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15화 (115/350)

제15편 사교계(社交界)

낙양(洛陽), 최상류층 거주 구역.

봄날의 따스한 햇볕 아래서는, 낙양에서도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장인의 손길로 관리되는 정원에서 구라파(歐羅巴) 형식의 연회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야외에는 선 채로 접근하기 쉽도록, 높은 탁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최고급 비단 탁자보(卓子褓) 위에는 손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이 유명 공방(工房)의 화려한 도자기에 놓여 있었다.

놀라운 점은, 음악이 흐르는 정원을 거니는 이들이 구라파식 귀족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특정 구라파 국가의 고증을 완전히 재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것에 신경 쓰는 이는 적어도 여기엔 없었다.

“아아. 적어도 구라파의 제대로된 악단(樂團) 정도는 초대하고 싶었답니다.”

가장 화려한 복식을 갖춘 아가씨 하나가 악단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색목인(色目人)들은 주최자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최선을 다해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긴 했지만, 어설픈 실력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이 정도면 대단히 훌륭한 연주로군요.”

“그런가요?”

아가씨는 눈을 반짝였다.

“제가 장담하지요.”

그 옆에 서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이는, 마찬가지로 구라파의 귀족 복식을 갖춘 훤칠한 미남이었다.

“제가 이전, 서반아(西班牙) 대사관(大使館)의 연회에서 보았던 악단과 비등할 정도로 우수합니다.”

“견식이 높기로 유명하신 연(淵) 고문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녀 안심이 된답니다.”

연 고문, 연하응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후후. 그럼 잠시 악단과 대화를 나누어 볼까요?”

그가 구라파 형식으로 정중히 팔을 내밀자, 아가씨는 기뻐하며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는 통이 작아 묘하게 꽉 끼는 복식을 속으로 욕하며, 아가씨와 함께 악단에 다가갔다.

마침 연주를 마치고 휴식에 들어 간 이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았다.

“연주..., 기회. 감사….”

그들의 엉성한 고물 악기를 바라본 연하응은 떠듬거리며 중원어를 구사하는 이의 말을 끊었다.

“Hoi!”

그는 나름 쓸 만한 화란어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네덜란드에서 왔는가?)”

그러자 그들 중에 화란어를 하는 이가 대답했다.

“(우린 대영제국에서 왔습니다.)”

연하응은 어깨를 으쓱이고, 영어 로 말했다.

“(너희들 악단이 아니라 선원들이지?)”

그 말에 모두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우리는 악단이 맞습니다!)"

연하응이 그런 아우성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마쳤다.

“(다시 한번, 내가 가는 연회장에서 너희를 만난다면, 전부 목을 매달겠다.)”

어차피 곧 떠날 예정이니,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아가씨들을 속여 고액 부업을 뛰어 볼 요량이었던 선원들이 하얗게 질렸다.

연하응은 그런 그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알아들었다면, 날 따라 웃어라. 사기꾼 놈들.)”

그러자 선원들은 최선을 다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와, 역시 연 고문님! 외국어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저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무슨 대화를 나누신 거예요?”

어느새 주변은 눈을 반짝이는 소녀들로 가득했다.

연하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지체 높은 집안의 아가씨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고귀한 피를 이은 여러분을 위해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되어 영광이라고 하더군요.”

연하응이 손짓을 보내자, 가짜 악단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를 시작했다.

“어머! 역시, 주 아가씨가 초대한 악단답게 말하는 것도 우아하네요!”

"다음번에도 또 구라파식으로 연회를 열어 보면 어떨까요?”

주 아가씨라 불린 연회의 주최자가 다른 아가씨들의 호평에 기뻐하는 표정을 감주지 못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연하응은 슬그머니 빠져나와, 공손한 모습으로 서있던 총관에게 다가갔다.

처음엔 의아한 표정이던 총관은 연하응의 말이 이어지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이내 연하응을 향해 연거푸 감사를 표했다.

'이걸로 한 건 했군.’

총관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연하응이 베푼 '은혜'를 전할 것이다.

사기꾼을 잡아 주고, 자신의 딸이 다른 가문의 아가씨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원만히 일을 해결해 준 것은, 사교계에서는 상당히 큰 은혜였다.

이 은혜는 언젠가 필요할 때, 또 다른 은혜로 돌아오리라.

낙양검가 외원의 통상 업무란, 상대와 날을 세우거나, 협상을 통해 더 큰 이득을 가져오는 것보다는, 이렇게 평소 은혜를 쌓아가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럼 이제 특별 임무를 수행해 보실까.'

“연 고문님! 연 고문님! 이번엔 또 어떤 새로운 소식이 있나요?”

“저번에 알려 주신 도자기 전시회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유용했답니다!”

“대공자님의 소식도 궁금해요!”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모여든 아가씨들을 향해 연하응이 미소 지었다.

“사실, 이번에는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 있지요.”

연하응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내리깔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러분을 위해서 특별히, 제가 이 소식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소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가씨들은 재잘거리는 것마저 멈추고, 연하응만을 바라봤다.

일각에서는 연하응을 '다리 달린 소문'이라 부르며 비웃는 경우도 있었지만, 적어도 낙양의 사교계에서 그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사(名士)였다.

몇 번 더, 교묘한 화술로 아가씨들의 애간장을 태우던 연하응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러분도 낙양검가의 대공자님과 사공자님이 이번에 하시는 합작 사업에 대해 들어 본 바가 있으실겁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사업 같은 일에 관심이 없는 아가씨들이라도, 신분이 신분인 만큼,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 사공자님께서는 사천 성도에서부터, 투자단을 유치하고 낙양으로 초청하셨지요.”

연하응의 눈이 반짝였다.

“그분들 중에, 여러분이 들으면 놀랄 만한 이름이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사업체인지라, 저도 그 이름을 입에 담으려면 잠시 숨을 골라야겠군요.”

연하응이 과장된 태도로 숨을 고르는 시늉을 하자, 아가씨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말해 주셔요!”

“빨리! 빨리!”

충분히 시간을 끈 연하응이 이름 하나를 입에 담았다.

“다선랑(茶扇娘)

순간 아가씨들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다선랑이래!”

“다선랑! 지금 사천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그 다선랑 말인가요?!”

“매 계절, 새로운 장인이 제작한 장신구들이 발표될 때마다, 사천 아가씨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바로 그 다선랑!”

그때 한 아가씨가 으스대며 자신의 손목을 들어 보였다.

“호호, 이게 바로 그 다선랑에서 작년 겨울에 발표한 신작 팔찌랍니다. 제 숙부께서 사천을 다녀오시며 저를 위해 구해 오신 물건이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 정도로, 이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다선랑이라는 사업체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문화의 중심지인 낙양이나, 해외 교역의 중심지인 상해에 거주하는 지체 높은 집안의 아가씨들마저 그 매력에 빠진다는 것은, 그만큼 다선랑이라는 업체가 가진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혹시 이제 낙양에도 다선랑의 새로운 지점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건가요?!”

“연 고문님! 알려 주세요!”

“후후. 그럴 가능성이 대단히 크지요. 왜냐하면….”

연하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선랑의 설립자들이 지금 이 시각 직접 낙양으로 오고 있기 때문이죠!”

“그 말씀은…?!”

"맞습니다! 성도지사(成都知事)님의 무남독녀이자 다선랑의 대표인 상관난화(上官蘭花) 아가씨가 직접 낙양으로 오고 계신다는 말씀이지요!”

예절도 품위도 잊고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사천제일미(四川第一美)!”

“그 상관난화님이 직접?!”

“낙양에 오신다고요?!”

연하응이 순간 당황할 정도로 다들 체통도 잊고 방방 뛰며 기뻐했다.

그 정도로 상관난화라는 이름은 현재 아가씨들의 사교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더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연하응의 외침에 아가씨들은 손발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 다선랑의 설립자들을 낙양검가의 대공자님께서 원각정으로 초대하셨다는 소식이지요!”

반응은 폭발적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였다.

저택의 하인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정원을 확인할 정도였다.

사교계의 아가씨들 사이에서 도원향(桃園鄕)이라 불리는 원각정, 그리고 그 원각정의 신비로운 주인 연소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대화거리였다.

그런데 거기다가 중원국 모든 아가씨가 동경한다고 하는 사천제일미의 이름이 더해진 것이다.

'후후후. 특별 임무는 매우 순조롭군. 좋은 시작이야.'

업무의 핑계를 대고 저택을 빠져나온 연하응이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마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외쳤다.

“서둘러라! 다음 연회 장소로 가자!”

하루는 짧았고, 연회는 많았다.

* * *

현재 낙양에서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정보 단체 현월각의 주인, 세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각주님. 또 다선랑에 대한 정보를 사고 싶다는 상인이 왔습니다.”

“…대기하시라 그래.”

“대기실이 만석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다선랑의 정보를 구매하러 온 손님들이었다.

“그럼 복도에서 줄이라도 서라고해! 난 아직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다고!”

“…건너편 다루(茶樓)에 협조를 구해 보지요.”

수하가 문을 닫고 나가자, 세아가 이마를 부여잡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유각풍문(有脚風聞)….”

도대체 단 며칠 만에 그는 낙양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것인가.

그녀는 그 이름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각주님!”

“줄이라도 서라고 하라니까?!”

수하가 고개를 저었다.

“낙양검가에서 사공자님의 이름으로 서신이 왔습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봉인을 뜯었다.

내용은 짧았다.

[지금 즉시 원각정으로.]

그녀가 수하에게 지시했다.

“당장 십육 번 안전 가옥에 있는 '그녀'를 호출해. 지금 즉시 원각정으로 들어간다.”

* * *

사공자는 시녀장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채비를 갖추며 외쳤다.

“홍독지주! 그대는 나와 함께 간다! 당장 자료들 전부 챙겨!”

사공자 일행이 서둘러 빠져나간 집무실에는, 전서응이 가져온 암호문을 번역한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투자단. 낙양까지 사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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