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편 검가전장(劍家錢場)
낙양검가, 원각정.
거한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궤(櫃)들을 날랐다.
일렬로 들어온 그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궤들을 내려놓았는데도, 마당에 깔린 포석에 작게 불꽃이 튈 정도로 무거운 철목(鐵木) 궤들이었다.
그들은 원각정의 별세상 풍경을 감상할 틈도 없이, 원각정의 하녀가 가져온 물동이에서 연신 냉수를 퍼마시기 바빴다.
운송 담당 책임자가 궤 옆에 서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정아에게 물었다.
“지금 확인하실 거요?”
정아의 위엄에 괜히 강하게 나가려는 문사의 무례한 말투에 쌍둥이 시녀들이 쌍심지를 켰다.
“말이 짧으시네요.”
“이분은 원각정의 시녀장이시자, 대공자님의 수석 담당시녀이시고, 원각정의 관리 책임자이십니다만.”
“그쪽은 뭐가 그리 지체가 높으신 분이시기에 함부로 혓바닥을 굴리시는지?”
단지 운송 책임자에 지나지 않는 문사는 그 사나운 기세에,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읏?!”
그는 급히 운송 호위대에 속한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도움을 바라는 눈길에도 무사들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할뿐, 누구 하나 앞으로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이곳이 낙양검가의 밖이라면 모를까, '같은 검가 식구'끼리의 문제라면 굳이 운송 책임자 '따위'의 자존심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이보게들….”
게다가 저쪽의 시녀들은 충분히 한 명의 무사로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젊고 아름다운 하녀 검객(劍客)들의 모습을 훔쳐보기 바쁜 그들이었다.
“왜 뒤를 돌아보시나요?”
무사들의 은근한 시선에 콧대가 높아진 쌍둥이들이 운송 책임자를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사죄를 드려야 할 방향은 이쪽이거든요?”
“혹시 경추(頸椎)에 문제라도 있으신가?”
운송 책임자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흠흠. 그럼 일단 확인 절차를… ”
일령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이령과 삼령의 손이 슬금슬금 검쪽으로 움직였다.
결국 운송 책임자가 정아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정아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운송 책임자는 더욱 큰 압박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시녀장님! 소인이 주제도 모르고 방만하게 굴었습니다!”
집사나 시녀의 위치는 그 주인이 가지는 지위를 따른다.
현재 연소현의 위치가 낙양검가의 중간 관리자급 문사들에게 있어서,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졌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부디 용서를…!”
그의 머리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까지 내려가고, 흘러내린 식은 땀이 포석에 떨어지자, 정아가 입을 열었다.
“확인 절차를 시작하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불똥이 튈까, 멀찍이 떨어져 있는 문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다, 다들 어서 움직이게!”
문사들이 괜한 짓을 벌인 그에게 속으로 욕을 하며, 각자 궤 앞에 서서 품속을 뒤졌다.
그들이 각자 꺼내 든 것은 검고 묵직한 광택이 흐르는 열쇠였다.
그 열쇠들의 머리 부분은 전부 종이로 봉인되어 있었는데, 그 종이에는 검가전장의 총책임자인 전장장(錢場長)의 붉은 인장이 찍혀있었다.
원각정의 시녀와 함께 꼼꼼하게 봉인의 손상 여부를 상호 확인한 후, 일제히 봉인을 뜯었다.
“그, 그럼 첫 번째 자물쇠를 개방하겠습니다.”
정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가 외쳤다.
“일 번 자물쇠 개방!”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문사들이 일제히 자신이 담당하는 궤의 첫번째 자물쇠를 열었다.
자물쇠에 풀로 덕지덕지 발라 붙인 봉인이 삽입되는 열쇠에 의해 찢어졌다.
성인 남성의 주먹보다도 큰 자물쇠가 포석 위로 떨어지며 불꽃이 튀었다.
이어서 호위대의 무사들이 앞으로 나오며 각자 열쇠를 꺼내 들었다.
마찬가지로 봉인의 확인을 마치자, 운송 책임자가 외쳤다.
“이 번 자물쇠 개방!”
마찬가지로 자물쇠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무사들은 물러서서 원래 대형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자물쇠는 하나였다.
“그럼, 미리 수령하신 열쇠함을… ”
하녀들이 금속 상자 하나를 날라왔다.
그 금속 상자는 열리는 부위 전체가 인장이 찍힌 봉인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확인을 마친 운송 책임자가 자신의 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그러자 금속 상자의 안에서 궤의 숫자와 같은 수량의 봉인된 열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마지막 자물쇠를 위한 열쇠였다.
정아의 허락을 받은 하녀들이 열쇠 하나씩을 들고 봉인을 뜯은 뒤, 각자 최후의 자물쇠를 열었다.
“금고(金庫) 개방!”
거한들이 한껏 용을 써, 각자 맡은 궤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금빛 반사광이 사방으로 튀었다.
함부로 눈을 감지 않는 훈련을한 원각정의 하녀들조차,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일 정도의 반사광이었다.
궤마다 가득하게 든 금화가 번쩍 거리며, 엄청난 존재감을 뽐냈다.
"...."
잠시 원각정의 인원들을 돌아보며, 놀란 얼굴을 감상하려던 운송 담당자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어떤 이의 얼굴에도 동요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화는 모두 주인의 것.
그녀들은 자신을 주인의 소유물이라 정의하며, 그렇기에 자신들은 재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라 여겼다.
“그, 그럼 금액 확인 절차를 시작해 주시면….”
정아가 말을 끊었다.
“확인했네. 다음 절차로 넘어가게.”
이미 그녀의 '용안'이 궤를 개방하기 이전에 개수를 전부 파악했던 것이다.
“예…?”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금화의 개수를 세는 모습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했던 운송 담당자가 당황했다.
“시녀장님께서 확인하셨다고 하지 않으시던가요?”
“이분은 목도 그렇고, 귀도 상태가 안 좋으신가 보네.”
운송 담당자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 그럼 최종 확인 절차로….”
어차피 저쪽에서 액수 확인을 정확하게 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발생했을 시 저쪽의 책임이었다.
그가 품에서 수령 확인증을 세 장 꺼내자, 멀찍이 팔짱을 끼고 서있던, 무사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운송 호위대의 책임자였다.
“그럼 각자 내용을 확인하시고, 각각의 확인증마다 날인과 지장을 찍어 주십시오.”
모두의 날인과 지장이 찍힌 문서 세 장은 그 세 명이 한 장씩 품에 넣었다.
“그럼 이것으로 모든 절차를 마치겠….”
정아가 그의 말을 끊었다.
“나머지 절반의 액수에 해당하는 전표(錢票)는?”
“전표의 경우에는….”
운송 책임자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전장장님께서 직접 대공자님께 전달하겠다 하셨습니다.”
* * *
원각정의 귀빈 응접실.
“자아, 대공자님. 그러면 액수를 확인해 주시고, 이쪽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전표를 확인하는 연소현에게, 간사한 목소리의 중년인이 수령 확인증을 내밀었다.
"...."
연소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쳐다보자, 중년인이 그때야 깨달았다는 듯이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아이고, 제가 감히 대공자께 실례를.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바랍니다.”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어렸다.
“수령 확인증이 없다고 해서, 설마 대낙양검가의 대공자님 정도나 되시는 분이 나중에 입 싹 닦으시고 전표를 이중으로 요구하실 리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더니 혼자서 하하하, 웃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탁자 위에 놓인 수령 확인증은 거둬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부전장장(副錢場長).”
묵직한 목소리가 뒤에서 간사한 목소리의 중년인, 부전장장을 불렀다.
“예, 전장장님. 말씀하십시오.”
부전장장이 돌아본 곳에는 흰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대공자께 무례를 사죄드리게.”
마치 그 성정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일말의 여지도 없는 목소리였다.
“아, 이거 참으로 송구스럽게 되었습니다. 부디 대공자님께서 아량을 베푸시어, 이 모자란 자를 용서해 주시길.”
"...."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듣는 이의 심기를 미묘하게 건드는 말투로 사과하는 부전장장이었다.
그러고는 연소현이 사과를 받지도 않았는데, 슬그머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아, 그럼 볼일은 모두 끝났으니, 저희는 일어서는 것이….”
대공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전장장이 말을 끊었다.
“대공자님 먼저, 긴급명령이 내려진 상황에서도 저희 전장 측의 대응이 늦어, 오래 기다리시는 수고를 끼치게 되었음을 사과드리겠습니다.”
부전장장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그게 어디 저희 탓입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장로 회의에서 내원으로 하여금 징벌적인 배상을 치르라 의결하게 되어….”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고, 전장장에게 답했다.
“그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감사드립니다.”
거듭해서 무시당하고 있는 부전장장의 콧수염이 가늘게 떨려 왔다.
"...."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감히 경거망동할 생각은 하지 못하는 그였다.
전장장이 다시 꼿꼿한 자세로 돌아와 연소현에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당(當) 전장이 사과의 뜻을 담아 성의를 표할 방법이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은 정중하나, 조금의 비굴함도 느껴지지 않아, 당당했다.
“아이고, 전장장님. 사과까지 하셨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애초에 저희의 실수가 아니라, 장로 회의에서….”
“장로 회의의 의결이 이루어진 이후의 이야기일세.”
전장장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원래라면 같은 액수를 준비하는데 걸렸을 시간보다 두 배의 시일이 소요됐네. 이게 우리의 책임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 그것이.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몇몇 직원들의 개인적 일탈 행위 때문에 소요가 발생한 것으로, 그것을 저희 전장 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장장의 날카로운 눈초리에도 끝까지 자기 할 말을 마친 부전장장이었다.
심지어 그 직원들의 직속상관이 부전장장 자신이었음에도.
“고의적인 지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하하.”
“자네…!”
그때 연소현의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검가전장에서 내게 성의를 표시 할 방법을 물었나?”
전장장은 정중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공자님.”
부전장장이 또 입을 나불거리기 전에, 연소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내게 대출을 해 주는 것이 어떻겠나?”
“대출 말씀입니까.”
돈 되는 이야기가 나오자 부전장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고, 대출이야 얼마든지 해 드리지요. 같은 검가의 식구이시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액수는 어느 정도를 원하십니까?”
연소현이 답했다.
“오늘 가져온 금액의 다섯 배.”
"...!"
부전장장의 얼굴에 잠깐 경련이 일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긴 그가 계산을 마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정도 액수라면 가능은 하겠지만, 아무래도 이자가 좀 높아지고, 담보가 확실해야….”
“무이자, 무담보로.”
"...."
틈만 있으면 나불거리던, 부전장장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그 모습에 이제까지 아무런 표정이 없던 연소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어렵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