺅!”

“...예?”

염백하가 눈을 두 배로 반짝였 다.

“그 곰방대! 그 곰방대가 바로 화룡점정이에요! 그 곰방대는 어디서 파나요? 저도 현월각주님처럼 되려면 역시 곰방대를 피워야 하나요?”

몸이 건강해지고,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게 되자, 요즘 들어 호기심이 폭발하는 염백하였다.

“아니, 그, 그것이….”

그렇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평소의 차분하고 냉철한 모습을 완전히 잃은 세아였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아름다운 여인이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좋으시겠어요, 현월각주님?”

그녀의 말에 세아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자신을 동경하는 수하들이 주변에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염 장로의 외동딸이자 낙양검가의 집법사자였다.

'차라리 속에 능구렁이가 백 마리씩 들어 있는 상인들을 상대하는 편이 편한데….'

“이쪽 분은…?”

염백하의 주의가 자신과 동행한 여인에게 쏠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세아였다.

“천녀(賤女) 서림청(曙林青)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집법희님.”

나긋나긋한 말투에 애교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여인의 행동은, 입고 있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기녀복(妓女服)과 너무 잘 어울렸다.

“기녀 (妓女)이신가요…?”

반짝거리는 장신구들에 눈을 반짝이는 염백하의 질문에, 서림청이 입가를 가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재주를 팔아 사는 처지이니,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염백하를 위해, 세아가 설명을 보충했다.

“이번 사업 계획을 위해서, 대공자께서 고용을 명하신 인물입니다. 제대로 된 소개는 대공자님께서 계신 자리에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이분이 전에 들었던…."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헉헉, 저 아직 안 늦었지요? 지각 아니지요?”

하녀가 가져다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남자를 보고 세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연 고문님. 그 복장은 대체…?”

구라파의 귀족 복장을 한 연하응이 뒷머리를 긁적이자, 뛰어오느라 고정이 풀렸던 금색의 가발이 훌렁 벗겨졌다.

“아니, 왠지는 모르겠는데 이게 요즘 낙양 사교계에서 갑자기 유행이라….”

“오오! 사교계! 저도 가 보고 싶어요!”

“하하! 집법희님이시라면, 어떤 연회에서도 주인공이 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연 고문님! 연 고문님! 거기 가면 저도 그런 복장을 입어 볼 수 있나요?! 그 이상한 가발도?”

“저만 믿으시죠! 제가 몇 벌이든 직접 준비해 드리지요! 아가씨분들을 위한 가발은 예쁜 것도 많답니다!”

“꺄아!”

시끄러운 사람이 두 배가 됐다.

세아는 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연 고문님. 혹시 그 꼴로 검가 내를 뛰어서 오신 겁니까?”

“예? 본가의 내부에서는 마차를 탈 수 없으니, 당연히 지각하지 않으려면 뛰어야지요. 어쩔 수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연하응은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

세아는 생각하길 포기하고, 뒤로 몸을 기댔다.

염백하와 연하응, 그 두 사람의 끊임없는 수다 속에서 그녀는 질식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호호.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회의네요〜.”

옆에서는 서림청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때, 회의실 밖에서 대기하던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가의 사공자님과 유 장로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 소리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사공자가 유 장로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홍독지주가 따랐다.

“이야, 저희가 좀 늦었….”

뭔가 인사말을 건네려던 사공자, 연비가 말을 멈추고 회의실 안에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

구라파 귀족 복장을 한 연하응이 무슨 일이냐는 듯이 사공자를 바라봤다.

이어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기녀복을 입은 여인이 입가를 가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염백하를 향했다.

“…아, 이 복장은. 요즘 부쩍 저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서 입어 보았사옵니다.”

염백하는 원각정의 시녀복을 입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사공자가 상황을 알겠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하!”

그리고 활짝 웃으며 유 장로에게 말했다.

“유 장로님! 우리도 얼른 가서 다른 옷을 입고 오면 어떨까요?”

"...."

유 장로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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