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13화 (113/350)

제13편 복기(復棋) (1)

낙양검가,

사공자의 집무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사공자의 집무실에는 불이 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무실 안은 대화 한마디 들리지 않았는데, 그저 규칙적으로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쿵쿵 하고 결재 도장을 찍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홍독지주(紅毒蜘蛛)의 자리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탑처럼 쌓여 있었고, 맞은편 사공자의 자리에는 그 이상의 서류가 쌓여 있었다.

서류가 한 장 넘어가고, 도장이 한 번 찍힌다.

서류가 또 한 장 넘어가고, 도장이 또 찍힌다.

그러다 보면, 퀭한 눈의 문사가 또 한 아름의 결재 서류를 들고 들어와 쌓았다.

"...."

"...."

뚝, 하고 홍독지주가 쥐고 있던 도장이 부러져 나갔다.

고개를 든 사공자가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그 도장 엄청 비싼 건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홍독지주가 책상을 내리쳤다.

“갸아아아아아악!”

서류의 탑들이 붕괴하며, 하늘에서 서류들이 비가 되어 내렸다.

“어머나!”

구석에서 졸고 있던 사공자의 시녀장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제가 깜빡 졸았나 보네요.”

사공자가 책망하는 눈길로 홍독 지주를 노려봤지만, 그녀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이젠 못 해! 이젠 더 이상 못 한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는 중년 여인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사공자가 손뼉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행정시녀들이 들어와 홍독지주가 흩뿌린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시 탑을 쌓기 시작하는 것이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날 집으로 보내 줘! 우리 아가들이 보고 싶어! 집에 돌아가고 싶어! 우리 여보야가 보고 싶어!”

사공자가 못 볼 꼴을 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가 집에 가도 아무도 없어. 그대의 쌍둥이 아들들은 이미 결혼해서 독립했고, 그대의 지아비는 지금 출장 중이잖아.”

“그래도 보내 줘요! 보내 달라고! 가족들이, 가족들이 집에서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요!”

이제 숫제 애걸하는 홍독지주(쌍둥이 엄마)의 모습에, 시녀장이 그녀를 달래며 자리에 앉혔다.

“자 자,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끝 나요.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시녀장이 서랍을 열자, 새로운 도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홍독지주가 이전에 부러뜨렸던 도장들의 잔해가 쌓여 있었다.

“키아아아아아아!”

전에는 이렇게 달래면 어떻게든 됐는데, 이제는 정말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홍독지주가 사공자에게 외쳤다.

“왜?! 어째서?! 일이 끝나지 않는 겁니까?! 분명히 사흘 전에 집에 보내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녀의 감지 않은 머리는 기름으로 떡이 되어 있었고, 짙은 화장은 이미 화장이라기보다는 위장에 가까웠다.

“…내일은 꼭 집에 보내 줄게.”

하나도 확신이 없는 사공자의 말에 홍독지주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거짓말쟁이! 이 거짓말쟁이!”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섰다.

“분명히 주군은 일전에 그렇게 말했지요!”

그러면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사공자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가장 잔혹한 가문의 후예다! 나는 위대한 가문의 적통이다!”

사공자가 대번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였다.

“이제 이 검가는 우리의 존재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공자를 시녀장이 꼬옥 안아서 토닥거려 주었다.

“괜찮습니다, 주인님. 그 나이에는 충동적으로 그럴 수 있답니다.”

“…하나도 위로가 안 되는걸.”

홍독지주가 주변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때는 이공자나 삼공자한테 쳐들어가서 피바다라도 만들 줄 알았는데, 이 무한한 서류의 연속은 뭡니까?! 도장으로 적들을 찍어 죽이는 무공이라도 수련하는 건가요?!”

물론 그녀처럼 훌륭하고 유능한 인재가 지금 하는 일의 중대성을 모를 리는 없었다.

“키아아아아아아!”

...아마도.

사천 밀림(密林)의 원시 부족 주술사처럼 괴성을 지르며 위협하는 그녀의 모습에 사공자와 시녀장은 한숨을 쉬었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사업 계획에 진척이 없어서 난리였잖아. 낙양 행정부가 하나도 협조를 안 해주는 바람에….”

괴성을 질러 대던 홍독지주가 사공자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바로 그겁니다! 그것도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아요!”

그녀가 서류를 뛰어넘어 바닥에 착지했다.

“낙양 행정 당국은 우리 사업 계획에 걸 수 있는 모든 행정적인 방해란 방해는 다 했었다고요! 심지어 감탄할 정도로 기상천외한 종류의 규제까지 들먹이면서!”

새 사업 부지로 이전 확보를 성공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누가봐도 고의적인 것이 분명한 번문욕례(繁文耨禮)의 향연이었다.

삽을 뜨기는커녕, 애초에 사업 계획의 승인 자체를 받지 못할 정도의 위기가 왔었다.

“그런데 대공자가, 그 대공자가 무슨 주술을 부린 건지 몰라도 갑자기 한 번에 모든 절차가 진행되어 버렸다고요!”

그것의 결과가 지금과 같은 결재 서류의 산맥이었다.

사공자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큰형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헤실거리며 웃었다.

“하하. 역시 알아주는구나? 큰형님은 대단하시지.”

“그 말이 아니잖아욧?!”

홍독지주가 부들거렸다.

“애초에 그 많은 낙양 행정 부처가 일시에 한 사업을 방해한다는것은, 외부에서 엄청난 영향력이 행사됐다는 뜻이잖아요!”

그녀의 눈이 뒤집혀 흰자가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대공자는 무슨 재주로 그 고위 관료들을 움직였냐고요!”

사공자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것이 큰형님이니까.”

“그러니까 무슨 방법으로…?!”

“나도 몰라.”

사공자가 턱수염도 나지 않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굳이 짐작해 보자면….”

그때 문이 열리며, 탄탄한 체구의 노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염 장로가 물어 온 손님들을 이용해서 벌인 일이지요.”

새하얀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모 습이 인상적인 노부인(老婦人)이었다.

주름이 그 세월의 흔적을 남겼음 에도, 지금도 미모가 빛을 잃지 않은 여인의 모습에 홍독지주가 얼른 손을 모아 인사했다.

“유(劉) 장로님을 뵙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그녀의 모습에 유 장로라 불린 노부인이 가차 없이 혀를 찼다.

“너는…. 좀 있으면 손주들을 볼 애가 말이다. 아직도 사공자께 떼를 쓰고 있느냐?”

"...."

감히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그저 부끄러워 고개를 떨군 홍독지주였다.

평소라면 홍독지주가 혼나는 모습을 주전부리라도 집어 먹으며 지켜봤을 사공자였지만, 지금은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였다.

“유 장로님. 혹시 그렇다면 제 예상대로 큰형님과 염 장로가?”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대공자는 정치적으로 절벽에 매달려 있던 이들을 염 장로를 통해 만난 모양이더군요.”

그녀는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물었다.

“처음에는 그런 소수의 경우에만 대공자를 만났지만….”

그러자 손도 대지 않은 연초에 불이 붙더니 연기가 길게 올라갔다.

“'대공자의 거래'에 신뢰가 생기고 나자, 이제는 그 수가 상당한 모양이었습니다. 사업 계획 하나 통과시키는 일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요.”

확신이 없이는 절대 속단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을 아는 사공자가 의문을 표했다.

“그 사실을 유 장로께선 어떻게 확인하신 겁니까?”

천장으로 연기를 길게 내뿜은 유 장로가 씹어 먹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 정신 나간 대공자가 오늘 장로 회의를 한바탕 뒤집어 버렸으니까요.”

“예?”

* * *

시간을 거슬러 오후 늦은 시간.

장로원, 대회당.

유난히 길고 지겨운 회의였다.

이제 슬슬 폐회 시간이 다가온지라, 장로들은 다들 슬그머니 짐부터 싸고 있었다.

"자 자, 마지막 안건이오. 그러니 끝까지 집중하시오.”

그렇게 말하는 작은 거인, 장로 원주 자신이 가장 지겨워 보였다.

“자, 한번 봅시다….”

사회를 봐야 할 장로가 병결(病缺)했기에, 원주인 그가 온종일 사회를 봐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지막은 별것 없구려. 회의 끝.”

장로원주가 들고 있던 서류를 뒤로 던졌다.

“아니…. 이 미친 작자가.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부원주(副院主)가 한숨을 쉬며 다가가서 서류를 주웠다.

그러고는 장로원주를 밀어내고 자신이 단상에 섰다.

“마지막 안건은….”

그가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긁었다.

“이건 표결이 필요 없는 안건이구려. 그래도 일단 읽어 보겠소.”

사방에서 깐깐한 일 처리의 부원주를 향해 야유가 날아왔다.

“아니, 다들 그러지 마시고. 절차는 절차 아니겠소?”

장로들을 달래려 억지로 웃어 보이는 부원주였다.

“에…, 그러니까. 이건 최고 운영 회의의 긴급명령에 대한 안건이오.”

그 말에 다들 한숨을 쉬었다.

그놈의 대공자를 위한 긴급명령 때문에 표결도 없이 통과되는 안건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까다로운 성격의 장로들도 서류를 던져 버린 장로원주의 행동에 공감했다.

야유를 하든 말든, 짐을 싸서 일어나든 말든, 잡담을 나누든 말든, 부원주인 함 장로는 꿋꿋이 서류를 읽어 내렸다.

“그래서 내원은, 대공자에게 미지급한 운영 비용 전액을 지급하여야 하는바. 빠른 지급을 위해 검가전장이 대신 금액을 지불하고, 그 금액만큼 내원에 대한 채권(債權)을 가진다.”

별것 없는 내용이었다.

과거 내원이 지급하지 않았던 금액을 검가전장이 대신 지급한다는, 그런 별것 없는 내용.

“에, 그러면 긴급명령에 따른 절차에 따라 이 안건은 가부(可否) 논의 없이 통과된 것으로….”

하지만.

“잠깐.”

이제야 끝났다는 표정을 짓던 장로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손을 들고있는 장로를 향했다.

그 장로는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시선을 무시하고 꼿꼿하게 발언했다.

“내원에서 부정을 저지른 이들은 처벌을 받았지만, 정작 관리 책임이 있는 내원총관과 내원은 따로 처벌조차 없었소.”

공기가 얼어붙었다.

회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앉아 있던 내원총관의 시선이 그 장로를 향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대번에 그 시선을 피했어야 할 장로가 꿋꿋하게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적어도, 그 책임을 통감할 정도의 보상을 대공자와 원각정에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장로들이 광인(狂人)을 보는 표정으로 그 장로를 바라봤다.

그 두려운 내원총관을, 그것도 이미 끝난 일로 건드리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고개를 숙인 장로 하나가 손을 들어 동의했다.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손들이 점차 올라오기 시작했다.

손을 들지 않은 장로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기 바빴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 건 좀 그렇지. 사실 내원총관은 코에 손도 안 대고 남이 대신 코를 풀어 준 것 아니었던가?”

“그러게요. 그로 인해서 내원 안에서 잡음을 만들던 이들이 싹 사라졌으니….”

내원총관의 얼굴이 귀신같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지만, 여기저기서 손을 든 이들은 이미 절반을 넘은 상태였다.

“어, 그러면, 이 의결은 이제, 내원이 대공자에게 해야 할 징벌적 배상에 대한 안건이 되는 것이로군요.”

부원주가 히죽 하고 웃었다.

그의 '금니'가 유난히 반짝였다.

* * *

“절반 이상이요?!”

홍독지주가 펄쩍 뛰었다.

그 경망스러운 모습에 유 장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대공자와 거래를 통해 거수를 약속한 이들은 소수였을 것이야. 아마도 초반에 거수한 이들이겠지. 나머지는….”

사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내원총관의 견제를 원하던 이들이었겠지요. 장로정도 되는 이들이 그런 강자를 물어뜯을 기회를 놓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홍독지주가 다시 끼어들었다.

“아니, 그래서 배상 금액은 얼마나 나왔습니까?”

유 장로가 길게 연기를 뿜었다.

“미지급 금액의 네 배.”

“네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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