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14화 (114/350)

제14편 복기(復棋) (2)

장로원, 폐회(閉會) 후.

장로들이 모두 떠난 그곳에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자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나?!”

장로원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텅 빈 회랑(回廊)에 울려 퍼졌다.

“자네는 방금 그 정신 나간 노괴물을 적으로 만들었어! 그것도 그자가 가장 싫어하는 대공자의 손을잡고서!”

장로원주가 쥐어짜듯이 외쳤다.

“그자가 이 일에 자네가 깊게 발을 담그고 있음을 모를 것 같은가?!”

부원주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거참. 옛날부터 내가 음공(音功)을 수련하라 하지 않았던가? 그랬다면, 진작 그 목청 하나로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터인데.”

“지금 농담이 나올 땐가?!”

부원주의 표정이 사라졌다.

“지금 내가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

부원주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보이는가?”

늙고 쇠하여 검버섯이 가득한 그손은 경련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부원주가 입가를 부들거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노괴는 나한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어. 처음으로 징벌적 보상에 대해 발언했던 이가 나왔을때도, 거기에 찬성을 하는 이가 나왔을 때도, 그 시선은 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는 말일세.”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는 적으로 만들기에 너무나 위험한 상대였다.

장로원주가 자신의 가슴을 쳤다.

“도대체 그럼 어째서 대공자와 거래를 한 것인가?! 도대체 뭣 때문에?!”

그는 부원주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전부 책임지고 해결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자네 문제라면, 이 내가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해결해 주었을 걸세!”

그는 고개를 들지 않는 친우에게 외쳤다.

“이 내가 바로 장로원주일세! 내가 대낙양검가의 장로원주야!”

부원주는 눈을 들어 육십 년 지기를 바라보았다.

“그래서일세.”

“그게 무슨”?!”

부원주는 비틀거리며 장로원주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자네는 장로원주네. 그 힘으로 자네는 항상 나를 도와주었지. 하지만….”

“그런데 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장로원주를 향해 부원주가 한마디를 뱉어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네는 그랬어.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나를 절벽에서 완전히 건져 주지 않았지.”

부원주는 친우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을 때, 자네는 손을 내밀어 주었어. 하지만 자네는 한 번도 나를 절벽 위까지 끌어 올려 준 적은 없었다는 말일세…!”

그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것은 오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지.”

"...!"

부원주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바로 그래서일세.”

장로원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항상 말했지 않나! 모든 일에는:“

“그래, 모든 일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지.”

부원주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원래 그 자리가 내게 돌아왔어야 바른 '순서'였던 것처럼. 오 년전, 자네가 나를 제대로 도와주었다면 말일세!”

부원주의 말이 이어질수록, 장로 원주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푸들푸들 떨려 왔다.

“지금이라도 내 문제가 전부 해결되면, ‘절차'상 다음 장로원주에 가장 유력한 사람이 나인 것처럼!”

“그랬다면 우리 둘 다 죽었어! 아직도 모르겠는가?!”

“살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네! 충분히 존재했어!”

“그럴 가능성은…!”

부원주가 장로원주의 말을 벼락과 같은 고함으로 끊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지금이라도 나를 도와주면 되지 않는가?!”

장로원주의 입이 굳었다.

“그 노괴는 우리 둘의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어! 그렇지 않나?”

하지만 반대로 둘 다 파멸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건….”

장로원주의 머릿속에서 자신을 의지하며 오늘도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을 가족들과 수하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부원주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지. 내 다 알고 있어. 이제 자네는 너무 많은 것을 그 어깨에 지고 있네. 자네의 책임감은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지.”

그랬기에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친구가 아니었던가.

부원주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의 친구를 바라 봤다.

“…이젠 나 또한 짊어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아졌어.”

그는 돌아서서 회랑의 저편으로 걸었다.

“지금까지 내 투정을 들어 주어서 고맙네.”

한참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이제는 그 자리에 없는 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장로원주는 고개를 숙였다.

결국에 그는 회랑의 반대편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젖형제로 인연을 시작했었던, 두 사람의 길이 갈라졌다.

신의와 믿음으로 단단하게 결속되었던 그들의 관계.

그 관계는 마찬가지로 서로가 짊어진 신의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 * *

부원주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향한 곳은, 염 장로의 거처였다.

가벼운 차림으로 거검을 휘두르던 염 장로가 그를 발견하고는, 한 달음에 달려왔다.

“부원주님!”

부원주가 흐릿한 눈빛으로 염 장로에게 말했다.

“…술 한잔 얻어 마실 수 있겠소?”

심상치 않은 상대의 표정에, 염 장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염 장로는 비틀거리는 노인을 도와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아랫것들을 전부 물린 후에, 직접 술과 안주를 차려 왔다.

안락의자에 기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노인이 말했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아프구려.”

염 장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래를 마쳤을 때만 하더라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대가라고 생각했는데….”

염 장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옆을 묵묵히 지켰다.

부원주, 함 장로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적어도 다섯 명은 내 곁에 남아줄지 알았는데. 미리 약조도 했는데.”

그는 염 장로가 건네주는 술잔을 마다하고 동이째 들이켰다.

반쯤은 바닥으로 흘렀고, 반쯤은 기침과 함께 쏟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늘 노괴의 반응을 보고서는 아무도 약속을 지키지 않더군.”

이미 염 장로를 찾아오기 전부터 취해 있었던 그는 풀린 눈으로 염 장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대가를 치렀소. 내가 계산했던 것보다 더 처참하게. 이제 나는 끈이 떨어진 연이오. 그 노괴는 이제부터 완전히 노출된 나를 노릴터. 그대와 대공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나는 원망하지 않겠소.”

누구도 그의 곁에 남아주지 않았다.

염 장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함 장로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이제부터 부원주님은 제 계파의 사람으로, 마땅하게 받아야 할 보호를 받으실겁니다.”

“정말이오…?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물론입니다. 그것이 신뢰 아니겠습니까?”

함 장로가 큰 소리로 웃었다.

“이제 그대가 바로 내 친우요! 내 형제로다!”

염 장로도 함께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어딘가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 * *

달이 훤한 밤.

원각정의 어느 처마 아래.

연소현이 달빛 아래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약왕은 그를 향해 슬쩍 다가갔다.

무슨 재주를 부린 것인지, 어떤 기척도 없이 다가간 약왕이었지만, 가까워지기 무섭게 연소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밤손님으로 전직하기로 하셨소?”

무안해진 약왕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 나이에 전직은 무슨….”

그러면서도 연소현이 들고 있는것이 신경 쓰였는지, 그쪽을 흘긋거렸다.

“별것 아니오.”

연소현은 흔쾌히 그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비단에 지극히 짧은 글이 적힌 서신이었다.

[베풀어 주신 은혜, 죽었다 다시 살아나서도 갚겠습니다.]

약왕이 짧게 침음했다.

비단에서는 은은하게 사향(麝香) 내음이 풍겼다.

“…염백하. 그 아이가 보낸 것이더냐?”

다시 고개를 돌린 연소현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어딘가 덧없어 보이는 뒷모습에 약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후회하느냐?”

대답은 없었다.

그저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만이 달빛에 반짝일 뿐.

“그 아이의 '발작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약초(藥草)'를 찾은것은 나다. 그럼 내가 후회해야 하느냐?”

약왕은 발작을 인위적으로 일으킨다고 하였다.

연소현의 대답은 없었다.

“그 아이의 식사에 그 약초를 갈아 넣은 것은 주방 하녀들이었다. 그들이 후회해야 하느냐?”

“…결정도 내가 내렸고, 지시도 내가 했소.”

대답이 끝나자마자, 약왕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었느냐?”

짧은 침묵.

“없었소.”

“그래. 너는 반드시 염 장로가 필요해서 한 일이었겠지.”

“그렇소.”

연소현은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의 역사를 떠올렸다.

연소현이 데릴사위가 되어 떠나고, 낙양검가에 찾아왔던 약속된 대혼란기(大混亂期).

낙양검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가주와 검가를 향한 충성과 맹세를 잊지 않았던, 한 명의 무장(武將)이 있었다.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어떤 전투에서도 패하지 않았고, 필요한 승리는 반드시 가져왔던 사내.

이미 가주를 잃은 심처(深處) 앞을 지키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 충의(忠義)를 다하고 산화한 그를 세간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상승불패(常勝不敗),

거검신장(巨劍神將).

연소현은 그런 그가 필요했다.

그가 그리는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반드시.

그런 그를 얻기 위한 연소현의 마지막 한 수는 '속임수'였다.

* * *

침묵을 지키던 약왕이 물었다.

“…만일 그날, 염 장로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딸을 데리고 그냥 돌아갔다면 어쩔 생각이었느냐?”

“…아무것도. 그저 앞으로의 여정에서 희생이 더 커질 뿐.”

약왕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에 말을 이은 것은 연소현이었다.

“…사실, 그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었소. 그는 그런 사람이지. 신뢰가 있는 사람.”

연소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필요했던 마지막 한 수가 속임수라니. 그 얼마나 모순적인 이야기인지."

약왕은 연소현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몇 년의 시간이 있었다면, 염 장로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겠느냐?”

“…아니오. 그는 한두 해 교류한다고 누군가를 신뢰할 정도로 가벼운 인물이 아니지.”

연소현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모든 것을 열어 보이며 다가갔다면,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을 것이오. 내가 모든 것을 내어 주었으면, 그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을 것이오.”

그것이 권력자이니까.

그것이 많은 것을 짊어진 자의 책임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지.”

연소현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왔어도, 나는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오. 그가 대가 없는 충성을 바쳤다면, 나는 그 충성을 받지 않았을 것이오.”

자신 또한 권력자였으니.

그 자신 또한 그 어깨에 너무나 많은 것을 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런 염 장로의 신뢰를 얻는 방법도, 연소현이 염 장로를 신뢰하는 법도, 무척이나 간단했다.

연소현이 요즘 다른 장로들에게 '믿을 만한 거래'를 파는 법과 마찬가지였으니.

한계까지 구석에 몰리는 경험, 딸을 영원히 잃을 뻔한 경험.

그 상황에서 연소현의 행동.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염 장로의 결단.

그런 커다란 대가를 치르자, 그는 연소현과의 관계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런 커다란 대가를 염 장로가 치렀기 때문에, 연소현은 그런 그 와의 관계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 다.

작은 속임수 하나가 만들어 낸 굳건한 신뢰 관계.

도대체 권력자 간의 그 신뢰라는것은 어찌도 이리 얄팍한 것인지.

"...."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약왕의 눈에, 돌아앉은 연소현의 무르팍에 있는 다른 서신들이 보였다.

전부 같은 비단에 쓰인 서신들인 것을 보아하니, 그 모든 서신들이 염백하로부터 온 것이 분명했다.

[오늘은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걸을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대공자님은 제게 새 삶을 주셨습니다.]

약왕의 눈이 서신의 내용을 홅었다.

[아버지와 대공자님이 서로 깊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되신 것을, 이 소녀는 너무나 기쁘게 생각한답니다.]

"...."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밤하늘을 올려다볼 뿐.

Chapter 03.

달(月)의 이면(裏面)

An earthly kingdom cannot exist without inequality of persons.

Some must be free, some serfs, some rulers, some subjects.

지상의 왕국은 인간의 불평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자유민이어야 하며, 어떤 이는 노예여야 하고, 누군가는 군림해야 하며, 누군가는 지배받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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