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12화 (112/350)

제12편 계가(計家)

익일(翌日), 이른 오전.

장로원 (長老院).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정시에 도착한 염 장로가 입구에서 자신의 대검을 맡겼다.

“무거우니 조심하게.”

신입 무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미소 지어 보이다가, 대검을 넘겨받는 순간 무릎이 휘청였다.

이마에 핏줄이 곤두선 채로 부들거리며 자신의 대검을 옮기는 신입을 보며, 선배 무사들이 키득거렸다.

장로원에 배치받은 신입 무사를 위한 신고식이었다.

그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염 장로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염 장로!”

“거기 서 있어 보시오, 염 장로!”

그가 돌아보자 그곳에는 그와 같은 중립 계파에 속한 장로들의 모습이 있었다.

장로 중엔 내공에 재능이 없는 이도 많았고, 지금 도착한 이들도 마찬가지라 그들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소문이 사실이오?”

“무슨 소문 말이오?”

염 장로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장로 하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염 장로가 대공자와 거래를 했다는 소문 말이오!”

염 장로는 출근하던 다른 장로들의 이목이 슬그머니 자신에게 모여 드는 것을 느꼈다.

“아.”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이오. 아주 좋은 거래를 했지. 가격이 좀 비싸긴 했지만.”

그것이 임무에 관한 이야기라는것을 굳이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못 알아듣는다면, 낙양검가의 장로 자격이 없었다.

“오오!”

몇몇은 감탄을 표하고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그 대공자와 거래라니. 역시 염 장로는 대담하구려. 그 젊음이 부럽소이다.”

"대공자의 인맥이 두텁다더니, 사실이었나 보구려.”

염 장로가 그들을 안으로 이끌었다.

"자 자.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면서 하는 것이 어떻겠소?”

* * *

장로원, 대회당(大會堂).

염 장로는 자신을 찌르듯이 바라보는 시선들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공자와 삼공자 파벌의 장로들이 노골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모른 척 슬며시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시선은 느껴졌다.

사공자 파벌의 장로들이었다.

현실성은 부족하지만, 내심 새로운 동맹 장로가 생기길 바라던 그들은 고까운 눈빛으로 염 장로를 홀긋거리고 있었다.

'것참….'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자신과 다른 중립 계파에 속한 장로들이 헛기침 따위를 하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눈인사라도 했겠지만, 중립성을 의심받는 염 장로가 은근히 불편한 그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아침까지 어울리던 같은 중립 계파의 장로들도 슬그머니 떨어져 앉아,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들도 예상은 했겠지만, 이렇게까지 다른 장로들의 반응이 극적일 줄은 몰랐던 것이리라.

'거래만 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정도라….'

결국, 염 장로는 몇 번이나 검토했던 회의 자료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만약 대공자의 깃발 아래 들어갔다면, 진짜 없는 사람 취급당했겠군.'

입이 썼다.

* * *

휴식 시간.

장로원 대기실 중 하나.

같은 중립 계파 장로들이 갖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운지라, 대기실에 있는 것은 염 장로뿐이었다.

“흠흠.”

그때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늙은 장로 하나가 염 장로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거래를 축하하오, 염 장로. 하지만….”

염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적당히 몸을 사리는 것이 좋겠지요.”

늙은 장로가 염 장로의 옆에 앉았다.

“다들 대공자의 파벌이 탄생하여, 기껏 안정된 세력 비율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지.”

늙은 장로가 혀를 찼다.

“겁쟁이 놈들.”

염 장로가 쓰게 웃었다.

“균형은 소중한 것이지요. 그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비결 아니겠습니까?”

늙은 장로가 히죽 웃었다.

“그렇지. 평화는 중요하지.”

빠진 이 대신 끼워 넣은 금니가 반짝였다.

“…그럼 잘 부탁하오.”

“예, 좀 있다가 회의에서 뵙겠습니다.”

늙은 장로는 들어올 때처럼 슬그머니 사라졌다.

텅 빈 대기실에서 염 장로는 늙은 장로가 두고 간, 작은 쪽지를 품에 넣었다.

* * *

늦은 밤.

비가 흩날리는 낙양의 환락가.

동틀 때까지 운영하는 한 낡은 업소.

웬 추레한 늙은이 하나가 짚으로 짠 우의를 뒤집어쓰고 들어왔다.

점원은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보고 있던 춘화집(春畫集)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늙은이는 그런 점원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슬그머니 다가가 속삭였다.

“…바람에 우는 여섯 가락.”

그러자 점원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안쪽을 가리켰다.

“육 번 방.”

늙은이가 육 번 방의 문을 열자, 안에서는 칼잡이 하나가 여자를 끼고 놀고 있었다.

“무, 뭐야?! 뒈지고 싶어?!”

급히 바지를 끌어 올린 칼잡이가 욕설과 함께 칼을 들이밀었지만, 늙은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정면에 있는 벽을 두드렸다.

강하게 두 번, 약하게 두 번, 또 강하게 한 번.

그러자 두꺼운 벽처럼 보였던 것이 슬쩍 열리는 것이 아닌가.

늙은이가 슬며시 그 안으로 들어가자, 그 비밀 문은 거짓말처럼 벽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말이야, 이 오빠가 말이지….”

칼잡이는 마치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고, 다시 여자와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선 늙은이는 자신이 다시 외부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긴 복도처럼 보이는 그곳은, 높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이 었다.

비밀 문을 열어 준 여인은 지독한 성병에 시달리는지, 얼굴까지도 두드러기가 나고 진물이 홀러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을 들어 방향을 알려 주었고, 늙은이는 좁은 틈 사이에서 그녀와 접촉하지 않게 조심하며 움직였다.

위에서 내다 버린 온갖 잡동사니 사이를 지난 늙은이는 골목의 끝에서 곧 철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철문을 확인한 늙은이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이 건물은, 다른 건물들 사이에 둘러싸여, 사실상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할수 없는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 철문을 두드려 암호를 전하자, 철문이 별 소음도 없이 열렸다.

평소에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늙은이는 안으로 들어와 철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철문을 열어준 거한을 보고 미소 지었다.

늙은이의 입에서 금니가 반짝였다.

“보안이 매우 철저하구려, 염 장로. 훌륭하군. 훌륭해."

거한, 염 장로가 미소 지었다.

“어서 오시지요, 함 장로님.”

늙은이는 다름 아닌, 염 장로에게 쪽지를 건넸던 그 늙은 장로였다.

“이야, 안은 밖과는 완전히 다르구먼?”

낡아 빠진 외장과는 다르게, 건물 안은 매우 깔끔했다.

“아무래도 쓰시는 분이, 분인 만큼.”

“과연 그렇구먼.”

짧은 복도를 지나자,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염 장로가 휘장을 걷자, 탁자 뒤에 앉아 있는 인물이 보였다.

소년처럼 보이기도, 청년처럼 보이기도 한 그 인물이 함 장로를 반겼다.

“반갑소, 함 장로.”

함 장로가 정중히 손을 모아 인사했다.

“함 모(某)가 낙양검가의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대공자,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와 거래를 원하신다고?”

* * *

연소현이 요구한 대가에 늙은 장로는 펄쩍 뛰었다가, 빌었다가,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염 장로의 중재 아래 적절한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연소현에게 인사를 해 보인 늙은 장로는 염 장로의 안내를 받아 건물에서 벗어났다.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이었다.

굽이굽이 골목을 돌아 큰길로 나온 함 장로는 곧장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탔다.

염 장로가 미리 언질을 주었던 장소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마차 였다.

함 장로는 빗물인지 땀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물기를 비단 수건으로 닦아 내며 말했다.

“으음. 염 장로 없이 대공자와 거래를 했다면, 큰일을 치렀겠구먼.”

애초에 염 장로가 없었다면 거래도 없었다.

염 장로라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대공자와의 거래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꾸지 않았을 그였다.

그것은 장로원 내에서 장로끼리의 거래를 반복하며 자연스레 쌓아온 장로 간의 신뢰였으며, 염 장로라는 인물 개인이 쌓아온 신뢰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거래이기도 했다.

그의 집사가 함 장로가 쓴 비단 수건을 정중히 받아 들었다.

“거래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함 장로가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만족스러워야지. 내가 치른 대가가 어느 정도인데.”

함 장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저 건물들에 대해서 추적은 해 보았는가?”

집사가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인님께서 들어가시자마자 신뢰할 만한 정보상을 통해 조사해 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함 장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철저하군 철저해 비싼 값을 하는군. 아주 마음에 들어.”

“만족하셨다니, 저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자신이 치러야 할 비싼 대가를 생각하면 속이 쿡쿡 쑤셔 왔지만, 어쩌겠는가.

비싼 대가를 적합한 인물에게 쓰면,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법이 었으니.

'그래. 당장 내 장로직을 유지하는 것이 먼저지.'

마차는 빗속을 달려 곧 모습을 감추었다.

* * *

염 장로와 연소현,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자죽했다.

“오늘만 장로 한 명에, 최상위 인사 두 명이구려. 축하드리오, 염 장로.”

연소현이 잔을 쭉 들이켰다.

염 장로는 잔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대로 장로회에서 고립되어 가나 싶었지만, 이젠 이전보다도 훨씬 '친구'가 많아졌습니다. 이게 전부 대공자님 덕분입니다.”

염 장로는 연소현을 향해 잔을 높이 들어 보인 후, 한 번에 들이켰다.

그의 머릿속에 원각정을 방문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 * *

“대공자님.”

집무실에서 서책을 들여다보던, 연소현이 눈썹을 치켜떴다.

“염 장로. 작별 인사는 아까 한것으로 하지 않았었소?”

염 장로는 손에 들고 들어왔던, 자신의 거검(巨貪IJ)을 연소현에게 내밀었다.

검자루를 연소현을 향해서.

"...."

연소현은 자신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겠소?”

염 장로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질문을?”

염 장로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또 그만큼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후에 가주로 섬기고 싶은 이는 누구인가? 내가 명을 따르고 싶은 가주는 누구인가? 내가 전쟁터에서 함께 서고 싶은 가주는 누구인가?”

염 장로가 고개를 들어 연소현을 바라봤다.

“그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대공자 연소현.”

연소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염 장로의 거검을 쥐고, 그대로 '가볍게' 들어올렸다.

"...?"

염 장로의 경악으로 부릅떠진 눈을 보며, 연소현이 그의 맹세에 답했다.

“검악파산, 염곽추. 그대의 검은 이제 나의 것이오.”

* * *

그리고 그날 주군이 된 대공자는 그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었다.

염 장로가 대공자 연소현과 성공적인 거래를 마친 첫 번째 사람이 되어, 대공자와 몰래 거래를 하고 싶은 이들의 중개인이 되라고.

* * *

“그나저나….”

술 한 동이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상상 이상입니다. 다들 그렇게나 상당한 대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치르는군요 뭔가에 홀린 기분이 들 정도로….”

염 장로의 말에 연소현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자신이 믿을 만한 확실한 거래를 했다는, 그 믿음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오.”

염 장로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다들 큰 대가를 치러야,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지요.”

적절한 가격을 제시하는 상대는, 과연 믿을 수 있는 상대인지 고려한다.

하지만 적절한 상대에게 큰 대가를 지불하면, 어째서인지 상대가 아니라 그 거래 자체를 신뢰한다.

비싼 가격을 치르고 산 골동품이 반드시 진짜일 것이라고 믿는 이들처럼.

“신뢰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그리도 얄팍한 것이 되었을까요…?”

연소현이 짧게 대답했다.

“권력을 가지고 나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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